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이장원의 태양 키네틱 아트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이장원의 태양 키네틱 아트
  • 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 승인 2014.09.03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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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이장원은 태양을 대상으로 작업을 펼쳐나가는 작가이다.

그의 설치작업에서 태양은 사물(작품)을 움직이는 근원이면서 동시에 작가적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동인(動因)이기도 하다. 그의 작업은 과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과학기술의 진보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이력을 살펴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어렸을 때부터 뭔가를 만드는 것에 재미를 붙인 그는 중학교 1학년 학생일 때에는 8비트 컴퓨터를 다루면서 컴퓨터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스물여섯 살의 나이에 뒤늦게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 진학을 했는데, 그 전에는 공학연구소에서 연구에 몰두했다.

조소과에 진학을 하게 된 동기는 연구소 시절 백남준의 인스톨레이션 비디오 작업을 보면서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고 한다( 갤러리정미소 디렉터 이은주와의 인터뷰).

이장원의 설치 작업이 조각적 양상을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에 기인한다 할 수 있겠는데, 이는 테크놀로지의 기술적 성과를 예술에 접맥시키는 작업을 하는 여타의 작가들과 구분되는 지점이다.그러나 비록 정통 조각을 전공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어떤 작품들, 가령 다수의 시디롬 부품을 이용하여 꽃과 같은 형태로 배열하는 작업은 소위 미적 조형성을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 이유는 비단 꽃의 형태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얼기설기 얽힌 전선의 무질서한 모습과 사각형의 견고한 시디롬 형태의 집합에도 연루돼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관심이 유사성에 근거한 전통적인 조각관(彫刻觀)에 있지 않고 개념에 있으며, 바로 이 지점이 그의 작업을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개념미술의 연장선상에서 살펴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장원의 작품에서 보이는 이러한 반(反) 유미적 경향은 그가 지향하는 과학적 방법론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가령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스펙터클한 장경의 연출(조명 쇼)과는 정반대되는 것으로 작가의 의도는 정적인 순간의 지속의 드러냄에 있다.

가령 <Suntracer>는 태양을 추적하는 알고리즘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이 장착된 조각을 통해 태양의 미세한 움직임을 구현한 작품이다.인간의 인지능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 작품은 초당 0.035밀리씩 움직이는 태양의 이동속도를 알고리즘으로 프로그래밍하여 장착한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관객이 이 작품의 움직임을 인지하기란 불가능하다.  <Suntracer>의 움직임은 곧 태양의 움직임이고 태양의 움직임은 곧 작품의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키네틱 아트의 범주에 속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장원의 이 작품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키네틱 아트는 아니다. 그것은 관객의 정상적인 인지능력을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볼 때, 초(超) 키네틱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움직임에 대한 관객의 정상적인 인지능력을 초월하여 자연(태양)과 기계(컴퓨터)가 벌이는 상호작용적 관계성을 드러내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바람을 이용한 컬더의 모빌작품과도 다르고 기계가 동력에 의해 스스로 움직이는 팅겔리의 키네틱 조각 작품과도 다르다.

이장원의 <Suntracer>는 바람이나 비, 구름 등등 환경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자연 현상에 기반을 두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자연의 질서, 즉 태양의 속도와 움직임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키네틱 아트의 경지를 보여 준다.

여기서 태양(자연)의 대리물로서의 조각 작품(사물)의 움직임을 관객이 인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비유컨대, 천하의 근본인 도(道)의 원리를 대중이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늘의 법(道法)을 논한 노자의 <도덕경> 제25장에 “한데 섞여 이루어진 어떤 것이 있는데 천지보다 먼저 생겼다.

고요하고 그윽하게 독립하여 있으며 다시 고침이 없고, 두루 행하나 위태롭지 않으니 그로써 천하의 어머니가 된다(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寥兮 獨立不改 周行而不殆 可而爲天下母),”라고 한 대목은 이와 연관시켜 볼 때 의미심장하다. 도(道)는 늘 그렇게 ‘스스로 존재하는(自然)’ 바, 그 존재는 “변함이 없고 움직임은 완전하여 그 운행을 다시 고쳐 바꾸는 법이 없다(獨立不改)”.

이장원이 보는 태양은 만물의 어머니, 곧 그리스 신화를 빌면, 가이아에 대해 바치는 경의이다. 편리함을 추구하는 기술만능시대에서 흔히 잊고 지내는 우주의 근원에 대한 육박인 것이다. 그는 “자연의 근원을 응시하는(미술평론가 김상우)” 프로메테우스다. 그는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죄로 제우스에게서 벌을 받은 프로메테우스처럼, 관객에게 태양을 가져다주었다.

이장원에게 있어서 태양은 프로메터우스에게 있어서 ‘불’과 같다. 그는 ‘선지자’를 의미하는 프로메테우스의 이름처럼 오늘의 한국 사회가 처한 ‘스펙타클’의 위기에서 벗어날 것을 종용하는 ‘깬 사람’이다.

그는 타오르는 촛불을 응시하며 현대문명의 위기를 감지한 가스통 바슐라르처럼 태양을 바라보며 몽상을 한다. 바슐라르는 말한다. “불꽃의 몽상가는 모두 원초적 몽상의 상태에 있다. 이러한 원초적 감탄은 우리들의 먼 과거에 뿌리밖혀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