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이수동 화백] 한 편의 연애편지같은 따뜻한 그림 "모두가 내 그림 보고 행복 느꼈으면..."
[인터뷰-이수동 화백] 한 편의 연애편지같은 따뜻한 그림 "모두가 내 그림 보고 행복 느꼈으면..."
  • 인터뷰 이은영 편집국장/ 정리 고무정 기자
  • 승인 2013.10.11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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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그림 소장자들과 함께 성장하고 싶다

최근 「오늘도 수고했어요」라는 이름으로 이수동 화백의 그림책이 출판됐다. 화가가 책을 출판하기는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수동 화백의 출판은 첫 번째 그림책 「토닥토닥 그림편지」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책을 펼치면 나타나는 이수동 화백 특유의 파스텔톤 그림들을 보면 마치 한편의 연애편지를 읽는 느낌이다. 그래서 독자는 감상하는 내내 두근거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작품을 감상한다. 하나의 동화책과 같은 서사를 지니기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그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어느새 작품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조그마한 대상을 말해도 커다란 우주를 담는 시와 같이, 그의 작품들은 소소하고 자그마한 대상들을 화폭에 담아 우리의 내밀한 정서와 가장 보편적인 마음들에 점을 찍는다. 자그마한 소녀의 감성을 캔버스에 옮긴 듯한, 그 그림의 주인공 이수동 화백을 가을햇살이 쨍쨍한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일산에 위치한 이 화백의 화실에서 만났다.

 

   
△1959년 대구생 △영남대학교 미술대학 및 대학원 졸업 △개인전 20회(‘90~’08, 송아당화랑(대구),노화랑(서울)) △화랑미술제 14회 참가(‘93~’08. 예술의 전당,송아당 화랑-부산 BEXCO) △KIAF 3회 참가(‘02, BEXCO, '05,'07, COEX) △PICAF 참가(‘00. 부산 문예회관) △FREE ART FREE 전(‘01, 일본) △멜버른 아트 페어(‘06, 호주 멜버른) △시드니 아트 페어(‘06, 호주, 시드니)
△화상 10년의 눈 전(‘95, 예술의 전당) △인물, 그 내면의 미학 전(‘95,갤러리 타임) △회화 속의 문학정신 전(‘97,갤러리 63) △아! 대한민국 전(‘99,갤러리 상) △인물과의 교감 전(‘01, 현대 아트 갤러리) △7인의 봄 나들이 전(‘03, 송아당화랑) △재현과 구현 전(‘04, 대구 문화 예술회관) △찾아가는 미술관(‘04,’05 국립현대미술관) △작은 그림 큰 마음 전(‘06,’07, 노화랑) 등 그룹전 170여회

 

 
-어느덧 위로할 나이가 됐다며 첫번째 책 「토닥토닥 그림편지」에 이어 두 번째 책 「오늘도 수고했어요」를 냈다. 화가가 이렇게 책을 내기는 쉽지 않은데.
사실 첫 번째 책은 내 책을 한 권 낸다는데 의미를 두고 책을 냈었다. 처음엔 독자나 팬과의 소통을 위해 미니홈피에 작품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림만 올리면 지루하니 짧게는 두 줄에서 길게는 열줄 정도의 설명을 곁들였는데, 이를 보고 신문기자들이 찾아와 연재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시작된  세계일보 그림 연재 열 줄에서 스무 줄 정도로 더 긴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게 신문에 연재하는 그림이 4회쯤 되니, 어느 출판사 대표에게 출판을 하자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신문 연재 40회를 기다렸다가, 미니홈피에 올린 작품과 합쳐 책을 낸 것이 1편 「토닥토닥 그림편지」이다. 현재 14쇄까지 나온 그 책은 젊은이들에게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 아무래도 내가 그리는 그림이나, 곁들이는 글이나 모두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보니 거기에 자기 투사를 많이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삶의 경험들을 이미 다 겪고서 들려주는 이야기인 내 책에 젊은 독자들이 좋은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 또한 내 그림의 구매자 입장에서는, 산 그림이 책에 실리면 팬서비스가 되는 것이고 그림이 비싸 사지 못한 이에게는 책이 위안이 된다.

-쓰는 글들의 문체가 가벼워 읽기가 좋다. 혹시 글쓰는 공부를 따로 했나?
젊은 시절 연애편지를 주로 썼다(웃음). 일주일에 한번 꼴로 일기를 쓴다. 또한 그림을 구입한 사람에게 보내는 감사의 손편지를 주로 쓴다. 요즘은 다 기계로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손편지가 오히려 가치있다고 생각한다. 옛날엔 그림이 문학적이 될까봐 글 쓰는 것을 경계했는데, 글을 쓰며 그림을 그리면 그림이 심도있어지더라. 요즘은 글 쓰는 것을 즐긴다.

-그림이 굉장히 여성적이고 한편의 연애편지를 읽는 느낌이다.
그림 하나에 이야기 하나를 담아보고 싶었다. 예를 들어, 「오늘도」는 커튼을 젖히고 문 앞에 놓인 카라를 보는 여자가 그려진 작품이다. 작품 속의 그녀는 카라꽃을 좋아한다. 그녀가 카라를 좋아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돌아가신 어머니와 첫사랑 뿐이다. 카라는 일주일 째 문 앞에 놓인다.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커튼을 젖혀본다. 이러한 스토리가 그림에 놓인다. 연애편지를 읽는 느낌은 여기서 온다.

-책에서는 일관되게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경상도 사람이던 아버지는 종종 술을 마시고 들어와 폭력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러한 것들이 나에게 반면교사로 작용해 지금 우리나라 여성을 이야기하게 됐다. 그런데 여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것이 여성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그림은 여성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 더 넓은 범위인 우리의 가족을 말하고 있더라.

-혹 다른 여성을 염두에 두고 쓴 글들도 있는가?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사랑에 있어서도 나는 내 이름처럼 ‘수동’ 적이었기 때문에 옛날에 했던 첫사랑이나, 짝사랑이 마음에 오래 남아 그것이 주제이자 컨셉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림을 그릴 수록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의 뒷모습들이 점점 부인을 닮아간다. 부인에 대한 사랑이 나타나지 않았나 싶다.

   

 

-드라마 「가을동화」 삽화를 그리셨다는데.
내 그림이 드라마 가을동화의 주인공 윤준서(송승헌)이 그린 그림으로 나왔다. 원래 가을동화의 주인공의 직업은 의사였는데, 당시는 의약분업 등의 여러 의료대란으로 인해 의사의 이미지가 급락한 시기였다. 그래서 급히 수정한 주인공의 직업은 화가였고, 그 화가의 그림으로 내 작품들이 채택이 된 것이다.  내 작품의 정서가 드라마 작가가 추구하는 색채와 닮아있어서 채택된 듯 하다. 가을동화는 물론 그 이후로 계속 방영된 「겨울연가」「봄의 왈츠」「여름의 향기」드라마 시리즈의 타이틀 글씨를 내가 썼다.

-대구에서 활동하다 서울에 올라오셨다.
여러 집안 사정도 있었고, 생활 패턴에 변화를 주고 싶어서 혼자 올라왔다. 거의 대구에서의 방출이었다. 서울로 올라온 뒤엔 한 2년 동안, 나가면 다 돈이라는 생각이 들어 조그마한 집에서 그림만 그렸다. 그러나 서울에 올라오기로 결심했던 것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었고, 삶의 터닝 포인트였다.

-특별히 작품의 변화가 있거나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올라올 적엔 예술적이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지녔다. 그러나 지금은 행복하게, 즐기면서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독사가 이슬을 먹으면 독이 되듯,  본인이 예술가면 작품도 예술이 나온다 생각한다. 모두가 내 그림을 보는 것이 행복한 일이었으면 좋겠다.

-산토리니를 매우 좋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최근까지의 모든 내 생활은 가난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해외는 하나의 꿈과도 같았다. 그런데 2010년에 산토리니갤러리에서, 화가들에게 그리스 여행을 시켜주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참가하게 됐다. 그때의 내게 산토리니는 피안의 세계와도 같아서 고된 비행시간도 마치 어린 시절 소풍가기 전날 밤과 같은 설레임으로 느껴졌다. 그 뒤로 거쳐간 파르테논 신전이나, 신타그마 광장도 그저 산토리니에 도착하기 위해 거치는 간이역과 같았다. 그렇게 도착한 산토리니는 백색과 청색의 색채대비가 극명해 너무도 아름다웠다. 저절로 사랑이 생길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에 책「오늘도 수고했어요」에 산토리니를 ‘연서’ ‘첫사랑’ 등의 작품으로 소개하고 있다.

   

 

-책에서도 작품을 사랑해주는 주변 분들에 대한 감사가 크다.
작품 구매자들에게 항상 손편지를 쓰는 편이다. 그러한 감사인사를 하는 이유로 미술시장 침체기에도 작품 판매량은 항상성을 보였다. 제 그림을 열점 이상 지닌 이들은 셀 수도 없다. 1년에 그림 하나만 사도 20년이면 스무점을 소유하게 되지 않는가? 그렇게 내 그림을 사랑해주시는 분들과 함께 성장하고 있다. 화가에겐 그림값이 직급과도 같다. 예전에 그림을 사던 이들이 지금 비싸서 그림을 못사게 된다면, 함께 성장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항상 내 주변인들과 작품 감상자들에게 신경을 쓰고, 항상 감사하다.

-작품에 영향을 끼친 사람은?
초등학생 때 살던 동네는 매우 가난했고, 우리 집도 예외 없이 못사는 집이었다. 당시 동네에서의 내 인상은 공부 잘하고, 그림 잘 그리고, 인사 잘하고, 떨어진 옷 입는 가난한 집 아이었다. 그래서 퍽 소심했던 것 같다. 그때 하늘로 모시던 선생님이 한분 계셨다. 최용린 선생님이셨는데, 그 분이 나를 가만히 보더니, 참 똘똘하다고 느끼셨는지 많이 밀어줬다. 소심하던 내게 자신감도 불어넣어주시고, 이런저런 미술대회도 많이 참가하게 해주셨다. 그때 미술대회는 참가하는 족족 상을 받아 돌아오곤 했다. 그때 그렇게 밀어주던 기억이 참 감사해서 어느 정도 성공한 이후에 찾아가봤더니, 촌로가 되어 있어 마음이 아팠다. 지금의 내가 있음에 그 선생님이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앞으로 전시계획은?
내년 4월에 전시를 하게 될 것 같다.
1년에 전시를 한번씩 하고 하는 것을 10년 동안 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전시하는 것이 더 많은 스트레스를 준다. 메이져 전속 화가이면 그림만 계속 그리면 되는데, 나는 갤러리와 정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계속 전시에 신경을 써야 한다. 항상 약자의 편에 서려는 것이 몸에 배다보니 어려운 화랑에 그림을 전시하게 됐다. 근황에 대해 궁금할 틈도 없이 나오는 예술가는 별로 보기 안좋기 때문에, 그러한 모습을 경계하고 있다. 그것이 잦은 전시를 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