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이미지 시대와 개인적 내러티브
[윤진섭의 비평프리즘]이미지 시대와 개인적 내러티브
  • 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 승인 2014.01.14 18: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필자 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달포 전, 모 잡지사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주제 발표를 하다가 70년대 미술동네 이야기가 나왔다.

장내를 가득 메운 청중은 대략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작가들이었다. 무슨 말 끝엔가 나는 이들에게 “70년대의 미술 그룹 중에서 전위적인 활동을 보인 <S.T>가 있었는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세요.”라고 물었다.

그런데 참으로 믿기 어려운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손을 든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참담한 심정에 빠진 나는 이어서 “그럼 <A.G>는?”하고 물었다. 그러자 겨우 4명만이 손을 드는 것이 아닌가!

청중은 어림잡아 계산해 봐도 100여 명에 육박하는 숫자였다. 어떻게 이런 사태가 벌어질 수 있는가? 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70년대 미술현장을 겪은 내게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작년 9월,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은 [한국미술단체 100년전]이란 타이틀로 약 100년에 이르는 한국의 근현대 미술단체 자료집을 출판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아카이브전을 열었다.

이 때 미술전문가들에게 설문을 돌려 전후 한국 현대미술사에 남을 단체를 추천 받았는데,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가 1위, 문제가 된 ‘S.T(Space & Time)’가 5위를 차지했다.

당시 이 전시가 기사화돼 여러 신문과 잡지의 지면을 장식하고 각종 블로그와 페이스북, 트위터를 통해 퍼져나갔다. 따라서 미술인들이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는 나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세미나 후에 청중이 보인 반응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다. 무엇이 저들을 역사로부터 멀어지게 했는가? 그것도 불과 40여 년 전의 일을. 그 후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원인을 물어보기도 하고 그들과 같은 또래의 작가들과 대화를 나누어 본 뒤 내린 결론은 저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시중에 나도는 현대미술사 관련 책들은 여럿이 있다. 그 중 하나만 사서 읽어봐도 한국 현대미술사에 대한 상식은 어느 정도 갖추게 됐을 터였다.

작년 초, 나는 모 기업이 제정한 작가상의 최종심에 참여한 적이 있다. 3명의 작가를 선정하여 작가 당 3천만의 상금이 수여되는 만큼 치열한 경쟁을 보였다. 그런데 대부분이 2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응모 작가들의 작품 내용이란 것이 소위 ‘개인적인 서사’에 치우쳐 있었다.

‘개인적인 서사(narrative)’란 말 그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 놓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자신만 알 수 있는 상징과 기호로 범벅이 된 화면을 창출하는 것이 유행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작품세계를 관류하는 공통된 미적 특징이 소위 말하는 ‘그로테스크’다. 엽기적인 것, 충동적인 것, 기괴한 것, 기이한 것 등등 복잡한 미감이 언제부턴지 비슷한 유형으로 화면 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역사에 대한 무관심은 개인 스스로를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절연시켜 조그만 독방(cell) 속에 감금시킨다.

그들은 흔히 거대 서사는 자신과 무관하다고 믿는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다원주의적 양상의 범람은 그러한 경향을 부추겼다. 모든 것이 허용되는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가치의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어디 그러한가?

페이스북과 트위터로 대변되는 소셜 네트워킹의 시대에 개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이버 독방(cell)에 갇혀 타인과 단절된 채 살아간다. 소통이 잘 되는 것 같지만 실은 불통이 지배한다. 이것이 ‘소통의 불통’이라고 하는 소셜 네트워킹 시대의 역설이다.

얼마 전 새로 문을 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개관기념전 중 [시대정신전]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만일 이 전시의 기획자가 ‘시대정신’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여 전후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역사적으로 일목요연하게 보여주었다면, 앞으로 적어도 <A.G>와 <S.T>를 모르는 해프닝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 윤 진 섭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대학원 미학과 졸업. 호주 웨스턴 시드니 대학 철학박사. 광주비엔날레 큐레이터, 서울미디어아트비엔날레 총감독,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국립현대미술관 초빙큐레이터(한국의 단색화전),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장 역임, 현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부회장, 호남대 교수, 시드니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로 재직, 저서로 <몸의 언어>,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현대미술의 쟁점과 현장>, <한국의 팝아트> 외 다수의 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