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의 소통은 무용공연이 갖는 난제로 춤 대중화와 맞물려 무용계의 화두로 떠오른 지 오래다. 그간 발레나 현대무용은 해설이 있는 공연, 안무가와의 대화와 같은 다양한 방식을 통해 관객과의 거리를 좁혀왔으나 한국무용만큼은 관객과의 소통에 물꼬를 틀만한 기획공연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지난 18일 서울 강남에 자리한 성암아트홀에서는 이례적이기에 더욱 값진 한국춤 공연이 열렸다. 중견무용가 4인과 함께하는 토크콘서트와 함께 그들의 춤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춤판 ‘Talk & Dance - 이야기가 있는 춤’이 바로 그것.
서울문화투데이의 기획으로 사과나무미디어가 주최·주관한 이번 공연은 무용가와 관객의 친근한 토크와 한국춤이 한데 어우러져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콘서트형식의 춤판이었다.
이번 공연은 기획자인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대표가 사회를 맡아 중견 한국무용가 4인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김평호(청주시립무용단 예술감독 겸 상임안무자), 정란(목포시립무용단 예술감독 겸 상임안무자), 박시종(청주대학교 겸임교수), 김종덕(창작춤집단 木 대표)가 무대 위에 자리해 자연스럽게 토크가 이어졌다. 한 무용가가 다음 무용가를 릴레이방식으로 소개하면서 시작된 토크는 칭찬과 격려, 조언과 바람이 진솔하게 묻어났다.
이어 4인의 중견무용가들은 관객의 이해를 돕고자 각자의 작품을 설명했고, 춤 인생에서 잊지 못할 재미난 에피소드와 애로사항도 풀어냈다. 마치 TV토크쇼의 한 장면과도 같았던 4인 무용가와의 유쾌한 토크는 객석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국무용의 대가(大家) 국수호 , 박재희, 채향순 선생이 객석에 자리해 무대에 오르는 제자 무용가와 사제간의 훈훈한 정이 연출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는 관객의 질문에 무용가가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어 친근하고 편안한 소통의 장을 이뤄냈다.
이날 춤판에서는 우연하게도 전통춤과 창작춤이 각각 같은 모티브를 띈 작품이 선정돼 무대에 올려졌다. 김평호와 정란은 국수호류의 전통춤을, 박시종과 김종덕은 작고(作故)한 아버지, 어머니를 기리고 그 마음을 담은 창작춤을 선보였다.
김평호는 전통춤의 근간이자 한국춤의 기본인 입춤을 가무일체로 표현한 ‘국수호류 입춤’을 춤추었다. 땅으로부터 깊게 끌어올린 호흡을 끝까지 놓지 않고 손의 사위, 발 디딤새에 담아 가락을 잡고 풀어나가는 도입부가 매우 인상적이다. 굿거리, 자진모리 등 가장 기본이 되는 장단 구성으로 이뤄진 입춤은 춤판이 진행될수록 무대의 사방을 고루 이용하며 춤사위가 크고 웅장해진다. 기교적이고 와류(渦流)적인 느낌보다는 진중하고 묵직하게 펼쳐지는 강한 춤사위의 느낌을 받는다. 무용가 김평호는 2011년 청주시립무용단 상임안무자로 위촉된 이래, 지난 2년의 임기 동안 기획 및 안무에서 역량을 발휘하며 무용단의 든든한 토대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올해 4월 예술감독 겸 상임안무자로 재임된 바 있다.
정란의 무대는 풍류를 즐겼던 선비들의 모습을 담은 한량춤을 안무가 국수호 선생이 새로이 무대화한 ‘장한가’이다. 남성의 춤 ‘장한가’를 국수호 선생이 직접 여무(女舞)로 재구성하여 정란에게 전수했으며, 재구성된 이 춤은 이번 공연을 통해 처음으로 선보여졌다. 앞선 토크에서 정란은 “‘장한가’를 춤출 때 오른손에 들어야 할 부채를 구하지 못했었다. 공연 당일 국수호 선생께서 손수 그림과 존함을 넣은 부채를 주시어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전하며 감사와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하얀 저고리와 보라빛 치마를 입고 들어선 무용수의 손 끝에 산수화가 멋들어지게 그려진 커다란 부채가 들려있고 그것을 펴고 접는 춤사위, 팔을 뿌리고 거두는 동작 하나하나에 진중한 호흡이 실어졌다. 탄탄한 발 디딤새와 과감한 손 매무새가 많았던 기존 작품에서 남성의 호방함을 덜어내고 여성의 섬세함을 더하여 어우른 춤사위가 매우 인상적이다. 동작이 시원스럽게 펼쳐지지만 여성 특유의 부드러운 선이 가미되어있어 작품의 고상함이 더욱 돋보인다. 6세에 무용에 입문하여 올해로 40주년을 맞이한 무용가 정란은 2009년부터 현재까지 목포시립무용단 예술감독 겸 상임안무자로 활동하며 목포지역의 예술춤 활성화 및 무용단의 위상정립에 기여해오고 있다.
박시종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사부곡으로 노래했던 ‘바람의 緣(연)’을 솔로로 재구성한 작품 ‘가시었다.’를 춤추었다. 이 작품은 올해 한국무용제전에서 선보인 ‘나비꽃 한 쌍’과 비슷한 도입부를 가진다. 흰 종이꽃을 든 무용수가 등장해 무대중앙에 흰 종이꽃을 두고 사라지는 장면을 시작으로 안무자가 입은 삼베옷과 같은 상징적 장치가 제의성(祭儀性)을 강하게 만들며 작품의 무게를 더한다. 안무자는 특유의 여성적 감성과 짙은 시적 서정성을 놓치지 않고 무대를 종횡무진하며 깊은 호흡으로 섬세한 움직임을 그려낸다. 허공을 바라보는 시선은 공허함을 담았고 아버지를 보내는 슬픔과 회한의 감정은 일관된 흐름으로 극진하게 표출된다. 무용가 박시종은 전 청주시립무용단 예술감독 겸 상임안무자로, 현재 청주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작품 '나와 나타샤와 시인'으로 제33회 서울무용제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김종덕은 얼마 전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바치는 창작춤 ‘Goodbye Mam’을 무대에 올렸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도, 49제를 참석하지도 못한 불효자의 회한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독특하게도 안무자가 직접 녹음한 일기체(日記體)의 나레이션이 배경음악을 대신해 도입부에서부터 중간중간 흘러나온다. 담담한 어투로 일관된 나레이션과 대조적으로 비통하고 먹먹한 느낌을 고스란히 담은 춤사위가 돋보인다. 핀 조명 아래 우두커니 서있는 김종덕은 가슴을 몇 번 두드리더니 손등을 손바닥에 마주치는 제스쳐를 반복하며 어머니의 부재를 비로소 실감하는 듯 사무치는 그리움을 고스란히 표현한다. 긴 호흡과 분절적으로 뱉어내는 호흡, 간결한 동작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안무자의 심리적 상태를 효과적으로 표출하며 관객의 공감을 이끌었다. 무용가 김종덕은 창작춤집단 木의 대표로 한양대에 출강하고 있으며 지난해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무용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Talk & Dance - 이야기가 있는 춤’은 무용가의 이야기를 토크 진행방식을 통해 솔직하고 정감있게 풀어 관객과의 소통을 시도했다. 뿐만 아니라 중견무용가 4인의 전통춤 및 창작춤을 한자리에 모아 각 춤판을 차별화시킨 점은 한국춤이 관객과 어떻게 만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실험해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춤의 깊은 호흡은 작은 규모의 공연장에서 더욱 생생히 전달되게 마련이다. 올해부터 무용공연을 부쩍 늘려 무용과 관객과의 활발한 만남을 이끌어오고 있는 성암아트홀은 200석에 달하는 크지 않은 규모로 무용가와 관객의 긴밀도를 높이는데 일조했다. 관객은 춤꾼의 기량과 감정을 바로 눈 앞에서 감지하고, 춤꾼은 관객의 반응을 그 즉시 느껴 다시 관객에게 춤으로 화답했다. 더불어 이색적인 토크 진행방식, 작품구성의 기획력까지 한국춤의 이 같은 시도는 관객과 무용가의 소통에 있어 매우 긍정적 현상이다. ‘Talk & Dance - 이야기가 있는 춤’의 공연이 한국춤 공연의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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