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이 남긴 빛 과 그림자
거장이 남긴 빛 과 그림자
  • 김갑의 한국영상자료원 이사
  • 승인 2009.07.09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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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 명장, 거장이 하루아침에 태어났는가?

3년여의 투병생활을 하시던 유현목 감독이 지난 6월28일 운명하셨다.

향년 85세. 참으로 공교롭게도 그 날은 부인 박근자 여사님의 생일이었고 범영화인장으로 5일장을 마친 지상에서의 마지막 발인일은 유감독의 85세 생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장례식장에서는 코리안 심포니의 트럼본 주자인 박현욱 교수의 독주로 " Happy birthday " 가 연주되었다.

▲ 김갑의 충무로영화의 거리 추진위원장/한국영상자료원 이사
나는 난생처음으로 장례식장에서 생일축가를 들었고 마치 삶과 죽음이 별 것 아닌 한 가지라는 기묘한 철학적 반추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유현목 감독은 1856년 31세의 나이에 “교차로” 영화감독이 된 이래 1986년 ‘젊은날의 초상’까지 30여년에 걸쳐 43편의 작품을 우리들에게 남기면서 아무도 부인할수 없는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물론 그로부터 10년뒤인 1995년 “말미잘” 이라는 제명의 영화를 감독 했지만 그것은 거장의 반열에서 하루아침에 영화현장으로부터 도태되어 10년간 메가폰을 잡을수 없었던 스승 유현목 교수를 위하여 제자들이 은퇴작품이라는 미명을 달아 기획·제작한 영화였다.

‘거장 유현목’은 그냥 얻어진 이름이나 명성이 아니였다. 줄기찬 영화열정으로 명품을 만들기 위해 끈질긴 영화연구와 노력을 게울리 하지 않았다.

모교인 동국대 시절에 동국대 영화예술연구회를 창설하여 그 리더가 되었었고 본격 극영화 감독이 된 뒤에도 “씨네포럼 클럽”, “한국 소형 영화동우회” 등을 결성하여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한 초석 다지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내가 유현목 감독의 조수로 입문 한 것은 국립영화제작소의 배석인 감독의 조감독을 끝낸 1964년도 였는데 당시 유현목 감독은 애인으로부터 온 편지를 검열하고 공개 하였다하여 부대를 탈영한 한 사건실화영화  ‘푸른 별아래 잠들게 하라’ 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어서 ‘순교자’, ‘춘몽’, ‘태양은 다시 뜬다’ 를 연달아 연출하셨는데 그 무렵 나의 눈에 비친 그분은 영화의 어떤 장르도 통달하는 자유자재적 존재였다.

1990년 한국영화 7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영화 대표작 200선’을 선정 하였는데 유현목 감독의 영화가 최다수인 17편이 선정된 것만 보아도 유현목 감독은 신상옥, 김수용, 김기영 등의 또 다른 거장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영화세계를 완성시킨 영화작가였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영화작가들, 이른바 명장, 거장들은 대한민국의 소중한 자산이며 가치의 하나이다. 이것은 영화뿐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분야에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계승하고 발전시켜야할 덕목이며 목표이다.

전 세계적으로 자국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중요한 수단과 방법의 하나로 문화·예술분야를 특별히 지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 같은 문화 예술적 자산과 가치가 충밀한 나라는 그들의 뒤를 이어갈 제2, 제3의 세대들이 자연스럽게 생성 되는것이다.

거장 유현목 감독의 실제적인 마지막 작품은 1986년도의 ‘젊은날의 초상’ 이였는데 당시 그분의 연세는 60이셨다. 유현목 감독 뿐만이 아니라 신상옥, 김수용, 정창화, 이형표, 심우섭 등 당대의 선두그룹을 형성했던 대표적 감독들의 연세가 60을 갓 넘긴 때였다.

그 분들의 40년여에 걸친 영화작업들이 완성의 열매를 맺을 때였다. 아울러 그 뒤를 이어갈 주목받는 영화작가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정진우, 변장호, 최하원, 김호선, 조문진, 정인엽, 이두용, 이장호, 정지영, 박철수, 배창호, 장길수, 곽지균, 이정국, 박종원 등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의 나이는 만개를 눈앞에 둔 40대~50대였다.

그러나 한국영화계에 내린 어떤 저주였는지, 아니면 예측했으나 준비하고 대비하지 못한 게으름과 방관 때문이었는지 1987년 영화법 개정직후 이들 모두는 누군가가 쏘아댄 기총소사(기관총 세례)에 맞은듯 하루아침에 전멸하는 비극적 상황이 돌발했다.

1987년 이후 지금까지 20여년동안 한국영화의 명장·거장으로 칭송되고 추앙받던 그 누구도 메가폰을 쥐고 영화현장에 선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토록 마지막 영화한편을 갈구했던 유현목 감독의 허허한 10년을 애타게 지켜보던 동국대 영화 연극과 출신 제자들이 힘을 모아 “ 말미잘 ” 의 메가폰을 바쳤을때 뜨겁게 흘리신 눈물은 지난 20년간 알수도 이해 할수도 없었던 이유로 무쪽 짤리듯 영화 현장으로부터 철저하게 도태 되었던 충무로 영화인들 모두의 눈물 이기도하다.

헐리우드 영화가 세계의 영화시장을 풍미하고 있지만 결코 그들의 흉내나 모방따위는 철저하게 거부한채 충무로 영화라는 독특한 브랜드를 만들어 내었던 자랑스런 한국의 영화인들.........

외국영화 수입쿼타를 목표로 한국영화 제작을 한낱 수단으로 삼았던 영화제작자들, 영화법이 바뀌어 수입쿼타제가 없어지자 그 다음날로 충무로를 떠나버린 그 많던 영화제작사 간판들, 그리고 마치 고아처럼 길 바닥에 버려저 갈곳을 몰라 당혹해 하던 충무로 영화인들,  그런 그들을 보수다 우파다 편 가르듯 밀어낸 사람들은 어느나라 영화인들인가.

그들의 눈에는 장인, 명장, 거장 이라는 호칭이나 명예가 헌 신짝처럼 보였는지 한 시대를 풍미한 선배이자 스승이나 다름없는 한 사람의 거장의 죽음에도 진정한 애도나 존경심을 보이는 것 조차 인색했다.

영화는 감성을 파는 예술이다.

그 같은 인성을 가진 사람들이 만드는 영화가 대한민국의 자산과 가치로 자리 매김 할 수 있을까? 고인이 되신 신상옥 감독의 장례식장에서도 느꼈지만 유현목 감독의 장례식장에서 더욱 가슴이 아팠던 것은 한국영화의 미래가 불안한 이유를 그곳에서 발견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