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이종상 화백](1) 한국의 벽화
[특별기고-이종상 화백](1) 한국의 벽화
  • 일랑 이종상 화백/대한민국예술원 회원
  • 승인 2014.07.17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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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랑 이종상 화백

(1) 한국의 벽화
한국의 벽화는 대략 4C頃부터 시작되는데 특히 5~6C경 고구려 내륙지방에서 특기할 만한 분묘 벽화가 제작되었다. 선사시대 벽화 유적은 아직 발견된 것이 없으며 채회의 일종인 락랑시대 칠협(Tempera수법)이 있을 뿐이다. 고구려의 벽화 기법은 한강을 건너 6C 초엽 백제, 신라 벽화에 여운을 남기고 드디어는 남해안을 거쳐 일본 북구주의 벽화 생성을 자극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후대 동양화의 전파 과정과도 다를 바 없는 것이다.


① 고구려 벽화
고구려는 일찍부터 한대 문화와 교섭이 잦았고 흉노의 남진에 따라 古代 서북방 문물과도 접촉이 많았으므로 한국 고분 벽화의 여명기인 4세기경부터 북방 민족으로서 웅건한 기질과 풍토적 생활감각을 여실히 반영하여 고구려 특유의 벽화 양식을 가지게 됐던 것이다.


고구려 벽화의 분포는 크게 이대 분류로 생각하면 고구려 국내성고지를 중심으로 한 압록강 본류 류역과 만주측 지류인 동가강 류역, 한국측 지류인 독노강 유역의 고분 벽화가 그 하나이며, 다른 하나는 평양성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유역의 고분 벽화이다.


고구려 벽화를 자극했을 류형적 유적은 산동반도의 한대 화상석과 고분 채회, 중앙 아세아의 석굴벽화 등이며 특히 신강성 「아스타나」고분 출토(364년경)의 연락도화고는 인물 묘사나 복식 等이 아주 유사하다. 기타도 만주 영성자 및 요양북원의 후한대 고분 벽화들도 고구려 벽화와 가장 접근되는 유적들이다.
벽화의 내용은 생시에 생활사적인 기록을 남기고 사후의 명복을 위하여 묘실을 생시의 연속으로 장식하여 생활의 영속과 현세의 재생 희구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 주제는 사방벽에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의 사신도를 그렸고 천장에는 천체 현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일?월?성?신과 비운 등을 그려 사자의 영생을 위한 소우주를 설정코자 했던 것이다. 대체적으로 표현 양식을 보면 처음에는 기법이 고졸하여 대소비차, 수평관념, 원근투시 등이 무시되었고 정면을 피하고 측면 표현을 주로 하였다. 여기다 사신설, 신선설 등 중국 고대의 고유사상과 불교?도교 등의 사상을 혼합 유입해서 당시 외래문화 흡수에 급급했던 고구려인들의 회화양식이 매우 다양했던 것이다.


이들은 주로 주인공과 전각, 처첩에 초상 및 시종자들을 수렵, 무악, 각희 등으로 나열하거나 전투도를 그렸다. 또는 종교적인 공양 행열 등에 연화?비천?산기?운기?신수 기타 무의미한 장식적 문양 등을 배치했다. 이렇게 초기에 다양했던 양식이 6C경부터는 중국의 신흥 남북기 회화 양식에 크게 영향을 받아 나열적이고 도안적인 고졸한 표현을 벗어나, 점차 회화적인 원숙한 표현을 하였으며 주제도 다양성에서 통일성을 갖게 됐으니 6~7C를 대표할 만한 고대 동양 회화의 신품들인 중화 진파리 제일호분과 강서 삼묘리 고분군의 벽화를 들 수 있겠다. 「거창 고분 벽화 미술적 가치 - 최순우」


과도기의 고구려 벽화로서 중국의 영향을 받은 동수묘 벽화(357年代)는 수마석회암 판석을 축조하여 그 위에 직접 벽화를 제작한 것으로 1949年에 발굴된 최고의 조지벽화이다. 내용은 주인 부부상과 회랑 외벽 내면에 250명 이상의 일대 행열도가 백묘로 그려져 있고, 68字의 묵서명이 좋은 사적 자료가 된다. 그리고 평남 순천 용봉리의 요동성총 벽화(4C경, 1953年 발굴)가 있는데 탈락이 심하여 겨우 전실 남벽에 그려진 성곽도와 서측실에 사신도가 부정형편마암 위에 석회석을 도장하여 그려진 채로 남아 있다.


이와 같이 중국계의 벽화가 동전하여 즙안에서 평양으로 천도(427年頃)한 후부터 (광개토대왕의 석실에 벽화가 없는 것을 상기하라) 제작된 고구려 토총 벽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전기 벽화로 간성리 연화총의 「신상」 용강 부부총의 「주인부부초상」 안성동 대총의 「부부상」 순천 천왕지신총의 「천지신도」 등이 있으며 횡장한 전실을 가지고 감(龕)이 달려 있으며 전실에 부부초상화를 그려 넣은 고분벽기를 지나서 중기에는 전실에서 내주벽으로 초상화가 옮겨지며 구도와 색감이 단조로와진다.

매산리의 사신총, 용강의 쌍영총, 즙안의 무용총, 각저총 등의 부부상은 모두 현실 주벽에 있고 독립된 초상이 아니며 내용이 있는 사건을 통해 그 장면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쌍영총 북벽화의 부부도는 5C 후기 제작된 것으로 탈락과 변색이 심하여 주인공 내외의 인물을 극히 적게 표현하였고 V자형의 막을 올린 외곽 건물 속에 적은 상연을 그리고 평상 위에 부부상을 정면으로 표현하였다. 원근감과 volume은 전혀 표현하지 못하였으나, 평상은 뒤를 올려 심도를 표현하려는 흔적이 보이며 후면보다 전면이 좁아 평상의 좌우선이 중간에서 교차되는 역원근법(Reverse Perspective)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