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육근병 작가]세계가 먼저 알아본 이단아의 귀환 “이젠 국내활동에 몰입하고 싶어”
[인터뷰-육근병 작가]세계가 먼저 알아본 이단아의 귀환 “이젠 국내활동에 몰입하고 싶어”
  • 윤다함 기자
  • 승인 2013.06.19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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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전 ‘조용한 흔적’ 내달 10일 춘천문화예술회관서 개막

비디오아트와 미디어아트의 경계를 고민하는 전시 ‘Video&Media’가 지난 14일까지 갤러리정미소에서 열렸다. 주로 미술관에서 기념전이나 개인전을 가져왔던 육근병 작가가 대안공간 전시에 참여해 더욱 눈길을 끌었다. 아날로그 매체로 작업을 시작했던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아날로그와 디지털 편집기로 작업을 하게 되면서 겪게 되는 매체의 변이현상에 주목했다. 비디오와 미디어의 영역 구분이 모호한 상황에서 두 장르 규명의 필요성에 의해 기획된 이번 전시 의도가 그를 움직이게 했다. “대안공간의 전시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점은 없었어요. 다만 함께 참여한 작가들과 세대차이가 났는데, 오히려 그 점이 더욱 좋았습니다. 다른 작가들 작품 설치를 도와주는 등 젊은 친구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 좀 썼죠.(웃음)”

△2007-2010 일본 도호쿠 예술공과대학 객원교수 / 2000-2006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미술대학 교수 등 역임 △2007 일맥문화재단 문화예술상 수상 / 1997 독일 <International Award for Video Art> ZKM 수상 △개인전 : 2013  표갤러리 / 2012 일민미술관 / 2009 국립진주박물관 / 2005 일본 겐지다키갤러리 / 2000 벨기에 커틈갤러리 외 다수 △해외전 : 2006 독일 더크리틱아이 / 2000 미국 Alienation and Assimilation / 1995 리옹비엔날레 / 1992 DOCUMENTA 9 / 1989 상파울루비엔날레 외 다수 △작품소장처 : 국립현대미술관 / 일본 아이치현대미술관 / 독일 빌라루피갤러리 / LG 광주 유동 사옥 등

무덤을 형상화 한 대형 봉분 위에 화면 가득 외눈을 비추는 모니터를 설치한 그의 작품은 아홉 살 어린 시절에서 비롯됐다. 소년은 나무로 지어진 남의 집 담벼락에 조그맣게 뚫린 나무구멍(간솔)으로 그 집 마당을 몰래 훔쳐보는 재미에 학교에 지각하기 일쑤였다. 작은 구멍으로 보는 집 안의 일상은 전혀 일상적이지 않았다. 구멍이 작으면 작을수록 마루 아래 강아지는 공룡처럼, 텃밭의 배추는 거대한 식물처럼 보였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것 같았다. 또한 소년은 전쟁놀이를 한답시고 벼로 집을 지어 적병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상상으로부터 스릴과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가끔 소년은 무덤에서 본능적인 친밀감 혹은 공동감共同感을 감지하곤 했다. 무덤 속 개개인의 역사성과 교감하는 느낌, 이러한 심미적인 이해가 나무 담벼락 앞의 핍쇼peepshow에서 얻는 즐거움과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무덤에는 다 사연이 있게 마련이죠. 그래서 무덤에 눈을 장착하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서워 무덤 근처에도 가지 못했어요. 야밤에 모니터, 발전기 등을 다 들고 한 무덤을 찾아 눈을 장착했어요. 모니터를 응시하는 순간 너무 무서워 도망간 적도 있었죠. 도망가다가 두고 온 물건들을 가지러 돌아갔는데, 모니터를 다시 보는 순간 내가 뭔가를 이뤄냈단 걸 직감했습니다. 날이 밝고 무덤 주인께 제를 지내고 죄송하다고, 감사하다고도 인사드렸습니다. 이 작품을 만들어내기까지 꼬박 5년이 걸렸네요.” 소년의 놀이 경험은 오늘날 육 작가의 모티브로 전해지고 있다.

그에게 눈目이란, 작품의 언어이자 세상과의 매개이다. “눈은 가장 순수한 정직의 상징성과 생명의 시작인 신비한 추상성을 함축하며, 역사시대 저변에 선명하게 혹은 잔잔하게 자리하고 있죠.” 또한 관람객은 육 작가의 작품 속의 눈을 응시함과 동시에 작품 속의 눈은 관람객을 볼 수도, 현재를 바라볼 수도 있다는 양면성을 지닌다. 이는 그가 어렸을 적 무덤에서 감지한 영적심성靈的心性의 존재가 현세를 매섭게 직시하고 있다는 느낌으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Japan Project <the wall> 일본 도쿄 1993

대학졸업 후 8년 만에 가진 개인전에서 ‘음양’을 주제로 남자 눈과 여자 눈을 담은 비디오를 설치하고 8년간의 에스킷을 모아 전시했다. 서울대·홍대 라인도 아닌 경희대 미술교육과 출신인 그를 주목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간간히 지나가던 사람만 들어와 둘러보고 나가던 썰렁한 전시였다. 그러던 중, 인사동 갤러리 순회에 나선 유준상 미술평론가(전 서울시립미술관장)는 ‘발견’했다. 깜빡이는 눈을 언어로 삼은 무명 작가의 독창성과 미래성을 말이다.

마침 그때 전시장에 없었던 육 작가를 꼭 만나야겠다며 유 평론가는 다음날 다시 발걸음을 했다고도 한다. 유 평론가는 전시기간 동안 이틀에 한 번씩 찾아와 육 작가의 작품을 보고 또 봤다. 이후 그의 전시가 언론과 미술계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이어서 국립현대미술관 ‘89 청년작가전’, 상파울루비엔날레 등에 참가하게 된다.

해외 비엔날레 커미셔너들도 서울대·홍대 출신들을 주로 뽑아가던 때였지만, 유 평론가의 지지 덕분에 ‘얼떨결에’ 상파울루비엔날레에 나갔다. “설치 다 끝내고 오프닝 이틀 전에 기자들에게 프리오픈을 했어요. 당시 난 영어라고는 ‘쌩큐’ 밖에 모르던 시절이었는데.(웃음) 기자들이 영어로 내게 뭐라고 말을 하는데 당최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그래서 영사관에 통역을 요청해 참사관 한 분이 와서 도와주는데, 글쎄 이분이 갑자기 싱글벙글하더니 아주 좋은 소식이라며 내게 전해주는 겁니다. 내가 상파울루비엔날레 대상 후보에 올랐다나? 촌놈인 내가 여기 온 것만으로도 황송해 죽겠는데,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빵빵 터지니 너무 이상했지. 대체 이게 뭔 일인가 싶기도 하고….”

비록 수상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한국 작가가 대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일본 미술계가 시끄러웠고, 일본 언론은 대서특필 했다. 상파울루에서 알게 된 일본 커미셔너를 만나기 위해 일본 공항으로 들어서니 수 십 명의 기자들이 육 작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 뒤에 유명 연예인이 있는 줄 알았단다. 일본 커미셔너는 육 작가의 입국 소식을 기자들에게 알리고, 호텔 예약부터 자동차까지 모두 준비해 놓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천대받던 그가 일본에서의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대접에 정신이 차려지지 않았다. “일본 일정이 끝나고 우리나라에 귀국했더니 역시나 난 여전히 찬밥이었습니다. 브라질과 일본에서의 경험이 한 여름 밤 꿈같았죠.”

어느 날, 육 작가에게 영문으로 작성된 편지 한 통이 왔다. 당시 중학교 미술교사로 근무 중이었던 그는 동료 영어교사에게 해석을 부탁했다. “편지가 길었지만 결론적으로 내용은 이거였어요. ‘나는 카셀도큐멘타 디렉터인데 널 만나러 한국에 갈 테니 꼭 보자’라고요. 얀 후트(전 벨기에 겐트 현대미술관장)로부터 온 편지였죠. 상파울루비엔날레에서 내 작품을 봤는데, 날 직접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얀 후트는 정말로 한국에 왔고 프라자호텔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내가 로비에 들어서자 그가 먼저 날 알아보고 내 손을 덥석 잡곤 도큐멘타9 작가로 선정됐다며, 그 초대에 응해달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온 세상이 투명하고 하얘지는 느낌이었어요. 내가 굉장히 착해진 것 같다고나 할까…. 그리고는 영어 공부 해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듭디다.(웃음)”

‘카셀도큐멘타’는 미래의 현대미술을 제시하는 실험적 예술행사로서 회화, 사진, 조각부터 퍼포먼스, 설치 등에 이르기까지 장르 구분 없이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을 중심으로 선보여 세계 최고 권위의 미술행사로 인정받고 있다. 위원회의 인선을 통해 작가가 선정되며, 육 작가가 초청된 제9회 도큐멘타에는 36개국 1백87명의 작가가 출품했다.

그 해 3월, 독일 카셀에 간 그는 유명 작가들 사이에서 비로소 상황을 실감했다고 한다. 선정 작가들 중 최연소였던 그였다. 또한 도큐멘타의 핵심건물인 프리데리치아눔 미술관 앞 광장 정면 잔디밭, 일명 ‘명당’ 자리가 그의 전시장소로 잡혔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작가들 간의 치열한 싸움은 비일비재하다. 육 작가의 작품이 전시될 그곳은 일인자 중의 일인자만이 누릴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전시 작품 완성이 이뤄져갈 때쯤 도큐멘타 측에서 갑자기 작품을 옮기는 게 어떻겠냐는 강요 아닌 강요를 하더라는 것이었다. 말인즉슨 선정 작가 중 하나인 조나단 보로프스키가 그 자리를 원한다는 것. “불쾌했죠. 마치 내가 당연히 옮겨야 하는 것처럼 말하더군요. 그래서 다 없었던 일로 하자고, 도큐멘타 참가도 안 하겠다고 내뱉었는데, 막상 겁이 났어요. 진짜 그만 두고 한국으로 가야되나 하면서요. 그때 주변에서 이 일을 소송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고 나도 끝까지 가보자는 마음에 지방법원에 소송을 냈어요. 재판 마지막에 제게 발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내가 그때 말을 좀 잘한 것 같습니다.(웃음) 결론적으론 내가 이겼으니 말예요.”

Documenta 9 <The sound of landscape+eye for field=Rendezvous> 독일 카셀 1992

도큐멘타 참가는 육 작가의 인생에서 언제 다시 올지 모를 크나 큰 기회였다. 일생의 ‘터닝 포인트’였을 테니 말이다. 그 자부심과 그 명예를 지키고 말겠다는 육 작가의 의지는 이 일의 발단이었던 조나단 보로프스키에게도 통했다. 재판에서 조나단 보로프스키의 매니저와 도큐멘타 측 관계자 모두 육 작가의 말에 동의하며 박수를 친 것이다. 틀린 점 하나 없었던 그의 말과 부당하고 불합리한 그 상황을 모두들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육 작가는 그 ‘명당’을 쟁취해내 대형 봉분과 비디오를 이용한 <풍경의 소리+터를 위한 눈=랑데뷰>를 설치하고, <랑데뷰-서양과 동양은 하나이다>란 대형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그에게는 ‘제2의 백남준’이란 타이틀이 붙곤 한다. 이에 대해 “턱없는 얘기”라고 하면서도 기분은 좋다고. “도큐멘타 작가로 선정됐다는 소식에 백남준 선생께서 먼저 연락해 만나자고 하셨어요. 날 ‘육 군’이라고 부르셨죠.(웃음) 정말 순수한 분이셨습니다. 아주 기뻐해주시며, 편하게 임하라고 말씀해주시는데, 그런 진부한 말조차도 백 선생님으로부터 들으니 그렇게 큰 힘이 되더라고요.”

사망설이 나돌 정도로 지금껏 국내 활동이 뜸했던 그가 앞으로는 적극적으로 국내 관람객들과 만나려고 한다. 오는 7월 춘천에서의 개인초대전을 필두로, 지방 소재 미술관 순회 전시에 나설 계획이다. 이어서 10월, 소마미술관 특별전 ‘아시아코드’에 참가한다. 또한 내년에는 10여 년간 준비해온 ‘UN프로젝트’를 설치한다. 아홉 살 아이들의 눈이 담긴 모니터를 미국 뉴욕 UN본부 외벽에 설치해 순수한 어린 아이들의 눈으로 UN의 세계 평화 임무를 말하고자 한다.

이단아의 드라마틱한 성공을 거슬려 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주류도, 비주류도 아니었던 한 젊은 무명 작가의 극적인 반전을 그저 운이 좋다는 말로 딱 자르는 폄훼도 있었을 것이다. “난 운이 좋았다. 하지만 나를 선정한 사람은 바보가 아니었다.”는 그의 말처럼 세계 미술계가 그를 주목한 것 역시 우연이 아니었다. 앞으로 육 작가의 보다 활발한 국내 활동을 볼 수 있길 바라는 바이다.

‘일상 공간 속의 반류’라는 개념으로 접근해, 예술이 특별한 것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지천에 있는 그 어느 것에도 예술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개인초대전 ‘조용한 흔적’은 내달 10일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오픈한다. (문의 :  033-251-34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