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칼럼] 건축처럼 읽는 길 - 브로드웨이
[건축칼럼] 건축처럼 읽는 길 - 브로드웨이
  • 최혜정 국민대 건축학과 교수/건축가
  • 승인 2013.06.20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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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맨하탄의 브로드웨이(Broadway)는 재밌는 길이다. 좁고 긴 맨하탄 섬을 남-북으로 유일하게 사선으로 가로지르면서 격자형의 도시체계를 흔들어 놓는다. 이로 인해 사선의 브로드웨이가 격자형 블록들과 교차하는 지점에 엉뚱한 삼각형의 블록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바로 이들이 뉴욕의 가장 중요한 지점들을 담당한다. 42번가의 타임스 스퀘어(Times Square), 34번가의 헤랄드 스퀘어(Herald Square), 23번가의 플랫 아이언 빌딩(Flat Iron Building), 16번가의 유니온 스퀘어(Union Square), 59번가의 콜럼버스 써클(Columbus Circle) 등, 우리가 뉴욕을 여행하면서 알만 한 많은 장소들이 이 교차점들에 포함되어 있다. 어떤 곳은 공공 광장이기도 하고, 삼각형의 얇고 특이하게 생긴 건물도 있으며, 차량교통의 교차로서의 역할도 한다. 또한 이들의 대부분은 뉴욕 지하철의 주요 환승역들이다. 이곳저곳에 위치한 지하철역 출구에서 나오고 들어가는 인파와 보행자들, 차량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는 공간, 뉴욕의 에너지가 최대치를 찍는다. 가장 많은 보행자들이 걷는 길이기도 하고, 요즘에는 너무 많은 보행자들로 인해 아예 차선을 줄이고 파라솔, 테이블과 의자들을 놓아 쉬는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시시 때때로 변하는 뉴욕의 역동적인 모습과 문화풍경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브로드웨이는 건축이다.

브로드웨이는 뉴욕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길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브로드웨이는 맨하탄이라는 도시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맨하탄 섬이 네델란드 이주민에 의해 정착되기 이전부터 이미 인디언들이 닦아놓은 오솔길이었기 때문이다. 인디언들은 풀과 습지, 바위로 뒤덮인 맨하탄 섬에서 이동하기 위해 길(Trail)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게 바로 브로드웨이였다. 17세기 네델란드 이주민이 맨하탄의 남쪽 끝 지점에 정착하면서, 이주민들은 이 오솔길을 도로로 만들기 시작하였고, 1811년 맨하탄의 격자형 도시체계의 획기적인 계획도 브로드웨이의 사선은 유지한 채 실행되었다. 

이만큼 브로드웨이가 가진 역사적, 지리적 정체는 뚜렷하다. 그러나 뚜렷한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브로드웨이는 뉴욕 특유의 변덕스러움과 우발적인 공간적 전유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느슨한 공간이다. 수시로 바뀌는 사람들과 그 이용에 의한 공간적 전복을 수용하는 유연한 자세를 취한다. 길이 거쳐 가는 도시의 지점과 위치에 따라서 다양한 성격을 수용하고 그 수용이 자연스럽다. 42가의 지점에서 극장들과 번쩍거리는 전광판, 수퍼스토어들이 즐비한 광경에 넋을 놓다가도 30가 아래로 내려가면 한 때 잘 나갔던 뉴욕의 패션 디스트릭트(district)가 나오고, 몇 개의 옷감 가게들과 가구점들을 거쳐 가면 23가의 얇은 삼각형 형상의 고층빌딩과 그 앞의 한적한 공원을 만난다. 더 내려가면 좀 더 큰 공터와 공원이 나오면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보드 족들과 인근의 농작물들을 파는 파머스 마켓(farmer’s market)을 관통하게 된다. 이처럼 브로드웨이를 따라가다 보면 다양한 양식, 문화, 인종, 이웃들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러한 경험들은 도시가 변하면서 살짝 수정되는 작동방식에 따라 그 변모를 같이 한다. 딱히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 뉴욕의 도심체계에서 유일하게 모이고 흩어지는 역할을 하는 평면적 거점이자 길 전체가 리듬을 타듯 흘러가고 변화하지만 그 정체성은 지속되는 곳. 브로드웨이는 하나의 ‘길’일 뿐이지만, 동시에 꽤 능동적인 공간체계이며 ‘건축’이라고 생각한다. 브로드웨이가 지루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이며, 브로드웨이를 걸어가는 것을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직선으로 곧이 뻗어있는 고속도로와, 굽이지고 오밀조밀한 풍경이 펼쳐지는 국도를 운전하는 경험이 다른 것처럼, 브로드웨이는 번호화 되어 있는 세로-가로의 가로체계와는 다른 공간적 행위와 실천을 수용한다. 

1811년 시정부에 의해 제안되었던 계획은 섬 전체를 격자형 가로망으로 전체를 뒤엎는 것이었는데, 이 계획은 개념적으로 굉장히 획기적인 혹은 위험한 접근이었다. 주로 도시의 중심을 몇 몇 지점에 설정하고 이들 공간을 중심으로 체계화를 갖는 전형적인 도시계획의 원칙과는 달리, 순전히 토지의 편리한 이용(땅을 사고팔고 하기에 편한 실리적 추구)을 위해 전체도시를 똑같은 모습으로 뒤 엎는 위험한 모험인 셈이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그 이전에 생겼던 브로드웨이도 새 계획을 위해서는 없애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민들과 시민단체들의 완강한 반대로 인해 브로드웨이는 유지한 채 계획이 실행되었다. 브로드웨이의 폭에 대한 역사 또한 눈 여겨 볼 만하다. 원래 브로드웨이는 전체가 양방향의 도로였다. 이러한 체계가 50-60년대를 거쳐 일방향의 구간들로 바뀌기 시작하였고, 59가를 기준으로 남쪽으로는 모두 일방향화 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 타임스 스퀘어-헤랄드 스퀘어 사이의 보행자 중심 구간은 아예 차량의 통과가 금지되기 시작했고, 유니온 스퀘어 주변의 구간은 도로의 폭이 매우 좁아지는 대신 보도의 폭이 확장되었다. 도시가 현대화 될수록 도로가 확장되는 추세와는 달리 브로드웨이는 도로가 좁아진 셈이다. 계획/설계도 적용되지만 유발되는 행위도 수렴한다. 건축이 취하는 조합과 동일하다. 브로드웨이가 뉴욕을 대표하는 기반시설이자, 조절된 풍경을 만들어내는 랜드스케이프(landscape)이며, 비어있는 공간이지만 꽉 차있는 건축인 이유다.

(왼쪽) 맨하탄의 브로드웨이 – 사선으로 내려오면서 생겨나는 삼각형의 블록들과 몇몇 공간들은 공원화가 되거나 교차로의 역할을 한다. (오른쪽) 1811년 시정부에 의해 제안된 맨하탄 도시계획(Commissioner’s Plan) –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브로드웨이는 기존의 길로 표기됨을 알 수 있고, 그 위를 새로운 격자형 가로망이 뒤엎어진 것을 볼 수 있다.
22-23가에 위치한 플랫 아이언 빌딩(Flat Iron Building) – 브로드웨이가 만들어 낸 가장 얇은 삼각형 블록임에도 불구하고 1902년에 세워진 고층빌딩이다.
42가 타임스 스퀘어의 모습 – 차량의 통행이 전면 금지되어 길 한 가운데에 일광욕을 하거나 자유롭게 배회하는 시민들과 여행객들로 붐빈다.
34가 헤랄드 스퀘어 – 파라솔과 테이블, 벤치들과 화분들이 고층빌딩의 숲에 둘러싸여 있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이 두 공간은 가장 교통체증이 극심한 도로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