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칼럼] 사회계층과 공간 - Spatiality is Social
[건축칼럼] 사회계층과 공간 - Spatiality is Social
  • 최혜정 국민대 건축학과 교수/건축가
  • 승인 2013.05.30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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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가 J.G.발라드(J.G. Ballard)의 1975년 소설 ‘하이라이즈(High-Rise)’, 곧 개봉할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 독일감독 프리츠 랑(Fritz Lang)의 영화 ‘메트로폴리스’(Metropolis, 1927)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공간과 사회계층의 관계가 이야기의 주축이 된다는 점이다. ‘설국열차’에서는 기차의 칸이 사회계층을 분리해 놓으며, 소설 ‘하이라이즈’는 고층빌딩에서 고-중-저층으로 나눠진 사회계층간의 처절한 전쟁을 그려낸다. 영화 ‘메트로폴리스’는 지상-지하세계로 상징되는 자본가와 노동자들의 갈등, 모순, 대립이 스토리의 핵심이다. 건축적인 시점에서 이들 세 작품에 관심이 가는 이유는, 다소 차이가 있긴 하지만, 공통적으로 이들이 묘사해내는 사회구성과 그에 대한 비판적 시점이 공간의 서술을 통해 전개되는 것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설국열차’를 제외한 두 작품은 각각 1920년대, 70년대의 작품들이지만 왠만한 현대적 시점보다 세련된 장치들을 제공하여 아직도 명작들로 꼽히는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전달하는 메시지 중 하나는 바로 ‘공간은 사회적이다’(Spatiality is social)라는 점이다.

공간의 사회적 묘사는 늘 있어왔다. 눈에 보이는 공간에 익숙한 우리에게 사회공간은 좀처럼 익숙하지 않은 영역이다. 그러나 건축이 추구하고 있는 공간은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을 정의하는, 소위 ‘둘레를 만드는 작업’만은 아니다. 둘레를 치는 동시에 건축은 다양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 사회문화적 공간을 만들어내고, 반대로 사회문화적 고찰은 건축을 성찰하게 하고 진화시킨다. 건축교육의 가장 첫 번째 단계가 ‘공간이란 무엇인가’를 배우고 탐구한다는 점이 바로 이를 증명한다.   

발라드의 소설 ‘하이라이즈’의 무대는 건물안에 수영장, 레스토랑 등 최고급 시설과 편의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런던 근교의 40층짜리 최고급 아파트이다. 이 소설은 직접적으로 이 건물이 자연스럽게 입주민들을 저층부(프롤레테리아)-중층부(중산층)-고층부의 사회적 계층으로 나눌 것이라는 점을 설계단계부터 고려했다고 밝힌다. 중간중간에 있는 공동 편의시설은 계층 간의 경계들이다. 10층의 쇼핑몰은 하층부(1-9층)와 중층부(11-34층)의 경계선이며, 35층의 수영장과 레스토랑은 중층-고층간의 경계선으로 작용한다. 어느날 벌어진 사소한 말싸움으로 인해 일어난 사소한 층간 입주민들의 싸움은 층들을 오르내리면서 벌어지는 계층간의 싸움으로 돌변하고 인간의 가장 잔혹한 면들이 하나 둘 씩 드러나 비극적 결말로 맺어지면서 최고급 아파트가 상징하던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와 일치해 버린다.

영화 ‘메트로폴리스’는 여러 면에서 걸작이자 ‘논쟁작’으로 일컬어진다. 총 러닝타임 148분(당시의 영화는 90분이 한정선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20여개월의 촬영기간, 3만여 명의 대규모 엑스트라 등… 이 영화는 블록버스터급 영화였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2026년, 현재로부터 약 13년 후이지만, 당시 프리츠 랑의 시대부터는 100년 후였던 셈이다. ‘메트로폴리스’에 나오는 영화세트의 탄생은 감독이 1924년 뉴욕의 마천루들을 처음 본 후 영감을 받아 시작되었다. 시각적으로 매우 섬세한 감각을 지녔던 그는 영화 속 도시의 표현에 심혈을 기울였다. 시나리오는 랑 본인과, 작가였던 그의 부인이 공동 집필하였고, 배우진은 거의 무명이었으며, 아직은 상상속의 도시상을 표현하기 위해 바벨탑, 성경, 고딕 성당, 아트데코 양식 등 다양한 이미지, 스토리, 형상들이 버무려져 미래의 도시상을 만들어 내었다.

이 영화는 다양한 상반관계들의 갈등, 대치, 조합으로 전개된다. ‘메트로폴리스’의 마스터 프레더슨은 도시의 권력을 가진 자본가이며 주인공 프레더는 그의 아들이다. 이들은 여유롭고 화려한 자본으로 치장한 지상세계를 군림하고 영위한다. 반면, 지하세계의 상징, 여주인공 마리아는 지상세계와 철저히 분리되어 매일 맹목적으로 노동을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에게 아름다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노동자들의 유일한 삶의 낙이고 희망의 존재이다. 프레더는 우연히 마리아를 만나 첫 눈에 반하고, 그녀를 찾기 위해 생전 처음으로 지하세계를 경험하며 충격을 받는다. 거대한 시계, 압도하는 기계들, 표정없는 얼굴, 좀비와 같은 행동, 폭발로 인해 종잇장처럼 쓰러져 가는 인부들 등…프레더가 처음 겪게되는 지하세계의 경험을 보여주는 시퀀스는 이 영화의 압권이다. 한편, 인간 마리아는 프레더의 아버지 프레더슨이 고용한 과학자에 의해 로봇으로 복제된다. 일부러 노동자들을 잘 못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키게 하려는 음모를 실행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과학자는 프레더슨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었고, 과학자의 명령에 의해 로봇 마리아는 지상세계도 유혹하고 향락의 세계로 빠트린 후 지상/지하세계의 갈등을 최고조로 이끈다. 이 모든 음모를 깨닫게 된 프레더가 과학자와 맞서 싸워 이긴 후, 이 영화는 두 세계의 화해로 해피엔딩을 맞는다.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스토리의 복잡함은 수 많은 대화로 이끌어도 어려웠을텐데 놀라운 점은 이 영화가 무성영화였다는 점이다. 간간히 영화에 등장하는 텍스트를 제외하고는 주로 배우들의 제스쳐나 표정들이 사건을 이끌어 나가야 했고, 그러했기에 더욱 시각적 전달 매체들과 상징적인 오브제들은 중요한 이야기 장치로 작용했다. 비록 도시와 사회의 붕괴에 직면한 그들이 화해함으로서 도시는 구원되지만, 이 영화는 당시 인간세계의 단상들과 욕망을 상징하는 은유의 공간들을 삽입하여 사회비판적 성찰을 이끌어 나가는, 지극히 현대적이고 오히려 미래지향적 여지를 남겨놓는다. ‘하이라이즈’의 차가운 언어가 오늘의 아파트에 갇힌 우리의 삶을 상기시키고, ‘메트로폴리스’의 지배-피지배간의 딜레마는 오늘도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 영화를, 또는 이 소설을 오늘도 새롭고 흥미롭게 보는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메트로폴리스’의 프로덕션 사진과 영화의 한 장면

(왼쪽부터) 프리츠 랑의 1927년작 영화 ‘메트로폴리스’의 포스터, J.G. 발라드의 1975년작 ‘하이라이즈’의 초판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