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법(法)보다 아름다운!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법(法)보다 아름다운!
  • 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 승인 2013.05.30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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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오랜 전 일이다. 원로작가 K씨가 개인전을 앞두고 오랜 친분을 유지해 온 한 화방에 수십 점의 작품을 액자를 하라고 맡겼다. 작품 총액이 시가로 무려 수 십 억에 해당하는 큰돈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때 마침 화방에 불이나 작품이 전소되고 말았다. 영세한 화방의 주인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 이를 어찌 할 거나, 전전 긍긍하고 있는데 소식을 들은 원로 화백이 화방 주인에게 말했다. “괜찮아. 없던 일로 치고 앞으로 사업이나 잘 하게.”

화단에 전설처럼 떠도는 이 미담은 공동체의 삶이 어떻게 꾸려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명쾌한 답을 제시해 준다. 엄정한 계약 관계에 의해 유지되는 현대의 계약사회에서 때로는 훈훈한 인간미가 법보다 더욱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이 일화는 잘 보여준다.

어느 날, 한 작가가 무슨 이야기 끝에 말했다. “단색화만 그린 Y선생님 있잖아요? 그 분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다 글쎄 “인간이 돼야 혀.” 그러는 거예요. 충청도 특유의 어눌한 어투로 그러시는데, 그분이 원래 과묵해선지 돌아가신 지금도 그 말씀이 잊혀지지 않아요.”

비트겐쉬타인도 ‘사람은 인간이 돼야’ 한다고 일갈했다는 사실을 최근에 출간된 평전에서 읽은 적이 있다. 어디 그뿐이랴. 며칠 전에 방문한 한 원로 전위작가 역시 “사람은 미술 이전에 인간이 돼야 한다.”고 강조 했다. 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인간성’에 대해서 말하는가? 

굳이 “밤하늘에는 총총히 빛나는 별, 내 마음 속에는 도덕율”을 강조한 임마뉴엘 칸트의 말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마음 밑바닥에 가라 앉아 있는 인간 본연의 심성에 의지하여 살아간다면 많은 분쟁과 시비가 사회에서 사라질 것이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선행을 하면서도 그 선행을 드러내고 싶은 이기심을 지닌 모순적인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선행이라고 생각한 일이 쌓였으나 그 보답이 상대방에게서 돌아오지 않을 때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그 결과 그동안 쌓은 우호적 관계는 깨지고 끝내는 아니 만남만도 못한 사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얼마 전에 중진 미술평론가 Y씨와 함께 여행을 하다가 비슷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오래 전시 기획을 하다 보니 공을 들인 작가가 어느 날 말도 없이 제 잇속을 찾아 훌쩍 떠날 때 무척 서운하더라.”고 슬쩍 운을 떼니, Y씨는 “나도 한 때 그랬지만, 이제 체념을 하고 나니 마음이 편하더라.”고 한다. 그러면서 미국 LA에서 있었던 한 일화를 들려줬다. 마음씨 좋은 목사님 한 분이 있었는데, 많은 한국의 이민자들이 와서 여러 가지 도움을 호소하면 거절하지 않고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해 줬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적인 현상은 세월이 흘러 성공을 해도 누구 하나 찾아와서 고마움을 표현하는 사람이 없더라는 것이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을 기억하는 자신을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게 그 목사님이 내린 결론이었다는 것이다.

그 동안 내가 만난 화랑주들 가운데 적잖은 사람들이 작가들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무명의 작가를 기껏 키워 놓았더니 어느 날 한 마디 말도 없이 다른 화랑으로 가버리더라. 심지어는 전시를 끝내고 작품 값이 잘 못 됐다며 화랑을 상대로 소송을 거는 작가도 있었다. 그 작가는 패소한 뒤 소문이 안 좋아지자 이 화랑 저 화랑을 전전하다가 끝내는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미술사적 평가도 미미했다.

계약사회에서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복잡한 조항이 담긴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너나 할 것 없이 ‘인간이 되는 일’일 것이다. 가슴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처지를 생각하고 한 발 뒤로 물러서는 일, 이야말로 시비와 분쟁을 피할 수 있는 인생의 지혜가 아니겠는가. 거기다 한 마디 유머를 덧붙이면 금상첨화이겠다. 인생이 다 그렇지 뭐. 셀라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