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김혜식 한예종 명예교수(前국립발레단장)]원로 자문구해 교수 임용하길… '한예종 무용원 사태'에 안타까움 토로
[인터뷰-김혜식 한예종 명예교수(前국립발레단장)]원로 자문구해 교수 임용하길… '한예종 무용원 사태'에 안타까움 토로
  • 인터뷰 이은영 편집국장 / 글 윤다함 기자
  • 승인 2013.06.24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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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유스발레스타즈' 설립, 매주 무료 수업해 발레 꿈나무 육성

     한국 발레를 세계적인 위치로 끌어올린 국내 무용계의 선구자 김혜식 코리아유스발레스타즈 단장(한예종 명예교수). 국내 무용가로는 최초로 영국 로열발레스쿨에서 유학하고, 졸업 후에는 스위스 취리히오페라발레단에 입단해 해외 발레단에 입단한 한국 최초의 무용가라는 타이틀을 추가하는 등 그에게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후 김 단장은 미국 캘리포니아 프레즈노주립대학 교수로 지내다 1993년 국립발레단장을 맡게 되며 27년간의 해외 생활을 끝마치고 그야말로 화려한 귀향을 했다.

     오로지 한국 발레와 무용의 발전과 격상을 위해 귀국한 그는 국내 발레에서 조기교육과 전문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그런 그의 바람이 이뤄지기라도 하듯이 한예종 무용원이 설립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그는 초대 원장으로 추대돼 체계적인 실기교육의 발판을 마련했다.

     일흔을 넘긴 그는 여전히 갈증을 느끼고 있다. 발레 영재와 인재를 수용할 무대와 교육기관이 부족한 국내 무용계 현실에서 인재 발굴과 육성, 국내외 무대진출을 도모하고자 지난해 코리아유스발레스타즈를 설립해 발레 꿈나무들의 이상적인 성장을 위해 힘쓰고 있다.

     앞으로도 한국 발레를 위해 남은 시간을 보내겠다는 그가 얼마 전, 학생 성희롱 발언으로 해임된 한예종 무용원 여 교수 사태에 개탄했다. 초대원장으로서, 또 명예교수로서 최근 한예종 무용원의 잇따른 부정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그를 만나 얘기를 나눴다.

△현재 코리아유스발레스타즈 단장 / 한예종 명예교수 △이화여대 무용과 졸업 / 영국 로열발레학교 어퍼스쿨 졸업 / 아메리칸 발레시어터 발레스쿨 수학 △국립발레단 2대 단장 /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초대 원장 /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예술대학 무용과 발레 주임교수 역임 △캐나다 레그랑발레 카나디언 수석무용수/ 스위스 취리히오페라발레단 차석무용수 △2002 옥관문화상 / 제5회 인민예술상 수상 △<백조의 호수> <흑과 백> <토미> 등 출연 및 <에테르니테> <카르미나 브라나> <라 바야데르> 등 안무

-여전히 무용계 발전에 힘쓰며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아무래도 병인 것 같다.(웃음) 남편도 내게 이제는 제발 집에서 쉬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난 내 평생 발레만을 위해 살아왔다. 앞으로도 계속 그러고 싶다.”

-코리아유스발레스타즈를 이끌고 있다. 소개 부탁한다.
“뉴욕에서 열리는 유스 아메리카 그랑프리는 아이들이 나갈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콩쿠르이다. 거기서 우리나라 아이들이 나가 기량을 뽐내는 걸 보고 너무 감동적이었다. 주니어 발레를 제대로 육성해 우리나라 주니어 발레의 맥이 쭉 이어지길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그래서 만든 게 바로 코리아유스발레스타즈이다. 단원을 뽑기 위해 전국적으로 오디션을 열어 200명 넘는 아이들이 참가해 정단원 32명 등 총 90여 명을 선발했다. 그 후 매주 일요일마다 무료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선화예고 무용부장 출신의 조미송 예술감독과 내가 직접 수업에 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하기까지 과정이 수월했던 건 아니다. 나와 우리 조직 사람들이 직접 사비를 모아 오디션을 마련하고, 지인이 장소를 제공해주셔서 가능할 수 있었다. 지난해 창단공연 때도 학부모들이 도와줘서 의상을 했고, 이종덕 충무아트홀 사장이 대관료도 반값으로 해주셔서 겨우 올릴 수 있었던 거다. 하지만 올해 도움을 또 받을 순 없는 노릇이다. 도움주실 수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만나고 있다. 좀 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아이들 공연은 단순한 발표회와는 차별화된다. 나이는 어리지만, 모두들 프로의식으로 무대에 오르며, 실력 역시 프로에 버금간다. 프로의 무용 공연이라고 보면 된다. 관람객들 모두 어떻게 일주일에 한번 수업만으로 이런 실력과 무대가 가능하냐고 놀라더라. 실은 올해에는 예산이 없어 휴단해야겠다고 학부모에게 편지까지 써놓고 보내지 못한 적이 있었다. 열심히 하는 아이들을 보고 마음을 다잡고 버티고 있다. 이번에 서울국제무용콩쿠르 오프닝에 12분짜리 공연과  해서 지금 한창 연습 중이다.”

-국내 무용가로는 최초로 영국 로열발레학교에서 유학하는 등 유학파 발레리나 1호이다. 무용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계기가 궁금하다.
“아버지가 교통부 공무원이셨는데, 부서에 축구부를 개설하시는 등 스포츠맨이셨다. 또한 노래와 춤을 즐기셨고, 오빠는 연영과를 졸업하기도 했다. 이렇듯 집안에 이런 피가 흐른 거다.(웃음) 초등학생 시절, 한국전쟁으로 피난길에 올랐던 때가 있었는데, 교회에서 위문공연이 있어서 무대에 올라 춤을 췄던 기억이 있다. 그 후 정식으로 무용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화여중 재학 시절, 무용반에서 활동했는데, 선생님께서 내게 발레가 어울리겠다고 추천해주셨다. 그때 난 발레라는 걸 처음 봤는데, 아주 아름답고 잘 할 수 있겠단 마음이 들어서 그때서야 발레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여자가 무용하는 것에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다행히 집에서는 적극적으로 서포트를 해줬다.”

-1973년 갑자기 은퇴를 선언하기도 했다. 한창 전성기 시절이었는데, 이유는 무엇이었나? 그리고 지금도 춤은 추는지 궁금하다.
“난 늘 나이 들어서는 무대에 서지 않겠다고 다짐해왔었다. 선배들이 무대 준비할 때면, 온 몸에 안 아픈 데가 없다고 앓는 소리 내는 걸 보며 나만큼은 전성기 때 그만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마침 73년이면 내가 딱 서른 살이었을 때인데, 집에서는 나보고 노처녀라며 난리가 났었다.(웃음) 그만 둬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을 무렵, 오빠를 통해 지금의 남편을 소개 받았고 결혼하면서 캐나다레그랑발레단을 그만 뒀다. 그리고는 정말로 집에서 밥 차리며 뜨개질만 하고 살았다. 6개월간만….(웃음) 주변에서 날 그냥 놔두지 않았다. 당시 미국에 살고 있었는데, 내가 살던 지역에서 봄에 있을 갈라에 한 번 출연해달라는 초청을 받아 급히 연습해 무대에 올랐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다른 공연에서 초청이 들어오고, 그 후에는 대학에서 교수로 모셔가겠다고 하고…. 결국 난 마흔여덟까지 계속 춤을 출 수 밖에 없었다.(웃음) 요즘에는 춤 안 춘다. 이 나이 들어서 춤추면 큰일 난다.”

-1993년 국립발레단장으로 국내 무용계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대대적인 쇄신을 감행하며 국내 발레수준이 세계적인 위치로 올라선 것도 이 때부터라는 평가이다.
“현재 국립발레단 수준도 아주 뛰어나고, 환경 역시 좋다. 내가 왔을 당시 여건이 너무 안 좋았다. 난 그때 급여로는 집값도 못 낼 정도였으니 말이다. 단원들 역시 먹고 살 수 없어서 따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만큼 공연이 없었기도 했다. 우리나라 국립발레단을 국제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일념으로 귀국했는데 상황이 너무나도 어려웠다. 더군다나 여자가 수장을 맡는다고 하니 주변에서 말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고, 어느 것 하나 간과할 수 없었기에 모든 것을 뒤바꾸기로 했다. 일단, 단원들의 아르바이트를 용납할 수 없다고 알렸다. 단원들의 반발이 엄청 났었다. 또한 난 차별 없이 오로지 실력 하나로만 판단했다. 이때 주역이나 솔로들이 그만두면서 새 단원들도 많이 뽑았다. 하지만 단원들의 어려움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국내 발레 역사상 최초로 후원회를 만들었는데, 토슈즈도 직접 사비로 사 신어야 하던 때라 후원회가 많은 도움이 됐다. 공연 전에는 단원들에게 고기라도 먹이고, 토슈즈 사라고 용돈 좀 쥐어줬다. 또 유명 외국무용수를 초청해 단원들을 가르치게 하고, 클래식뿐만 아니라 컨템포러리, 네오클래식 등 다양성을 불어넣고 레퍼토리의 폭도 넓혔다. 이제 와서 떠올려보니, 그때 분위기로 보면 나 아니면 아무도 못했을 감행이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무용원 초대원장으로 8년을 지냈고, 교수로서는 총 11년 동안 재직했다. 국립발레단에서 한예종으로 자리를 옮긴 배경이 궁금하다.
“국립발레단에서 혁신을 이루기 위해 힘썼지만 한계는 있었다. 단원들이 전문적인 트레이닝을 받은 상태로 입단하는 게 아니었다. 대학에서 일주일에 한, 두 번 수업하는 것 갖고는 어림도 없었다. 이점이 마음에 걸렸던 난 늘 실제적인 전문교육과 조기교육, 세계적인 발레학교의 커리큘럼의 실현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예종 무용원이 설립되며, 당시 이강숙 총장이 날 원장으로 추대한다며 찾아왔다. 그때 단장을 지내면서 이대 강의를 나가고 있던 때라 난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국내 발레를 위해 귀국한 내가 과연 어떤 길을 택해야 옳은 건지 고민이 깊어 오죽하면 점까지 보러 갔었다.(웃음) 난 조기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기에 결국 한예종을 택했다.”

-무용원 개원 당시 환경이나 상황은 어땠나?
“한종 최초로 내게 명예교수직을 줬다. 그만큼 모교보다 더 애착이 가는 곳이 바로 한예종이다. 무용원을 설립한다고는 했지만 당시 마땅한 건물조차 없던 상황이었다. 또한 새로 생긴데다가 졸업 학위가 없다는 둥 하는 그런 말이 나오니 학부형들이 쉽게 아이들을 보내줬겠나. 하지만 내가 원장으로 온다는 소식에 학부형들이 내 이름을 믿고 좋은 실력의 아이들을 보내주기 시작했다. 당시 고생한 건 말도 못한다. 얼굴에 뼈만 남아서 오랜만에 본 남편은 날 보고 귀신같다고 했을 정도였으니까. 핀란드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하은지,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 황혜민,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정영재 등 모두 내게 배운 아이들이다. 다들 잘 돼서 흐뭇하다.”

-최근 한예종 무용원과 관련한 불미스러운 소식이 들리고 있다. 얼마 전, 한 여교수가 학생들에게 성희롱 발언을 일삼아 해임됐고, 이전에는 교수 공채과정에서의 비리, 학생에게 후원금을 강요하고, 교수의 공연 티켓을 강매시키는 등 뉴스가 꾸준한데, 초대원장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이 클 것 같다.
“그렇다. 요즘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겠다. 어디 가서 한예종 명예교수란 말도 안 나온다. 지금껏 너무도 자랑스러운 마음과 애정을 갖고 있었다. 특히 무용원을 급성장시킨 주역으로서 자부심도 컸다. 하지만 요즘 끊이지 않는 잡음 때문에 가슴이 아프다. 한예종 교수는 아무나 할 수 없을뿐더러 반드시 프로의 경험이 있는 자가 교단에 서야 한다. 학생들의 몸과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위해 헌신을 해야 교수이거늘, 본인의 이름을 빛내는데 집중하니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 같다. 내가 원장으로 있으면서 늘 교수들에게 말했다. 본인이 안무해 작품 올리고, 그런 것에 집중할 게 아니라 아이들을 빨리 성장시키고 세계에 알려야 하는 것에만 힘써야 한다고 말이다. 한예종 교수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본인의 이름을 빛내고 인정받은 것 아닌가. 검증된 자가 교수가 될 수 있도록 원로들에게 자문을 구하길 바란다.”

-지금에 오기까지 부군께서 많은 배려와 격려를 해주셨다고 들었다.
“남편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난 못 왔을 거다. 남편은 결혼 후 일을 그만두길 원했지만, 다시 춤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도 이해해줬다. 미국에서 27년 동안 있던 내게 국립발레단장직을 맡아달라고 요청이 왔을 때에도 정작 나는 망설였지만, 남편은 일평생 기회라며 놓치지 말라고 했다. 결국 21년째 한국에 눌러 앉았지만 말이다.(웃음) 15년 동안 남편과 떨어져 지내고 방학에만 함께 지내며 내가 고생 많이 시켰다. 남편은 나 만나기 이전에는 발레란 걸 본적 없는 사람이었지만 나와 비슷한 점도 많고 통하는 게 많았다. 지금도 날 뒷받침 해주는 그이에게 너무나 고맙다.”

-국내 무용계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용인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열심히 하고 있는 걸 알지만, 이제는 모두가 합심할 수 있는 자리도 좀 마련돼야 하지 않나 싶다. 무용계발전을 위한 진취적인 아이디어 토론을 할 수 있는 장이 자주 진행되면 좋겠다. 작품을 위한 작품 역시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대중을 위해, 관객의 폭을 넓히기 위한 아이디어와 노력도 간과해선 안 된다는 걸 명심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