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을 더욱 빛나게 하는 땅콩회항 사건
미생을 더욱 빛나게 하는 땅콩회항 사건
  • 이현민 대중문화칼럼니스트/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
  • 승인 2014.12.22 11: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현민 대중문화칼럼니스트/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원
“ 보이는 것이 보여지기 위해 보이지 않는 영역의 희생이 필요하다.”

미생의 명대사 중 하나이다.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대다수의 직장인들은 이렇듯 개인적 희생을 감내하며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미생'은 커다란 변화나 성취는 없지만 묵묵히 맡은 일을 하는 직장인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며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주옥같은 대사들은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공감과 슬픔의 카타르시스는 ‘미생’에 점점 빠져들게 한다. 이제 미생은 열풍을 넘어 일종의 신드롬이 되었다. 하지만 최근이 신드롬을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땅콩회항’ 사건이다.

‘미생’ 열풍을 비웃기라도 하듯, ‘조현아’ 전 부사장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신이 처음부터 완생(完生)이었던 것처럼 기내에서 횡포를 부렸다. 무개념한 행동에 비난여론이 거세지자 위기의식을 느낀 조 전 부사장은 승무원과 사무장을 협박하여 거짓 진술을 강요하는 등 끝까지 갑질 추태를 부렸다.

‘갑질’ 사태로 안 그래도 시끄러웠던 올 한해를 미생으로 마무리하고 있었는데, 조현아는 거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조직의 부속품 같은 직장인의 삶과 애환이 재조명이 되고 있는 와중에 현실판 미생이 기내에서 펼쳐진 것이다.

‘땅콩회항’의 사회적 물의는 전 세계적으로 낯 뜨거운 파장을 일으켰고, 덩달아 다양한 패러디를 쏟아내고 있다. 에어아시아의 회장 ‘토니 페르난데스’는 최근 국내 유통계의 핵 ‘허니버터칩’을 땅콩사건에 빗대어 “우리 기내에서는 허니버터칩을 승객들에게 ‘봉지째’로 제공하겠다”고 조현아를 조롱하였다. 또 유투브에서는 ‘땅콩항공’이라는 영상을 제작하여 바로 수확한 땅콩을 제공할 테니 알아서 까먹으라며 사태를 강력 비판하였다.

KBS 개그콘서트에서도 어김없이 비행기를 후진한 대한항공과 이를 지시한 조현아를 풍자하였다. 게임도 등장하였는데, ‘승무원 타이쿤’이라는 게임은 땅콩회항 풍자의 끝판왕을 보여주었다. 사건 경위를 그대로 옮겨 온 듯한 스토리 구성은 신랄을 넘어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땅콩회항’에 대해 섣부른 판단은 유보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직원들에게 인격적으로 수치심을 준 오너의 행위는 오너이기에 더욱 강력히 비판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조용한 곳에서 회사를 위해 묵묵히 일하는 직원들을 리드하고 보호해야 할 경영자가 사건의 가해자인 지독한 현실 때문이다.

사실 이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승무원 포털사이트에는 꾸준히 오너 일가의 비행기 탑승을 자제해 달라는 성토글이 이어졌다고 한다. “우리는 회장님의 하인이 아닙니다.” 라는 그들의 절규에 그동안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짐작 할만하다.

땅콩을 봉지째 제공했던 여승무원과 책임자 사무장은 어쩌면 드라마 ‘미생’의 열혈 시청자 이었을지 모른다. 물론 시청자가 아니라 해도 상관없다. 대한항공이라는 거대기업에서 하루하루 버텨내는 미생들 중 한사람으로서 드라마가 현실을 얼마나 여실히 반영하고 있는지 몸소 보여주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어쩌면 리얼 보다 더 리얼하고,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했던 땅콩회항 사건은 그래서 여론을 더욱 들끓게 만든 것이 아닐까?

“기초 없이 이룬 성취는 단계를 오르는 게 아니라 성취 후 다시 바닥으로 돌아오게 된다.” 미생의 원작자 윤태호 작가는 흡사 예언자가 아닐까? 조현아 전 부사장의 만행과 그녀의 최후를 직감이라도 한 듯, 촌철살인 명대사다, 그래서인지 ‘미생’의 선풍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불어 닥친 땅콩회항 후폭풍은 직장인들을 더욱 씁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