딱지
딱지
  • 김준일 작가
  • 승인 2009.06.25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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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소리 (1)

주인여자가 다음 달까지 방을 빼 달라고 하는데 어떡하지요?

미순한테서 그 말을 듣는 순간 정구는 다시 한번 그 물소리를 들었다. 머리 속으로 폭포가 쏟아지는 것처럼 쏴 하는 이상한 소리가 지나가는 것이다.

정구가 그 이상한 물소리를 처음 들은 것은 군대에 있을 때였다. 탄약고 보초를 서다가 깜박 조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 항상 잠이 모자라 눈이 퀭해서 지내던 일등병 시절이었다. 그 정도라면 사실 연병장이나 몇 바퀴 돌리는 기합으로 끝낼 일이다.

그런데 인정머리없는 중대장은 사정없이 징계 15일을 먹였다. 덕분에 정구는 난생 처음 영창이라는 데를 구경하게 되었다. 정식으로 헌병 백차가 와서 정구를 실어가는 광경은 중대원들한테 대단한 구경거리였다.

그 동안에도 영창에 보낼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사계나 선임하사를 딸려 조용히 보내곤 했던 것이다. 중대장은 정구를 이용해서 공개재판과 같은 효과를 얻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정구는 별로 기가 죽지 않았다. 졸병이 보초를 서다가 깜박 좀 졸은 것이 무슨 큰 죄냐 싶었다. 정작 영창에 가야 할 놈들은 빈둥빈둥 놀면서 보초도 서지 않는 고참놈들인 것이다. 그러나 백차를 타고 막상 헌병대에 도착하자 얘기가 달라졌다.

소지품을 다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이해가 갔지만 허리띠까지 압수하는 데에는 정나미가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영창 안에서 목을 매고 자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바지가 흘러 내리지 않도록 허리춤을 움켜쥐고 헌병을 따라갈 때 정구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린내와 고린내가 진동하는 어두컴컴한 영창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쏴 하고 그 물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충격을 받거나 공포에 사로잡혔을 때 일시적으로 혈압이 올라가서 생기는 단순한 생리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친구들한테 물어보아도 그런 경우에 물소리를 들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 하지요?

미순은 고혈압 증세를 보이는 남편과는 정반대로 하얗게 핏기가 가신 얼굴이었다. 그리고 자꾸 어떻게 하지요 소리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정구네가 세들어 살고 있는 방 두 개짜리 지하층은 보증금 3백만 원에 20만 원짜리 사글세였다. 비록 사글세지만 처음 이사올 때만 해도 그들 부부는 의기양양했었다. 2년 계약을 했으니 그 동안에 전세금 천만 원쯤 마련 못하랴 싶었다.

그러나 2년은 너무나도 빨리 지나갔고 서울의 전세금은 또 너무나도 가파르게 올라버렸다. 보증금 3백만 원에다 단 한 푼도 더 보태지 못한 채 2년이 그렇게 후딱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그 동안 물가도 많이 오르고 했으니 주인이 요구한다면 월세를 5만 원쯤 더 올려줄 각오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집이 팔렸다는 데야 다른 도리가 없었다. 거기다 새 주인네는 식구가 많아서 셋방을 내줄 형편도 아니라는 것이다.

달랑 보증금 3백만 원만 가지고 방 두 개짜리 월세를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방 한 개짜리는 수두룩하게 나와 있었지만 정구는 아버지 수동씨를 모시고 있었다.

아무리 옹색한 살림이지만 방 하나에 세 식구가 끼어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구와 미순은 매일 녹초가 되도록 복덕방을 누비고 다녔다. 수동씨가 좀 거들어줄 법도 했지만 그 팔자 좋은 노인네는 하는 일은 없지만 언제나 바쁜 몸이었다.

당신이 그때 조금만 참았어도…….

미순의 입에서 기어이 그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그때라는 것은 정구가 사고를 내고 학교를 그만둔 일을 말하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김준일 작가 /  TV드라마 '수사반장', '형사' 외 다수 집필. 장편소설 '예언의 날' , '무지개는 무지개' 와 다수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