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이행로 동숭갤러리 대표] 미술시장 불황 타개 방안 ‘미술은행’ 개인, 기업 등 고객층 두터워
[인터뷰 - 이행로 동숭갤러리 대표] 미술시장 불황 타개 방안 ‘미술은행’ 개인, 기업 등 고객층 두터워
  • 인터뷰 이은영 기자/글 윤다함 기자
  • 승인 2014.06.20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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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 작품수 2만점 보유… “벽에 그림 걸면 미술시장 살아나”

미술전문가가 아닌 이상 일반인들이 그림을 구입하기란 선뜻 쉬운 일이 아니다. 수백만 원에서 수억 원을 호가하는 그림에 경제적인 사정을 생각 안 할 수가 없고, 설령 능력이 돼 구입한다고 해도 과연 나중에도 이 작품이 그만한 가치를 할지, 혹은 후회는 안 할지 여러 고민이 들기 마련일 것이다.

이러한 대중의 속내를 일찍이 간파한 이행로 동숭갤러리 대표는 국내 최초로 85년부터 미술은행을 운영해오며 개인은 물론 구청, 국회 등 국가 공공기관부터 대학병원, 호텔, 대기업, 외국계 회사, 로펌 등 폭넓은 고객층을 확보하고 있다. 미술시장의 암흑기라는 요즘에도 1년 회전율이 8천점에 이른다. 소장품은 2만여 점으로 국내 최다 보유라고 할 수 있다.

미술대여업을 첫 시작했을 당시 미술시장의 성업으로 수요가 엄청났다고 한다. 때마침 강남 신축 아파트가 떠오르고, 반상회가 성행하며 집에 그림을 걸어놓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특히 그림을 굳이 소유할 필요가 없고 실내 분위기 조성을 위해 주기적으로 그림을 교체하기만 하면 되는 국가기관, 대기업, 병원 등에서의 이용률도 높았다. 미술은행을 이용하면 세금이 감면된다는 점에서 요즘에도 기업에서는 주저 없이 미술은행을 이용하고 있다고. 작품 대여비 전액은 경비 처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때에 비해 오늘날 미술시장 분위기는 고사枯死 상태라고 이 대표는 말했다. 그만큼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 허나 이럴 때일수록 미술은행이 더더욱 필요하다고 이 대표는 강조한다. “지금이 바로 적기에요. 미술시장 불황으로 화랑의 역할이 점점 축소되고, 문 닫는 이들도 많고, 전시도 예전에 비해 1/10도 안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 작가들도 어렵고, 화방도 어렵고, 액자집까지도 어려워지는 거죠. 이때 미술은행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벽에 그림이 걸리게 해야 합니다. 사서 거는 것이면 좋겠지만 현재 상태로는 일단 미술은행을 통해 그림 걸리는 벽을 늘려가는 게 우선이죠. 한 번 그림이 걸린 자리에는 계속 그림이 걸리게 되거든요. 그렇게 미술문화 저변확대가 이뤄지게 되는 거예요.” 그림은 걸어놓고 봐야 계속 보게 되고, 안목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그림을 계속 보다 보면 지겨워지는 경우도 있을 텐데 미술은행을 통해 3개월 단위로 작품을 대여하다보면 그런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임대료는 작품가를 기준으로 월 △1백만원이하 3% △1백만원에서 1천만원이 2% △1천만원이상이 1.5%이다. 또한 공공성을 갖고 있는 병원, 혁신도시 등에서 대여할 경우 일반 제공값에 50% 할인된다. 작품을 임대했다 구입할 경우 작품가격 인하의 혜택도 있는데, 3개월 이상은 10%, 6개월 이상은 12%, 12개월 이상은 15%선까지 작품가를 내려준다. 작품가는 미술협회에서 제공한다. 대여 작품은 미술은행에서 직접 설치해준다.

회복될 줄 모르는 미술시장의 긴 불황이 이제는 그 골이 너무 깊어 더 이상 방치했다가는 사단이 벌어질 것 같다고 이 대표는 말했다. 대중들이 보다 더 적극적으로 미술에 관심을 갖고 행동해야하며, 정부 차원에서의 정책적인 지원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 방안으로서의 미술은행에 대해 이 대표에게 자세히 들어볼 수 있었다.

-오랜 시간 화랑과 미술은행을 운영한 만큼 소장품 수가 많을 것 같다.
“대여나간 것까지 합쳐서 현재 2만 점이 넘는다. 이는 크게 회화와 조각으로 분류되고 이 중, 조각은 15%정도. 처음에는 기탁 받으면서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작가분들 어려운 거 뻔히 알면서 계속 그럴 순 없어서 곧 작품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여기까지 온 거다.(웃음) 소장작품 중 해외작품도 있긴 하지만, 국내 작가의 것이 월등히 많다. 해외작품은 5%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작품도 위작 논란이 끊이질 않고 판명도 못하는 상황인데,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구매과정도 까다로운 해외작품을 함부로 사기가 힘든 이유가 크다. 우리나라 것도 판명 못하는 상황에 말이다.”

-가장 최근에 작품을 대여해준 곳은 어디인가?
“얼마 전, 서울대병원에 회화랑 조각이 총 228점 들어갔는데, 몇 점 더 들어갈 예정이다. 작품 크기는 10호 같은 작은 그림부터 500호에 이르는 대작도 있다.”

-개인마다 기업마다 기호와 취향이 다를 텐데, 대체적으로 어떤 작품들을 선호하는가?
“대여 작품은 밝고 화사해야 잘 나간다. 대체적으로 어둡고 어려운 작품들은 아무래도 그에 비해 수요가 적을 수밖에 없다. 특히 병원 같은 경우는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그림들에 관심이 많다. 중견작가들의 사실회화, 구상회화 등을 선호하고, 기업 오너 취향 따라가는 경우도 있다.”

-작품이동이 잦고, 작품을 대여해주는 것이다 보니 아무래도 파손이나 분실이 우려되는데.
“보험은 다 들어있다. 보험료는 사용자가 부담하게끔 돼 있다. 30년 가까이 미술은행 운영하고 있지만 작품도난이나 유실, 파손은 생각보다 미미하다. 예전에 모델하우스에 작은 그림을 하나 대여한 적이 있었는데 도난당한 적 빼고는 딱히 생각하는 경우가 없다. 매달 사용료를 내며 그림을 걸 정도의 여유와 수준을 지닌 분들이 고객이기에 걱정할 일이 별로 없다. IMF 당시에는 한 기업에서 급히 전화가 와서 아무래도 자기네 회사에 압류가 들어올 것 같으니 대여한 작품을 모두 가져가라고 한 적도 있다. 물론 작품 소유권은 당연히 우리 것이지만 그래도 복잡한 상황을 피하게끔 해주고자 그런 거다.”

-일각에서는 화랑들이 미술은행 때문에 작품 판매가 더 어렵다고들 한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렇다면 미술은행이 잠잠할 때 잘 했어야 하는 것 아니겠나? 미술은행은 오늘날 침체된 미술시장을 다시 활성화시키고 일으킬 수 있는 방책이다. 화랑 40~50년간 오래 운영하신 분들은 소장 작품 수도 많고, 또 엄청난 작품들을 갖고 계시다. 하지만 요즘에는 작품 구매하겠다는 사람들도 없고, 또 화랑을 찾는 사람들도 거의 없고… 그렇다고 그런 대작들이나 귀한 작품들을 아트페어에 무작정 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수요가 없어 그저 창고에 보관 중인 이런 작품들을 지닌 화랑들끼리 연대해 미술은행을 함께 운영하면 어떨까 싶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미술은행의 활성화가 곧 미술업 전체의 활성화로 이어진다.”

-IMF로 인해 국내 미술시장 및 미술품대여업에도 어려움이 왔을 적에 국내 유명 중견조각작가들의 작품을 최고 80%까지 할인하는 과감한 경매를 올려 눈길을 끌었다. 당시 자세한 얘기를 해 달라.
“IMF가 터지기 직전, 기업들이 어려워지고 하면서 몇 천점의 작품들이 되돌아오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림이야 어떻게든 보관한다고 하지만 조각이 800점 정도가 돌아오면서 모두 밖에서 비를 맞히게 생겼더라. 그래서 조각경매를 하게 된 거다. 200점을 내놨는데 196점 모두 높은 가격에 낙찰됐다. 심지어 원래 작품가보다 더 높이 올라간 경우도 있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관심을 가져주면서 경매장의 열기가 엄청났는데, 그 분위기에 가격을 망각하고 참가하신 분들이 피켓을 들어댔다. 또 생각보다 참가자들이 너무 많아서 피켓이 부족해 즉석에서 매직펜으로 봉투에 숫자를 써서 나눠주기도 했었다. 100장이면 충분할 줄로 알았던 피켓은 우리가 결국 156번까지 손으로 써서 나눠주게 된 거다. 또 작품이 200점이다 되다보니 한 작품당 1분 정도 주어진다 해도 3시간이 넘게 걸리지 않나. 시간이 길어지면 분위기도 흐트러지고 힘들어지니 신속하게 진행해야 한다. 그런데 예를 들어 작품번호 10번 작품을 구매한 사람이 11번에도 참여해야 하는데, 그 안에 구매했다는 확인 사인을 받아야하니 긴박하게 움직였던 기억도 지금 생각하면 재밌다.(웃음) 조각경매에 이어서 바로 회회경매도 개최했는데 220점 중 180점이 나갔고, 이후 다른 화랑들도 함께 참여해 세 번째 경매를 열었다. 그렇게 해서 당시 경매액은 총 15억 원 정도였다.

-지난 2011년에는 화랑운영자들만 참여할 수 있는 G옥션을 설립했다. 당시 설립 의도는 무엇이었으며, 화랑업계의 호응도는 어땠는지도 궁금하다.
“화랑들이 창고에만 놔둔 그림들을 서로 교환하고 구입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G옥션이었다. 화랑만 참가하니 가격이 다소 싸더라도 사회적인 영향이 없고, 묵혀둔 작품들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쇠퇴기를 걷고 있는 화랑계를 살려보고자 함이었다. 첫 개최 때 70여 화랑이 참여하고 380점 출품돼 120점이 거래됐다. 긍정적인 호응에 또 다시 개최를 결정했는데, 해가 갈수록 화랑들이 패기가 없어지고 참여도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화랑계의 쇠퇴가 옥션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친 거다. 그때부터 화랑업의 암흑기를 절감했는지도 모른다.”

-동숭갤러리는 75년 개관했다. 40년 가까이 된 역사 깊은 화랑이다. 수학을 전공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미술과 가까워지게 됐나? 또 화랑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
“아버지께서 교직에 계시면서 그림을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젊으셨을 때부터 그렇게 그림 모으길 좋아하셔서 컬렉션을 어느 정도 갖추고 계셨다. 나 또한 그런 아버지 곁에서 그림에 대한 안목을 키워오고 있었다. 내가 맏이였고, 혼기도 차오던 때라 아버지는 화랑 운영하면서 시집가라는 식으로 화랑을 차려주셨는데, 문을 열고 보니 화랑이 그렇게 잘 될 수가 없는 거다. 당시엔 그림을 사는 사람도 많았고, 팔겠다는 작가도 많았고… 대학로에 처음 차려서 지금까지 대학로에서 운영 중인데, 그땐 강남으로 이사 가는 붐이 일 때라 그런지 이사가면서 정리할 작품들이 의뢰가 들어오곤 했다. 하나 팔면 그 즐거움이 열흘은 가더라. 그렇게 나도 좋아서 이 일에 빠져들었다. 교사들 봉급이 5만원일 시절인데 100만원짜리 그림도 심심치 않게 팔렸다. 수완이 좋았던 건지, 감각이 있었던 건지 그림을 봐도 느낌이 오는 게 있었고 그런 그림들을 모으기 시작한 거다. 박수근 선생님 댁에 가서 10호짜리를 300만원에 샀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아마 가격이 어마어마할 거다. 물론 이미 팔았다.(웃음)” 

-어떤 작가가 좋은 작가라고 생각하나?
“좋은 작가라고 생각해 선택했던 작가들은 대부분 천재였다. 그냥 딱 보면 천재라고 느껴졌다. 아무리 천재이고 타고난 재능이 있다한들 게으르다면 아무 소용없다. 작가 정신이 투철하고 꾸준해야만 결실이 드러난다.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좋은 작가는 분명 태도부터 다르다. 작업실에서의 태도, 고뇌하는 태도가 다르더라. 화랑업이 잘 될 시절, 하루에도 전시소식과 카달로그가 수도 없이 왔던 때가 있었다. 거기서 보다가 느낌이 가는 작가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면 전시를 가보고, 그림을 직접 보고도 느낌이 좋다하면 작업실도 따라가 본다. 그래도 좋다싶으면 투자하는 거다. 천재들은 미래를 본다. 그 시대에서는 미친 사람 취급받고 그랬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인정받지 않나 그런 안목을 갖고 천재를 알아보고 소개하는 게 바로 화랑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발굴하거나 지원한 작가는 누구인가?
“김구림 화백 작품을 아주 좋아해서 선생님 미국도 가시기 전인 88년에 전속작가 계약했다. 이석주 화백 첫 전시도 우리가 열었다. 80년대 초에 인연을 맺었는데, 이 화백 좋은 작품은 우리가 다 갖고 있다. 김선구 조각가도 내가 발탁했다. 요즘 중국에서 아주 잘 나가더라. 이외에도 한 30여 명은 되는 것 같다.”

-현재 국내 미술시장을 어떻게 관망하나? 더불어 미래도.
“미술시장이 어두운 정도가 미래를 점칠 수 없을 만큼 어둡다. 생각보다 더 급속히 더 빨리 어려워지고 있다고 해야 할까. 물론 세계시장도 안 좋긴 안 좋지만 우리와는 다르다. 가품에도 많이 단련돼 있고 그런 점에서 능숙하게 대처할 줄 알며, 가격에서도 보다 더 투명하다. 그렇다보니 신뢰구축이 우리보다 더 탄탄할 수밖에. 이건 다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가품논란, 믿을 수 없는 작품 가격 등에서 점차 신뢰를 잃어간 것이다. 좋은 전시를 고민해야하고, 전시를 통해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통해 좋은 작가들이 나오고… 이렇게 미력하게나마 미술업계 전체가 서로 힘을 합쳐 나아가야한다. 지금이라도 뭉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큰 사단이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또한 작품가격면에서의 투명도 중요한데 그걸 관할하는 기구가 따로 생겨야 하고, 미술경매도 외국의 사례를 살펴보고 배워야할 것이다. 프랑스는 화랑이 경매를 열지 못하게끔 법으로 제정하고 법무성에서 직접 연다. 외국이라고 문란하고 혼란했던 시절이 없었던 게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지혜롭게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얼마든지 희망이 있고,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꿈은 무엇인가?
“아름다운 집이 모이면 아름다운 마을이 되고, 그 마을이 모이면 아름다운 도시가, 그 도시가 모이면 결국엔 나라가 아름다워지는 것 아니겠나. 미술은행을 통해 미술문화저변확대를 일궈 우리나라를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