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의 위상과 존재의 이유
[윤진섭의 비평프리즘]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의 위상과 존재의 이유
  • 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 승인 2014.05.08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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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Y 국장님께.
수백 명의 어린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 때문에 그렇잖아도 분주한 업무가 더욱 가중되었으리라 믿습니다. 푸른집 구중궁궐 심처에서 세상 돌아가는 일을 살핀다는 게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어려울 터이지만,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이 사안만큼은 꼭 귀 기울여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이 칼럼을 통해 언급한 바 있듯이,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의 존폐 문제가 바로 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제 다섯 달 후면 현재 홍대 앞에 있는 이 박물관은 새로운 주인에게 자리를 내주고 특단의 조치가 없는 한 하릴없이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습니다.

한국 미술정보 분야의 원조격인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의 존재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독자적인 위상을 갖추고 미술문화의 발전에 기여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수많은 보도를 통해 현재 국민적 인지도 또한 매우 높다고 판단됩니다. 비단 미술인들뿐만 아니라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대중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이 오는 구월 말로 정부로부터 받은 건물 임대료 지원이 끊겨 거리로 나앉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다시 펜을 들었습니다.

Y 국장님.
김달진자료박물관은 김달진 소장이 10대 후반의 어린 나이일 적에 청운의 뜻을 품고 미술자료를 모으기 시작한 이래 무려 40여 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이룬 꿈의 금자탑입니다. 그것은 개인의 자산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아니 좀 더 거시적으로 보자면 국가적 자산임에 분명합니다.

김소장은 까까머리 고등학생이던 70년대 초반부터 국가에서 관심조차 두지 않던 미술자료에 지대한 애정을 갖고 이를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는 ‘아카이브(archive)’란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만일 그가 없었으면 귀중한 미술자료들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미술인의 한 사람으로서 모골이 송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화계의 예를 들면, 제작된 지 50년 밖에 되지 않은 이만희 감독의 ‘만추(晩秋)’ 필름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니 아카이브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김달진 소장은 평생 검정색 가방 하나 어깨에 둘러메고 자칫하면 사라질 뻔한 귀중한 미술자료를 구해 낸 사람입니다. 저의 기억으로도 60년대의 상황은 15밀리 영화 필름을 맥고모자의 장식용 테두리로 사용할 정도로 무지하고 척박했습니다. 그때 누가 선구자적 혜안을 가지고 영화 필름을 수집했다면 ‘만추’가 사라지는 안타까운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미술 아키비스트로서 김달진이란 존재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Y 국장님.
저는 결코 김달진 개인의 영달이나 명예를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보다는 오히려 한 송이의 꽃을 가꾸듯 정성을 들여 꾸려온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의 존립 여부에 관심이 있습니다.

박물관에 대한 지원금의 반환이 규정에 따른 것이라 하지만, 원칙이나 규제보다는 그러한 것들을 넘어 박물관을 유지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에 관한 것입니다. 목적이 분명하면 그런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길이 어딘 가에는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사태에서 보듯이 우리의 관료 시스템에 경고등이 켜진 것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개인의 정성이 모여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내듯이 한 개인의 존재는 수천 명의 게으른 관료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실로 ‘만추’의 예가 그렇습니다. 당시 수 백명의 문화예술 관련 공무원이 있었을 터인데, 그 누구 한 사람 그것에 관심을 둔 사람은 없었습니다. 미술이 그렇지 않다고 그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바쁘신 일정에도 불구하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쁜 소식을 기대하며 건투를 빕니다.


* 윤 진 섭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대학원 미학과 졸업. 호주 웨스턴 시드니 대학 철학박사. 광주비엔날레 큐레이터, 서울미디어아트비엔날레 총감독,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국립현대미술관 초빙큐레이터(한국의 단색화전),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장 역임, 현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부회장, 호남대 교수, 시드니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로 재직, 저서로 <몸의 언어>,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현대미술의 쟁점과 현장>, <한국의 팝아트> 외 다수의 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