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이인성 상 시상식 개최에 즈음하여
[특별기고]이인성 상 시상식 개최에 즈음하여
  • 박래경 이인성아트센터 회장
  • 승인 2013.10.26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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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을 다시 생각한다

▲필자 박래경 이인성아트센터 회장
금년 대구광역시 주최 이인성 상 시상식은 11월6일(수) 오후 5시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개최된다.

과거와 달리 금년의 시상식은 좀 더 큰 의미를 두어야 되지 않나 생각된다. 이유는 작년 (2012), 탄생 100주년을 맞아,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3 개월간 “ 이인성탄생100주년 ” 기념전이 개최된 바 있고 연이어 대구미술관에서 역시 3 개월간 같은 제목의 순회전 형식으로 작품이 공개된바 있었다.

그래서 그 전시기간들은 확실히 우리나라 “근대 화단의 선구자”, “귀제”, “천재”로 추앙받던 화가 이인성의 예술세계를 친밀감 있게 마주 할 수 있었던 결코 흔치 않았던 체험의 시간들이었고 결과는 작가 이인성과 그의 예술 재발견의 둘도 없는 기회제공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기리는 상의 의미를 새롭게 가다듬어볼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나라 근대미술을 다시 생각게 하고 그 중에서 화가 이인성이 차지하는 예술가로서의 위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 계기를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서는 보다 넓은 시야와 깊이 있는 연구로 다양한 접근방식을 통해 그의 예술의 깊은 의미와 가치를 탐구해내는 계속적인 노력이 유지되어야 하겠고 그 어떤 당위성을 가진 문제의식이나 문제제기로써 생산적인 탐구가 이어져 가야하겠다.

왜냐하면 계속되는 선행연구에도 불구하고 이인성 작품에는 풀리지 않는 많은 문제가 남겨져있고 작품을 보면 볼수록 새로운 측면이 자꾸 들어난다는 사실이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의 솔직한 생각이기도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작품 분석연구와 해석에서 시작하여 작가연구, 나아가 활동한 시대연구가 개별연구, 통합연구를 통해 입체적으로 조명되어야 하겠고 세세한 자료부터 작품 전반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탐구가 병행되어야 하겠다.

그러나 우리나라 근대미술연구가 특히 어려운 이유는 작가 개인의 타고난 재능이나 소질뿐만 아니라, 그들이 나서 활동하게되는 시대성 자체가 이질적인 요인들의 복합체가 되어있다는 사실이 크게 차지한다. 이인성도 다른 화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붓 글씨 쓰는 집안에서 컸다, 그리고 “환쟁이”는 안된다는 말로 ‘그림그린다’는 작태 자체를 용납 하지 못하는 우리네의 엄한 부친 밑에서 자랐다. 어린나이에 상을 받고서도 혼자 좋아할 수 밖에 없었다는 심정을 글로 남기면서도 그림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계속 파고 들었던 경우에 해당한다.

▲이인성 作, 어느 가을날

그런 그림 자체에 대한 태도는 나중에 성인 화가가 되어 회화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 문제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한때 독학으로 공부한 서양그림을 통해, 특히 밀레나 도미에와 같은 훌륭한 화가들을 따를 수 있었던 고흐를 부러워 하며 자신에게는 그런 선배화가들이 부제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던 대목을 글로 남기고 있기도 하다.

그가 자신의 그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화가나 특히 외국화가들의 작품을 계속 탐색 실험하는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은 결국 그들 화가들의 회화 문제가 자신의 회화실험과 연구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이 같은 사실들은 그 어떤 기존의 패턴을 가지고 단정적으로 펑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가 주로 살고 화가로 활동 하였던 시기는 잘 알려져있다시피 일제강점기였고 그림재주가 있다는 것을 일찍 사람들이 말해주어서 알았으나 형편이나 여건이 여의치 못하여 그림 그릴수 있는 기회나 여건만 된다면 그는 부지런히 그것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출품할 수 있는 자격이 인정된 관전에서 주로 성공을 거두게 되고 해방후에는 국전심사위원으로 국전에도 참여하게 된다.

그런데 이인성이 작품활동을 활발히 하던 시기와 다르게 그가 타계하던 시기는 우리나라 미술역사상 평가하기 매우 어려운 시기에 해당 한다. 예술가로서의 그의 전체상을 파악할 때 특히 그 문제가 걸린다.

우리나라 현대미술은 1950년의 전후시대부터 출발을 잡으려하는 경우가 미술사가나 평론가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따라서 이인성의 경우는 숫자상으로 보면 현대작가에는 이미 해당 안 된다는 측면이 있다. 말하자면 1912년 대구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일찍부터 그림재주를 보였던 이인성이 약 20년간 작가활동을 하다가 38세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1950년 초겨울에 돌연 세상을 홀연히 떠난 것이다.

이인성의 예술가로서의 존재감의 상실과 함께 그가 남긴 많은 작품들을 도대체 제대로 만날 수 없다는 아쉬움이 또한 늘 계속된다. 그 아쉬움 뒤에는 특히 그가 활동하던 시기가 일제강점기라고하는 아주 어려운 시기가 중심이 된 아주복잡한 시대상을 띄고 있었다는 점, 그 가운데서도 서양화 그림을 보고 배울 선배격의 예술가의 부재가 마음에 걸리는 한편, 일찍부터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여인상을 그리는 시도가 자주 있었는데 해방후 40년대 후반에는 그같은 방향으로 가는 대작들이 보이고 있었으나 곧 이어 6.25라는 동족살상의 엄청난 전쟁으로 바뀌는 그 시간대에 근대는 끝났다.

그러나 현대는 아직 오지 않았던 예술가의 시대배경과 함께 이것을 풀어나가야 하는 미래의 시간을 그는 더 이상 가질 수 없었다는 사실을, 다른 작가들과 비교하면 드러나게 되어있다.

그런데 이 화가를 오늘에 이어준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주게 된 일은 아무래도 2000년 11월에 3 개월간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작고작가 50주기 회고전” 개최와 ‘ 2003년 이달의 문화인물’로 그를 문화광광부가 선정 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역사상 위대한 문화적 업적을 남긴 인물을 선정하여 그분들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 국민들로 하여금 문화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한 이 일의 연속 선상에서 아차산 능선에 그의 유택이 마련되고 곧 이어 유족이 출발시킨 기념사업회가 자료조사 정리와 작품 확인, 전시 등 관계 업무를 맡아 오고, 최근에는, 사단법인체 <이인성 아트센터> 출범까지 시키기에 이르렀다.

근대 우리나라 예술가들이 나름대로의 시대적 고난과 현실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투철한 예술가로서의 긍지와 의지를 잃지 않고 버티어 온 가운데에 특히 화가 이인성의 경우에서는 누구보다 강한 예술가로서의 작가의식의 소유자라는 점을 발견 할 수 있다. 특히 예리한 지성과 탁월한 감성을 겸비한 작가라고 할까. 자기 스타일을 성급하게 찾아나서는 일보다, 혹은 도입기 서양화의 추종에 여념이 없는 일보다, 짧은 시간 내에 내용과 표현에 자기나름의 예술성을 찾기 위한 탐색과 실험에 몰입했었다고, 하는 것이 옳은 말이 되겠다.

이같은 행동태는 자칫 표피적으로 평가되기 쉽지만, 사실은 서양미술 도입초기에 “ ‘회화란 무엇인가, 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험을 계속했던 작가” 라고 보는 일에 동감 할만하다고 말 할 수 있다. 이인성 주요작품을 가장 오래동안 가장 철저히 많이 보아오고 만져 본 복원 전문가 김주삼씨의 말에 그점이 지적되고 있다(대구매일신문,2012년 11월 2일자) 그는 이인성을 두고 근대 최고의 화가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인성은 연구가치가 아주 많은데 그동안 저평가 되어온 화가”라고도 했다.

남은 문제는 가급적 선입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서 보다 넓고 깊이 파고드는 다양한 관점에서 새롭게 이인성 작품에 다가가는 일이며, 그 작품을 제작한 작가와 그가 살던 복잡하기 그지없는 시대를 지금까지의 선행연구에 이어 전문가 못지않게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연구자들의 연구가 이어지는 일이 바람직한 것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이인성과 같은 예술가가 있고 그의 예술세계가 그가 살던 시대를 훌쩍 넘어 오늘의 우리들, 나아가 미래의 후세대에게 하나의 귀감이 되는 예술가로 길이 길이 살아남는 즐거움이 또 다른 예술세계를 창의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후세대에 이어지게 하는 일일 것이다.

*한국큐레이터협회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