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딱지
[연재]딱지
  • 김준일 작가
  • 승인 2009.07.09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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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리 (2)

미순을 만나기 전까지 정구는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녀석과 맞닥뜨린 것이 탈이었다. 정구는 녀석의 뺨을 딱 두 대 때렸다. 그런데 녀석의 부모와 삼촌까지 학교로 쫓아와 멱살을 잡고 한바탕 난리법석이 벌어졌다. 거기다 전치 2주짜리 진단서를 끊어 가지고 고소까지 해버렸다. 따귀를 맞아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데 그것을 치료하자면 2주가 걸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합의금 5백만 원을 요구했다.

정구는 돈을 주는 대신 사표를 쓰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그때에도 물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학교를 그만두는 바람에 미순을 만났으니 꼭 잘못된 일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정구가 학교를 그만두고 새로 시작한 일은 영어 번역이었다. 미국에서 보따리로 사 들여온 싸구려 음란소설을 하루에 20페이지, 30페이지씩 긁어대는 일이라 사실 번역이랄 것도 없었다. 수입은 선생 월급만 못했지만 일은 수월했다. 또 따귀를 때릴 일도 고소를 당할 일도 없었다.

미순은 정구가 드나들던 출판사에서 경리일을 보며 차도 끓여 내던 노처녀였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초여름이었는데 크리스마스 무렵에는 벌써 동거생활을 시작하고 있었다. 미순은 어려서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이모 집에서 자라 홀가분한 처지였다.

그러나 아무도 상관하는 사람이 없어 그렇게 쉽게 동거생활을 시작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수동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애당초 남자 둘만 사는 집에 드나들면서 청소와 빨래 같은 자질구레한 일에 손을 댄 것부터가 잘못이다. 그것이 설거지와 밥짓기로 발전하다가 결국 미순은 출판사를 그만두고 집안살림을 맡게 되었다.

비록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처지였지만 두 사람은 행복했다. 미순이 들어앉으면서 정구는 번역일을 그만두고 그처럼 경멸해 마지 않던 학원강사 자리를 얻었다. 그리고 1주일에 40시간씩이나 뛰면서 열심히 돈을 벌었다. 2년 동안에 전세금 천만 원쯤 마련 못 하랴 싶었던 게 바로 그 시절이다. 그러나 학원에서 또 사고를 내는 바람에 천만 원은 하루아침에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전생에 담배와 무슨 악연이 있었는지 이번에도 발단은 담배 때문이었다. 입시학원에서는 원칙적으로 담배를 피울 수 없도록 돼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칙일 뿐 화장실이나 복도 구석에는 버젓이 재떨이가 놓여 있기 마련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수강생들이 소나기처럼 내버리는 담배꽁초를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발짝 나가는 게 귀찮아 강의실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녀석이 있었다.

이봐. 대한민국은 담배를 피울 권리도 있지만 담배연기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도 있는 나라야. 다음부터 담배를 피우고 싶거든 밖에 나가서 피우도록 해.

그야말로 점잖은 충고였는데 돌아온 반응은 무지막지했다.

여기는 학교 교실이 아니고 학원 강의실입니다. 강사께서는 시험문제나 풀어주고 강사료나 챙기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정구는 녀석을 안 죽을 만큼 두들겨 패주고 두 달 동안 구치소 신세를 진 다음 집행유예로 풀려 나왔다. 그리고 다시 음란소설을 번역하는 일로 되돌아왔다.

어떻게 하지요?

미순은 같은 소리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3백만 원에 50만 원짜리 집은 있었다. 그러나 수입이 일정치 않은 살림에 그것은 너무 큰 부담이었다.

어떻게 하지요?

하루 종일 변두리 복덕방을 뒤지다 온 미순이 혼잣말처럼 또 중얼거린다. 정구는 미안한 김에 불쑥 말했다.

우리 이번 기회에 아예 미국으로 이민이나 가버릴까?

미순이 눈을 흘겼다.

미국은 뭐 오겠다면 아무나 받아주는 물봉인 줄 알아요?

(다음 호에 계속)

김준일 작가/ TV드라마 '수사반장', '형사' 등, 장편소설 '예언의 날', '무지개는 무지개' 등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