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솟대쟁이패’, ‘남사당패’ 일러주신 떠돌이 정광진(丁廣珍) 옹
[특별기고]솟대쟁이패’, ‘남사당패’ 일러주신 떠돌이 정광진(丁廣珍) 옹
  • 심우성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민속사학자
  • 승인 2014.11.23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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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성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민속사학자
1950년 「6.25 난리」때, 나는 열일곱살이었다.

서울의 종로 중심에 있었던 ‘휘문중학’ 4학년생이었다. (당시 중학 6년제) 다시 난리가 났다고 몇일 동안을 웅성웅성 했었는데, 그런 어느 날 아침, 대문 밖이 시끌시끌하여 나가보니, 이웃 아저씨가 오셔서 말씀하신다. 인민군이 들어왔다는 말씀이시다.

그로부터 근 한 달 동안 선배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별별 경험을 다 했다. 동족상잔 난리통의 부끄러운 이야기들이니 시시콜콜 말하고 싶지도 않구나! 나는 그 당시 인민군 선배에 끌려 남쪽으로 남쪽으로 걷고 걸었다. 실은 나는 그 당시 고약한 뱃탈이 나서 싸고 또 싸가며 걷기만 했다.

그런데… 마침 나는 서울에서 300여리 남으로 떨어져있는 충청도 나의 고향 땅을 지나고 있었다. 충청남도 공주군 의당면 율정리(당시 지명).

불행 중 요행이라고나 할까?! 나의 극심한 설사를 본 인민군 장교가 한참을 보더니 ‘저 동지는 함께 가질 못하겠군?’ 그런데 일행은 나만 그대로 두고 모두가 저 멀리 사라진다….

그래서 나는 어찔어찔 정신을 가다듬으며 ‘고향집’을 찾아 걷고 또 걸었다.

모처럼 찾아 든 고향집에는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다 어디로 가셨는지 보이지도 않고, 걸음걸이도 시원치 않으신 70이 넘으신 ‘정노인’이란 ‘머슴’만이 계시다. 나는 이 노인과 둘이서 조석을 해먹어가며 피난살이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머슴’은 벌써 10여 년 전 병든 노인으로 행랑채 빈방의 식객이 되면서 명색은 ‘머슴’이 된 분이란다.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고 한자(漢字)도 몰랐으니 ‘면사무소’에 등록을 할 때, 마을 이장(里長)이 자기 이름이라는 ‘머슴’의 목소리에 맞춰 정광진(丁廣珍)이라 면사무소에 등록을 했단다.

그는 경상도 사투리를 몹시 쓰는데, 고향이 마산(馬山)이랬다. 진주(晋州)랬다 왔다갔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보고 있는 책 <金在喆, 朝鮮演劇史, 1933, 朝鮮語文學會 刊)을 자기도 좀 보잔다. 책에 있는 글씨보다는 사진과 그림들을 한참 뒤적이더니 무척이나 반가워한다.

그 내용인 즉, 자기는 병들기 전 젊어서는 「솟대장이패」, 「남사당패」를 오가며 별별 놀이를 다 했었단다. 벅구(풍물)도 하고, 곤두질(땅재주)도 하고, 박첨지(꼭두각시놀음)도 놀았었단다.

한 때는 ‘솟대쟁이패’, ‘남사당패’의 뜬쇠(숙련된 연희자)로 이름을 날렸었는데, 갑작스런 속벽이 들어 패거리를 나와 떠돌던 끝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단다.

정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가 놀았다는 ‘솟대쟁이패’, ‘남사당패’의 놀이들을 연상하며 야릇한 궁금증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정 옹에게 ‘솟대쟁이패’, ‘남사당패’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묻기 시작했다. 그는 더듬거리는 말수지만 다음과 같은 소중한 내용을 엮어 주신다.

“…… 지금은 경상도 「진주」에 가도 ‘솟대패’가 없어졌겠지만 내가 젊어서만 해도 있었지, 글쎄 몇 사람이나 지금도 살아있을는지?

허 허. ‘솟대패’, ‘남사당패’ 놀이는 각기 일곱가지씩 있었지“
「솟대쟁이패」
‘풍물’, ‘땅재주’, ‘얼른(요술)’, ‘줄따기’, ‘병신굿’, ‘솟대타기’, ‘넋전춤’
「남사당패」
‘풍물’,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이)’, ‘덜미(꼭두각시놀음)’, ‘넋전춤’

그런데 아마도 이제는 ‘솟대패’의 중심지였던 경상도 진주에도 앞서 말했듯이 ‘놀이패’들이 거의 없어졌고, ‘남사당패’의 중심지였던 경기도 ‘안성’이나 충청도 회덕, 당진, 평택… 등에는 몇 사람이 흩어져 살고 있겠지.

‘솟대패’와 ‘남사당패’를 오고갔던 사람으로는 ‘양도일’, ‘송순갑’, ‘최은창’, ‘정일파’, 나 ‘정광진’이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다시 ‘국군’이 들어오고 ‘인민군위원회’ 일을 봤던 사람들이 붙잡혀 가는 소란통에 피난가셨던 할아버님 내외분께서 돌아오시닌 집안은 다시 생기가 돌았다. 그러나 할아버님께서는 아직 서울은 난리 속일 것이니 꼼짝 말라신다.

다음 해인 1952년 봄 서울 집에 부모님께서 돌아오셨다는 기쁜 소식이다. 자녀 셋을 낳으시고는 젊어서 혼자 되신 ‘이모님’의 시댁이 경기도 ‘가평’. 산속마을 ‘잣’이 많이 나는 곳에서 나의 부모님께서는 6.25 난리를 보내시고 무사히 서울로 돌아오셨단다.

나는 서둘러 서둘러 개나리 봇짐을 메고, 서울을 향하여 공주를 떠나게 되었는데 둘러멘 보따리 속에는 ‘솟대쟁이패’, ‘남사당패’를 적은 누런 종이쪽지가 「조선연극사」 사이에 끼어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정광진 옹과의 마지막이 되었다.

나는 서울로 돌아와 한 동안을 방황하다가 1953년 10월 ‘서울방송국’에서 ‘아나운서’를 뽑는다기에 시험을 참여했는데 다행히 합격을 했다.

그런데 같은 해 10월에 ‘정 노인’께서는 세상을 떠나셨다는 슬픈 소식이 들려온다. 정광진 옹의 ‘주검’은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시냇가 자갈밭에 ‘천장’으로 모셔져 있었다. 묘자리 구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평생의 시름을 흐르는 물로 씻어주자는 마을 어른들의 발의로 그렇게 뫼셨단다. 수북히 쌓은 돌무덤을 뒤로 하며 나는 ‘솟대쟁이패’… ‘남사당패’를 중얼거리며 서울로 돌아왔다.

나의 ‘아나운서’ 생활은 길지를 못했다. 1950년 6.25때 인민군 끌려갔었던 것이 발각되어 어쩔수가 없었다.
그런데 1957년으로 기억된다.

평소 스승으로 뫼셨던 「임석재 선생님」, 그리고 당시 국악예술학교 설립에 골몰하셨던 「박헌봉 선생님」께서 ‘한미재단’으로부터 향토민요 채록사업의 지원금을 받았으니 자네도 함께 일하여 보자신다.
나의 향토민요 채록작업은 그저 신명나기만 했다.

허허, 이런 기회도 있구나……. 그때 나에게는 ‘정광진 옹’으로부터 물려받은 ‘솟대쟁이패’, ‘남사당패’의 보물같은 자료가 있었으니 이 두 가지의 확인 작업은 흐르는 물결과 같았다.

‘민속학도’가 되게 깨우쳐 주신 ‘임석재’, ‘박헌봉’ 선생님. 솟대쟁이패’ 글 쓰게 해주시고 ‘남사당패 연구’책을 낼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미리 길을 알려주셨던 정광진 옹이시여.
고맙기 그지 없습니다.
여러 어른들이시여.
명복 만만복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