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문제는 소프트웨어다.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문제는 소프트웨어다.
  • 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 승인 2013.08.16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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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1993년 지방자치제의 실시 이후 전국의 지방 자치 단체는 경쟁적으로 문예회관을 건립했다. 그 결과 현재 전국의 어지간한 지자체에는 문예회관이 있다. 문예회관에 필수적인 시설이 공연장과 전시관이다. 그러나 말이 전시관이지 자격증을 갖춘 학예사가 있는 곳은 거의 전무하고 대개는 공무원이나 비정규 계약직 사무원이 업무를 본다. 전시 예산이 빈약해서 군 단위의 전시관은 지역 작가들의 도움을 받아 기획 전시를 꾸리기도 하지만, 대개는 대관으로 공간을 채우는 것이 상례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대부분의 전시회는 아마추어 동호회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문제는 소프트웨어의 절대적 부족이다. 하드웨어는 겉이 번지르르 하게 지어 놨지만 정작 거기에 담길 중요한 내용에는 손을 못 대고 있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관심조차 없다. 과연 지자체 당국은 이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나 하는가? 위로는 군수나 시장으로부터 아래로는 말단 행정 주사에 이르기까지, 시의회 의장으로부터 일개 의원에 이르기까지 창의성을 갖고 임하는 자세를 보기 어렵다. 벤치 마킹이란 바로 이럴 때 쓰는 단어가 아닐까?

나는 최근에 지중미술관으로 유명한 일본의 나오시마 섬에 다녀왔다. 일본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지중미술관은 말 그대로 땅속의 미술관이다. 미술관 건물이 마치 지하 벙커처럼 땅속 깊숙한 곳에 세워져 있어 미술관 정문을 통과한 관람객들은 시작부터 독특한 시각 체험을 하게 된다. 거기, 미로처럼 얽힌 전시장 곳곳에서 관람객들은 모네, 월터 드 마리아, 제임스 터렐 등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품과 만난다. 이 독특하고 강렬한 시각 체험이 입 소문을 불러와 이제는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 나오시마 섬에는 그 외에도 베네세 회사가 경영하는 베네세 미술관과 이우환미술관 등 유명 미술관이 곳곳에 포진해 있어 일종의 투어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잔잔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곳은 마을 미술 프로젝트다. 우리의 면 단위 정도 작은 마을 곳곳에 위치한 단층 가옥의 전시관들은 ‘장소 특정적(site specific)’ 작품들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초대작가들의 면모를 보면 제임스 터넬 등 가히 세계적이다. 작은 시골 마을이지만 거리는 담배꽁초 하나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깨끗하고 주민들은 친절하며, 전시관을 지키는 자원봉사자들은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다. 일본의 이러한 저력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가? 나는 그것이 일본인 특유의 공공의식과 시민정신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요즈음 일본의 쇠퇴를 자주 논의하지만 나는 일본인들의 이 높은 문화 정신을 보면서 그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으리라고 믿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떠한가? 세계에 내놓을 볼만한 프로그램의 절대적 결여. 이것이 바로 우리 지자체 문화예술의 현주소다. 소요된 비용의 많고 적음을 떠나 독창성과 창의력을 갖추지 못한 프로그램들의 난립이 질적인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시각적 피로도를 가중시키고 있다. 축제는 그 나물에 그 밥 격으로 서로 비슷하여 볼 것이 없고, 관행적으로 붙이는 ‘국제(international)’ 행사에는 정작 외국인들은 찾아볼 수 없고 온통 내국인들로 붐비고 있는 광경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는 관(官)이 벌이는 대(對) 세계 사기극이 아닌가?

예술의 전당은 우리 문화예술의 심장부 격이다. 공연과 전시가 상시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은 소장품의 수나 질의 면에서 미술관의 품격을 갖추고 있지 못하지만 넓은 전시면적은 많은 수요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다양한 아트페어를 비롯하여 블록버스타급 전시들이 연중 열리고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자체 기획전시의 비중이 점차 낮아지고 있다. 전에는 그래도 볼만한 기획전시가 많이 열렸다. 그런데 왜 최근 들어 기획전시가 열리지 않고 있는가? 이는 경영진의 마인드와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최근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깊은 우려의 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소프트웨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