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미술평론가 이일의 삶과 업적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미술평론가 이일의 삶과 업적
  • 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 승인 2013.10.11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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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이일(1932-1997)은 한국 현대미술사상 전후 모더니즘의 도입기와 형성기,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찾아온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살다간 탁월한 현장 비평가였다. 그는 1957년에 도불, 파리대학교 문과 4대학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하고 1966년에 귀국,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의 교수가 돼 후진을 양성하였다.

한국현대미술사에서 전후 앵포르멜의 사조가 쇠잔해지면서 나타난 [청년작가연립전] 세대의 등장은 ‘실험과 전위’라는 말로 요약되는데, 그 세대를 비평적으로 이끈 장본인이 바로 이일이었다.

그러니까 무, 신전, 오리진 동인의 연합체인 [청년작가연립전]의 멤버들은 그가 귀국 후에 얻은 첫 직장인 홍익대학교의 제자들이었고, 해외 미술의 정보에 목말라하던 그들에게 있어 이일의 존재는 신세대 미술운동의 기수와도 같았던 것이다. 팝아트, 네오다다, 해프닝과 같은 최신의 해외 사조는 젊은 예술가들의 예민한 감성을 자극했으며 그러한 열기는 이듬해에 전시장에서 유감없이 표출되었다.

‘환원과 확산’은 이일의 비평관을 대변하는 키워드이다. 서로 대(對)를 이루는 이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는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제기될 수 있는 것이겠지만, 환원은 미니멀리즘을 중심으로 한 본격 모더니즘을, 확산은 다양한 가치들이 부상하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를 예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물론 그가 이 용어를 [A.G전](1970)의 타이틀(확산과 환원의 역학)로 사용한 연대적 거리로 미루어볼 때 그 당시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를 예견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시인이자 비평가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비평의 기본자세, 그것은 곧 비평의 대상이 되는 작품과의 대결의식, 더 나아가서는 동참의식이라 할 것이다. 평론가도 모름지기 작가가 자신의 작품과 대결하듯이 작가의 작품과 대결해야 할 것이며, 또한 작가의 제작 행위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한 발언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이일은 타고난 현장비평가였다. 그는 때로는 자신이 직접 작품을 제작하여 전시회에 동참할 만큼 미술현장에 적극적이었다.

그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재직한 30여 년간의 세월은 한국 현대미술의 중요한 융성기와 일치하며, 그는 그 척박했던 시기를 작가들과 더불어 몸소 헤쳐 나갔던 것이다. 현장비평가로서 이일의 이러한 면모는 1970년대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이른바 ‘범자연주의’로 통칭되는 이일의 단색화에 대한 비평적 옹호는 비평가로서 그의 삶에 중요한 전기를 이룬다. 이른바 성기(盛期) 모더니즘의 핵을 이루는 단색화는 70년대를 통해 그와 동세대의 작가들인 김창열, 정창섭, 박서보, 하종현, 윤형근, 이우환, 정상화, 윤명로, 권영우, 김기린 등등에 의해 숙성되었다.

이른바 ‘축적’과 ‘반복’이라는 단색화 공통의 방법론은 80년대를 관통하면서 단색화 계열의 많은 후배작가들을 배출하는 요체가 되었다. 현장비평가로서 이일은 다수의 개인전 서문과 시평을 통해 이들의 활동을 독려하였고, 그러한 그의 비평적 활동은 서구의 미니멀리즘과 차별되는 한국적 미의 전형을 창출하는데 그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비평가로서 이일의 예리한 안목이 유감없이 발휘된 지점이 바로 여기거니와, 이는 서구적 방법론의 극복이라는 지난한 과제에 대한 헌신의 결과였던 것이다.

최근 비평가로서 이일의 업적을 정리하고 자료화하는 작업이 후학들에 노력에 의해 결실을 맺어 흐뭇한 미담이 되고 있다. 정연심 홍익대 교수를 중심으로 김정은, 이유진 등이 펴낸 <비평가, 이일 앤솔로지>(상하권, 미진사)는 비평가 이일이 쓴 모든 글을 망라하고 있다.

이 책은 비평가 이일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의 시발점이면서 한국의 현대미술 발전을 위해 평생을 바친 1세대 비평가의 고귀한 삶에 대한 후학들의 헌사이기도 하다. 전집의 출판과 더불어 최정아 갤러리에서 열린 [비평가 이일 컬렉션전]은 작가와 비평가 사이에 흐르는 끈끈한 정과 동지의식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