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경 칼럼]되새겨보는 남북 휴전협정 60주년, DMZ과 지역 주민들- ④
[이수경 칼럼]되새겨보는 남북 휴전협정 60주년, DMZ과 지역 주민들- ④
  • 이수경 교수/도쿄가쿠게이대학
  • 승인 2013.08.27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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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비무장지대)에 남겨진 비극,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 아는가???
 
각종 나물향과 깊은 맛의 된장국이 미각을 깨우는 조찬을 즐긴 뒤, 일행들과 전날 갔던 화천발전소 및 꺼먹다리 반대편 쪽으로 이동하여 단체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치열했던 화천 격전지로 알려진 수리봉(643 고지) 전투 전적비가 있는 산등성이까지 올라갔다. 한국 전쟁 당시 화천댐 및 발전소 탈환을 위한 중공군 제58, 제 60, 제 151의 3개 사단이 침공했을 때, 국군 6사단과 미군 제17연대 합동 작전으로 응수하여 21,550명의 적군을 사살하고, 2,617명을 생포했으며 그들이 가졌던 각종 무기류를 노획하였으므로 무훈사의 대전과를 올린 것을 기념하여 1957년에 육군 제2군단이 고지 사수 기념으로 전적비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어마어마한 살상의 격전지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적군의 사살 및 생포만 기록되어 있지 한국측 희생자 수가 얼마였는지는 적혀져 있지 않다. 치열한 전투였다면 상대 사망자 숫자 만큼 한국측도 그에 비례한, 혹은 더 적을 수도, 더 많을 수도 있는 희생자가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한국측 피해자의 기록도 명확히 해서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고귀한 생명들의 존재를 역사에 알리는 것이 더이상의 참혹한 살상 구조를 막고 후손들의 우행을 저지하여 지혜로이 미래를 평화사회로 구축하는 중요한 교육적 자료가 될 것이다.

오랜 외세침입에 지배당한 뒤, 고래 싸움(미?소 대국의)의 희생이 된 동족간이 서로 적군으로 대치하며 살고 있는 20세기 한반도 역사는 갈기갈기 찢어진 상처 투성이이다. 남북 분단 이후, 강한 민족주의의 슬로건하에 쇼비니즘적 국가우선주의로 대한민국 형성기를 거쳐왔으나 지금 우리는 국경이 낮아진 현실 속에서 글로벌리즘 사회를 견인하는 중요 국가 과제를 짊어진 채 선진민주국가의 과도기에 들어서 있는 셈이다. 이미 150만명 이상의 다문화권 출신이 한국의 구성원으로 살고 있다. 그렇기에 지나친 자민족 중심주의 혹은 자국 우월주의 땜에 형평성을 잃은 역사 기록이나 역사수정주의에 도취한 자국 미화 의식은 자칫하면 타문화권 출신이나 타민족 배타주의를 초래하여 사회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 그렇기에 과거의 일방적인 기록 등은 조사 분석한 결과를 통하여 개선하고, 보다 냉철하게 과거와 미래를 잇는 정확한 기록 자세를 사회 전체가 공유하여, 국제 사회에서도 통용할 수 있는 설득력있는 자료로 이성적이고 합리적 사고 방식의 역사 해법을 보여 세계의 규범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우리는 화천에서 파로호나 화천 전투 격전지 등을 재확인한 뒤, 가파른 산길을 따라서 북한강 상류를 올라 화천읍 동촌리에 있는 [평화의 댐]과 [비목 공원]쪽으로 이동을 했다. 1960년대 청년 장교였던 한명희가 녹슨 철모가 놓여진 돌무덤을 보고 노랫말로 옮긴 것에 장일남이 곡을 붙인 가곡이 [비목]이란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 비목 가사가 새겨진 기념비 등이 놓여진 비목 공원은 1995년에 대대적으로 조성되었고, 매년 6월에는 비목문화제(2013년6월에 18회)가 개최된다.

『비목』이 탄생되게 한 녹슨 철모가 놓여진 돌무덤.

다양한 평화 모뉴멘트가 설치된 [평화의 댐]에서 비목 공원 쪽에 놓여진 [평화의 종]에서 일행들은 500원을 넣고 타종을 하고선 그 아래에 조성된 비목 공원 옆에 마련되어진 정자에 앉아서 ‘광대패 모두골’의 비목 연주를 들었다. 더운 날씨였지만 연주를 하는 일행도, 듣는 우리도 모두 민족의 상흔이 남은 땅에서 현실을 추스렸다.
 
숙연해진 마음으로 비목 공원을 둘러보며 [전쟁과 평화]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 뒤, 우리는 근처의 식당에서 간단히 비빔밥으로 점심을 먹고나서 2000년 6월에 개장된 양구의 전쟁기념관으로 이동하였다. 비탈진 산길을 내려가다보니 움푹 파진듯한 해안면 전체가 마치 화채그릇(punchbowl) 같다고 당시 참전 중이었던 미군이 한 말이 그대로 별칭이 되어 펀치볼 지역으로 불리고 있단다.

 

 

펀치볼 포토존이다.

 

펀치볼이라…
호젓한 산촌 마을에 붙여진 어울리지 않는 지명.
이 모순스런 호칭이 현재의 비무장지대를 말하는 듯 했다.
동족이 총구를 맞대던 혈전 속에 참전했던 미군의 영어 한마디가 그대로 지명이 되어 남아있으니… 조용한 마을에 붙여진 그 이름이 익숙치 않아서인지,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 격리된 듯한 마을 호칭에 조금 씁쓰레함을 느낀 것은 필자의 편견 때문일까?

자그마한 동네 둘래길을 따라서 양구통일관 주차장에 주차를 하니 통일관 옆의 전쟁기념관이 보였다. 이 전쟁기념관은 양구 지역을 중심으로 치열했던 9개의 격전들(도솔산, 대우산, 백석산,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가칠봉, 949고지, 펀치볼, 크리스마스 고지)을 재조명함과 동시에 전쟁의 실상과 폐해를 상기시켜주는 각종 전시물이 입체적으로 상설 전시되어 있는 곳이었다(입장은 무료).
기념관 입구의 지뢰 조심 표시가 붙어 있는 철조망 등의 디스플레이가 비무장지대의 긴장감을 고조시켰고, 내부에는 한국전쟁 당시 사용되었던 총탄의 탄피나 철모(총알이 뚫은), 각종 총기류, 개개인이 적었던 메모 등의 유품과 참전 전사자 명단, 당시 뿌려진 전단지 등이 그 시대를 연상하게 전시되어져 있었다. 당시 사용되었던 총기류나 총탄 등을 보면서 비록 세월 속에 풍화되어가지만 이것들에 그 많은 사람들 목숨이 뺏겨졌다고 생각하니 총탄 하나하나마다 살고 싶어하는 영혼의 외침이 깃들어 있는 듯한 착각조차 들었다.

살육의 장소, 이기적인 사욕과 명분이 될 수 없는 정당화의 모순, 광기어린 전쟁 구조…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나??? 미증유의 사람들이 죽어갔으나 그 생명들을 앗아간 책임을 추구할 곳도, 책임질 사람도 없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결코 전쟁이란 우행에 휘말려서는 안 될 것이고, 시민들이 그런 호전적 감정론의 흐름에 [절대 반전!!!]이란 의식으로 전쟁을 저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민주주의 선진국의 시민 의식임을 재삼 확인을 했다. 그래도 전쟁/분쟁을 도발하는 자들이 사람들의 목숨을 경시한다면 그런 호전주의자들을 지구 밖의 혹성으로 보내어 두번 다시 지구촌을 훼손시키고 생활 환경을 파괴시키지 않도록 범 우주적인 규제가 국제연합 규모로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양구의 전쟁기념관과 해안면 을지전망대, 그리고 제 4 땅굴로 보는 한반도 현실

양구전쟁기념관에 침묵하고 있는 전시품에 서려진 사라져간 사람들의 영혼들을 기리며 밖으로 나오니 제4 땅굴 방문 절차와 더불어 현지 귀농민이자 비무장지대에서 장교로 군 생활을 전역한 인제군 서화2리 이장을 하는 장근세씨(DMZ 유기산채 작목반 대표)가 우리 일행에게 다양한 현지 상황과 을지전망대, 제4 땅굴 관련을 소개해주기 위해 동행하였다.

 

제 4 땅굴 앞에서.
장근세씨는 춘천서 대학을 졸업한 뒤 고향인 서화로 돌아와서 입시 학원을 하다 귀농 생활을 하는 중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최근의 현지 지역민의 생활 및 실상에 대해서 알기 쉽게 설명을 해 줬다.
장근세씨 말대로 을지전망대로 가는 산비탈길에는 대규모의 인삼밭 등이 있었고, 최근엔 외부 인삼재배 사업가들의 진출이 증가하는 바람에 현지 주민들의 소규모 자본이 열세라는 현실이 실감이 갔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 북방한계선이 보이는 을지전망대에 오르니 중간에 병사들이 인원 체크를 한다. 차에 오른 군인은 얼굴에 여드름이 아직 가시지 않은 동안의 청년이었다. 왠지 긴 장총이 버거워보이는, 아직 어려보이는 소년의 이미지가 남아있는 그 군인의 얼굴을 보면서 [씩씩하고 용감한 군인 아저씨]란 이미지에는 거리를 느꼈다. 필자가 보기엔 이제 막 대학에 들어온 신입생 같기도 했기에 남북 분단의 현실에 가슴이 미어졌다.

 

동행한 장근세씨가 을지전망대에서는 북한측 쪽엔 일체 사진을 찍지 말라고 한다. 트라블의 원인이 되어 단체행동에 제한도 생긴다 하니 모두들 카메라를 집어 넣는다.
을지 전망대 현지 가이드의 위트있는 비무장지대 소개와 더불어 우리들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지형의 특징을 지적하길래 고개를 들어보니, 분단의 현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북녁땅은 바로 우리 앞에 놓여있었다.
국경을 넘어서 세계 곳곳을 꽤 다닌 필자건만 정작 가장 가까운 철조망 건너편 민족의 갈라진 반조각 땅엔 출입조차 할 수 없으니 참으로 기구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특히 한국인으로 일본의 국립대학법인체 교수를 하다보니 쉽게 갈 수 있는 입장이 아니어서 더더욱 조국의 비애 땜에 생기는 고갈에 심한 갈증을 느껴야만 했다. 과연 내 생전에 저 북녁땅을 질러서 마음 편히 여행 할 기회는 오는 것일까?

해안면 마을을 내려보며 을지전망대를 뒤로한 뒤, 우리 일행은 남방한계선을 넘어서 1990년3월에 발견 된 제4 땅굴 쪽으로 향했다. 백두산 부대가 1992년2월까지 37억원을 들여 안보기념관과 기념탑 등을 세우고 갱도 및 갱내시설을 설치해 안보교육 및 안보관광지로 공개를 하고 있다고 한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땅굴 쪽의 계단을 올라가니 제4땅굴이라고 적힌 기념비와 더불어 전시때 사용된 비행기나 전차, 탱크 등이 안보기념탑 좌우로 설치되어 있고, 땅굴 수색 중에 북한군이 설치한 수중지뢰로 산화한 군견[헌트]의 충견비가 입구 근처에 세워져 있었다. 땅굴 내부에선 사진 촬영은 절대 엄금이라고 강조하는 담당 군인들의 어조 속에서 군대 문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어둑한 땅굴 내부를 투명유리 덮개의 전동차로  전후 몇 미터 왕복을 경험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민간인이 땅굴을 체험할 수 있는 최단거리의 공개라고 볼 수 있기에 큰 체험 기대보다는 땅굴의 실태 확인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안보전시관. 철모와 탄피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밖으로 나오니 오른 쪽에 안보전시관이 있기에 들렀다. 학사장교급 군인 몇 명이 안내 데스크에서 성실하게 답해준다. 같이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물으니 기분 좋게 응해준다. 필자의 제자 중엔 오래전에 칠성부대 장교로 전역한 학생도 있기에 오버랩이 되었다. 어떤 면에선 제자들이 보낸 비무장지대의 군대 환경을 눈으로 보고, 느끼면서 현실적인 한반도를 확인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안보전시관 역시 한국 전쟁 당시를 상기시키는 무기 및 유품, 북측 전리품 등의 디스플레이가 되어 있었고, 양구의 격전지 중에서도 단장의 능선 전투(Heartbreak Ridge),백석산 전투, 가칠봉 전투, 펀치볼 전투(Punching Ball), 도솔산 전투, 피의 능선 전투(Blood Ridge Area) 등의 전투 상황에 대해 화면과 더불어 상세한 소개가 있었다. 전시관을 둘러보며 아직도 전투의 피가 마르지 않은 비무장지대의 긴장된 현실을 직시하며 일행은 다음 목적지인 한국DMZ 평화생명동산 교육마을(Korea DMZ Peace-Life Valley Education and Training Center,서화 평화도서관 포함) 로 이동을 했다. 평화생명마을이란 푯말이 서 있는 촌락 좌우엔 독특한 자기부대 특성을 슬로건으로 내 건 군부대들이 있었다. 그 곳에 도착한 우리는 짐을 푼 뒤, 곰취나 더덕 등의 산나물 등이 대단한 향기를 뿜어내는 저녁 식사를 마쳤다. 정말 필자를 위해선 이 곳의 산채나물과 된장국 등의 음식들은 너무도 맛있고 향긋하게 심신을 만족시켜주는 힐링 푸드의 정상급 음식이었다. 지금 이 글을 적으며 그 날 찍어왔던 음식 사진을 보고 있자니 심야임에도 불구하고 저절로 침이 고인다. 음식에 대한 본능의 갈구가 이토록 강할 줄이야.

 저녁을 먹고 나니 [한중경제신문]의 류재복 편집국장이 그동안 우리 일행의 마이크로 버스를 운전해 주신 장영진씨가 자신이 현지에서 경영하는 펜션을 구경가자고 하는데 같이 가보겠냐고 묻기에 필자도 맑고 아름다운 대자연과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산채나물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펜션에서 편안히 집필할 기회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터라 대구계명문화대학의 오카다 교수도 불러서 동행을 했다. 인제와 양구를 잇는 도로 쪽에서 구비길로 들어가는 인제 서화면 천도리에 위치한 이 팬션 옆에는 제법 큰 규모의 비교적 얕고 넓은 강물이 흐르고, 앞 뒤로는 산과 숲이 어우러지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펜션](속칭 아다팬, 대표 전화; 010-2491-2080)이었다.

원래 외부에서 생활을 하다 귀농 생활 겸 강원도 관광 안내도 맡으며 팬션 경영을 한다고 했는데, 2층에서 별도 생활이 가능한 공간이 되어 있어서 중장기 체류도 가능한 곳이었다. 미리 전화를 하면 팬션주인인 장영진씨가 픽업을 한다고 하는데, 인가가 적고 조용하여 집필 등의 집중 작업이 필요할 때에는 쉬면서 일하기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했다.

 산천의 수려함을 재확인한 뒤, 숙소로 돌아오니 풍류학교 교장도 맡고 있는 지성철씨의 시나위와 민속풍물패 ‘광대패 모두골’의 연주, 정대호 대표의 재치있는 노랫말에 흠뻑 젖어 모두가 흥겨운 교류회를 가졌다. 한 때 힘든 세월을 보낸 양홍관(삶의 출판 협동조합) 주간이나 독서르네상스운동을 전개 중인 황광석 사무총장, 동북아 평화연대의 홍선희 대표에 안양불교문화대학의 홍대봉 학장 일행 등도 그 공간에서는 뜻을 함께하며 시간을 공유했다. 의외였던 것은 계명문화대학교의 오카타 타쿠미 교수의 유니크한 노래 실력은 물론, 마치 한국 유학동안 풍악 장소만 조사하러 다닌 듯 한 후쿠오카 대학교의 히로세 테이죠 교수의 유창하고 능숙한 한국 노래 실력에 모두 경탄을 금치 못했다. 고려대학에서 유학을 한 그의 실력은 대학에서 공부만 한 수준이 아니라서 모두 앵콜을 재청할 정도였다. 그에 어우러져 이혜경 대표의 춤과 참가자들의 가락소리에 주최측인 이대수 목사의 인사 소리도 만족으로 충만한 듯 하였다. 국경과 종교를 넘어선 이 모임의 취지, 그 곳엔 우리가 추스려야 할 민족사 뿐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생명의 존엄성과 전쟁 구조의 불행을 반복하는 우매한 행위를 더이상 해서는 안된다고 약속하는 상생화해의 장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