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여전히 현역인 '대한민국 최초 여성이발사'이덕훈 할머니
[탐방]여전히 현역인 '대한민국 최초 여성이발사'이덕훈 할머니
  • 고무정 기자
  • 승인 2014.03.11 01: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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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디없는 손가락엔 그녀가 살아낸 역사가

 

   
▲우리나라 최초 여자 이발사 이덕훈 할머니의 성북동 이발소.
그녀가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껍질 깐 귤을 건네며 말했다.

 “고약한 것 같지만 사실 사람이 좋아.”

 사실 방금까지 할머니에게 한창 혼이 난 상태다. 이발소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안녕하세요, 간단한 인사만 남기고 연신 사진부터 찍어댔기 때문이다. 마침 하루 열 명 남짓밖에 오지 않는다는 손님이 머리를 자르고 있었다.

할머니가 흰 거품을 발라 목 주변을 면도하는 걸 보니 거의 끝나가는 시점이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황급한 마음에 그만 실례를 범한 것이다.

 “잘생긴 남자구나 했더니 건방지구만”

 짐짓 꾸지람을 건네는 그녀의 말엔 사실 장난기도 없지 않았다. 그녀가 말을 잇는다.

 “티비도 열 번 나왔어. 아침마당도. 굿모닝 와이드, 그곳에 가고 싶다 등. 뭐 별 거 다 나왔지.”슬며시 다른 이야기로 전환될 기미가 보이자 슬슬 안심이 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저번 주에는 작가 셋이 와서 무턱대고 사진부터 찍으려 하길래 ‘내가 마을 어귀의 고목나무냐, 길가의 전신주냐’ 하며 돌려보냈지.” 

아직 혼이 덜 난 모양이다. 

   
간판도 없이 50년간 성북동에 자리한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르고 있는 이덕훈 할머니.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이발사다. 

우물거리며 귤을 먹고 있는 기자에게 할머니는 사진첩을 꺼내 보여준다.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으며 보이는 빛 바랜 세피아빛 사진들은 그녀가 지나온 세월이다.

이때부터 이발을 시작했다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60년 전 사진 속의 소녀의 미소엔 싱그러운 장난기가 가득하다. 그녀는 어떻게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이발사가 된 것일까?

“가난이 싫어서 아버지 도와 일 시작했지. 아버지가 이발사였거든. 처음 가위 잡고 아버지 도울 땐 다들 ‘저기 봐, 남자 이발소에 여자가 있네’ 하고 수군거렸지.”

 일제 강점기 말기, 그녀의 아버지는 생체실험으로 유명한 731 부대에 이발부로 들어갔다. 자연히 그녀의 가족도 아버지를 따라 북만주로 이주했다. 그러나 궁핍은 그녀의 가족과 떨어질 줄을 몰랐고, 소녀는 생각했다.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7살의 자그마한 소녀였지만 맏이라는 이유로 어머니를 도와 일찌감치 가사를 돕고 있던 그녀는 어느샌가부터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를 도와야겠구나- 하고.

   
(가운데) 58년에 취득하고 62년에 갱신한 이발 면허.

“무슨 일이 그렇게 재밌었을까? 가사일도 그렇고 모두 그렇게 재밌었어. 열심히 일을 해서 손에 마디가 안 생겼잖아. 일하다 놀면 마디가 생기는데 계속 일하니깐 마디가 안생겼잖아.”

 머리카락을 탁탁 털어내고 펼쳐 보이는 그녀의 손가락엔 마디가 진짜 하나도 없다. 찰칵, 손 사진을 몇 장 찍고 나자 그녀는 마치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38선이 막힌다는 소문을 듣고선 해방되자마자 부리나케 돌아온 서울에서 그녀는 무학국민학교를 졸업했다. 한차례 전쟁의 광풍이 서울을 휩쓸고 지났다. 가족들과 함께 피난을 내려갔다가 돌아온 그녀의 아버지는 을지로 입구의 보건사회부로 발령받았다. 아버지를 따라 그곳 이발소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그녀는 어깨너머로 이발 기술을 하나 둘 배워나간다.

54년, 열아홉의 나이로 시작한 가위질은 58년 10월에 이발사 자격증 시험에 합격하며 천직이 됐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이발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명랑이발관'에서 출발해 현재는 '새이발소'로 바뀐 우리나라 최초 여자이발사  이덕훈 할머니의 이발소 탄생 배경이다.

   
이덕훈 이발사가 20년이 넘은 물뿌리개로 고객이 머리 감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

 그녀가 하도 일을 잘하니 그녀의 아버지는 시집을 안 보내려고 그랬더란다. 그래서 그녀는 뒤늦게, 스물여덟이 돼서야 결혼을 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 여자 나이 스물여덟이면 한창이지만 당시로서 생각하면 퍽 늦은 나이다. 신혼을 맞이한 그녀는 잠시 봄날 같은 시간을 꿈꿨을까, 사진첩 속 결혼식 사진에 미소가 환한 젊은 그녀는 생전 고생이라고는 한번 안 해본 사람마냥 맑은 모습이다. 그러나 뒤이어진 그녀의 이야기는 젊은 시절의 말도 못할 고생의 역사였다.

 “48년 전에 저기 저 성북동 쓰레기장 있던 곳에서 움막 짓고 살았거든. 시집가서 6개월에 한 번씩 이사를 열두 번을 했어. 내가 너무 혼자서 애쓰고 사니깐, 모르는 사람들은 아예 그냥 살지 말라고 그랬어.”

 하루 네다섯 시간 자고 스무 시간 일을 했다고 했다. 일하느라 바빠 하루 한 끼만 먹고 살아온 습관이 굳어져 지금도 엄청 소식한다고 했다. 네 명의 아들과 남편 하나를 뒷바라지 하느라, 남의 집에서 열두 시간 일해 받은 일당 오백 원으로 봉지쌀을 사서 식구들의 밥을 짓기도 했더란다. 그 말도 못할 고생에 고민할 시간도 없이 바빴다.

“하도 바빠서 못 늙었잖아.”

   
▲이덕훈 할머니의 '새 이용원' 출입구, 가게 앞에는 주민들이 쉬었다 갈 수 있도록 내어논 의자가 할머니의 따뜻한 이웃사랑을 느끼게 한다.
화장도 하나 안했다는데, 씩 웃으며 건네는 농담과 함께 안경을 벗고 보여주는 그녀의 뺨은 정말로 곱다. 정말, 오는 세월 만나줄 시간도 없이 바빴던 모양이다.그렇게 바쁘게, 부리나케 일을 하고 가위질을 하는 동안 재미있는 일화도 많이 생겼다.

 

단골 손님으로 온갖 정,재계 인사와 고관대작들이 줄을 이어 찾았던 것이 그렇다. 그녀에게 머리를 맡기곤 하던 인사들 중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있었다.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 머리를 자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잘 역정을 내며 '이여사가 하도록 해' 라던, 40년 전 카랑카랑한 정주영 회장의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는 그녀는 정회장과의 인연을 생생하게 풀어냈다. 이 뿐만이 아니다. '국민의 사카린' 으로 유명한 김두한 의원이 이발소 의자가 가득 차고도 남을 만치 거구였다는 일화는 그 시절 종로 일대에서 주먹을 날리던 그를 떠오르게 할 만큼 실감났다.

 그녀의 이발소는 옛날 동네 복덕방 같은 곳이다. 심심한 동네 주민들도 놀러 왔다 가고, 걷기 힘든 동네 노인들 앉아서 쉬었다 갈 의자가 문 밖에 놓여 있다. 걷다 지친 노인들이 그 의자에 앉으면 사탕도 한 움큼씩 쥐어드린다. 마을 주민으로서 마을과 더불어 사는 삶을 지향하는 그녀는 어느새 성북구에서 60년째 머리를 만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몇 십년씩 이발소를 찾던 단골 손님들은 어느새 다 돌아가시고, 지금 이발소를 찾는 건 그들의 손을 잡고 왔던 자식세대다. 첫 단골 손님들의 자식세대여도 나잇대가 50에서 70이라니, 그녀가 성북에서 머리칼을 잘라 나간 시간이 새삼 감탄스럽다

 “난 일이 꼭 애인 같아. 스티븐 잡스처럼 살려고. 한정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남을 위해서, 내 삶에 대해 후회 없이 살 거야. 내가 좋아하는 일에 미쳐서. 비록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겁내지 않고.”

   
아버지가 쓰던 것을 물려받은 100년된 바리깡. 이것으로 옛날 고등학생들의 머리를 밀었으리라.

 취재라기 보단 오랜만에 만난 손자와 할머니가 나누는 사담같았다. 질문하는 내내 끊임없이 할머니가 주는 먹을거리를 받아먹느라 잔뜩 배가 불렀다. 입대가 머지 않았으니 시원하게 머리를 밀어달라는 기자의 말에 그녀가 말한다.

 “그럼, 한창 때는 바리깡으로 한 시간 동안 고등학생 열 명 머리도 밀었어.”

 웃는 모습에 가득한 장난기는 영락없는 소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