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석의 박물관 칼럼]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한 이런 인연
[윤태석의 박물관 칼럼]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한 이런 인연
  • 윤태석 뮤지엄 칼럼니스트 / 문화학 박사
  • 승인 2015.01.28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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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윤태석/뮤지엄칼럼니스트/문화학 박사/한국박물관학회 이사/한국박물관교육학회 이사
그는 1934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10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정확히 말해 아들 여섯에 딸 넷인 집이다. 그리고 6.25한국전쟁 때 홀로 피난을 내려오다가 오던 길에 역시 따로 출발했던 아버지와 큰 형, 막내 남동생을 만나 서울에서 함께 살았다.

곧 돌아갈 줄 알고 어머니며 다른 형제들은 두고 내려왔지만 결국에는 이승에서는 만날 수 없는 영어(囹圄)의 몸과 같은 신세가 되었다. 이러한 여건에서도 신학문을 접해본 아버지에 의해 고려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여고에서 교편을 잡을 수 있었다. 그가 바로 오늘날 거제도 앞 외도(외도 보타니아)를 개척한 이창호다.

한편 그녀는 경기도 양주군 덕정리 어느 부농의 4녀 중 3녀로 태어났다. 딸밖에 못 나는 며느리를 서울로 내보낸 조부모님은 아버지에게 첩살림을 시켜 대를 잇게 했다. 종로 5가 효제초등학교 근처에서 딸을 키우며 삯바느질을 하던 어머니는 억척스럽게 일을 하셨다.

어머니의 헌신으로 사범학교까지 나와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사촌 오빠의 소개로 대학생이던 이창호를 만났다. 이창호는 막무가내였다. 어머니도 볼 수 있게끔 연애편지를 보냈는가 하면 집에도 불쑥불쑥 찾아오기도 했다. 한번은 퇴근해 집에 들어서는데 방 가장자리에 턱하니 앉아 어머니와 다정하게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이창호가 마치 집주인 같았다. 어머니를 먼저 매수 한 것이다.

손 만 잡아도 결혼해야할 것 같았던 당시 남녀 간의 연애에 대한 보수적 분위기를 이창호는 매우 잘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창호의 전략대로 그녀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남자의 반려자가 되었다(1961). 그녀가 다름 아닌 오늘날 외도 보타니아의 최호숙 회장이다. 

신혼 초 부부교사의 삶은 안정되고 행복했다. 그러나 이창호 특유의 도전정신과 사업가기질은 교직사회를 벗어나 동대문시장의 의류원단사업가로 변신하게 했다. 원단에 관심을 표한 것은 이미 이 계통에 기반을 다지고 있던 처가에 의해서이다.

처가의 전폭적인 도움에도 불구하고 쥐덫 같은 난관이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었다. 10여년에 걸친 고난의 굽이들은 이창호와 최호숙을 지치고 힘들게 했지만 도전과 성공의 의지를 결코 꺾지는 못했다. 결국 큰 성공을 거두어 이후 외도와의 인연의 끈을 잇게 한 가장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줬다.  

이들 부부의 외도와의 인연은 1969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실한 사업가 이창호가 그나마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바다낚시였다. 구들과 남해로 낚시를 갔던 이창호 일행은 폭풍우를 만나 외도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당시 외도는 동백과 후박나무 등 원시초목이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고 단 여섯 가구만이 전기는 물론 선착장도 없이 불안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하룻밤 신세를 지기 위해 찾은 한 민가의 주인은 낯선 손님을 위해 빈방에 군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몸을 녹이며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일행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쉼 없이 아궁이로 빨려 들어가는 땔감은 다름 아닌 수십 년 수령은 족히 돼 보이는 동백나무였던 것이다. “동백나무를 땔감으로 쓰면 어떡하느냐?” 따지듯 묻자. “동백나무밖에 없는 걸 어쩌란 말이냐? 당신이 와서 한번 살아봐라.”

빵빵한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 집주인의 한탄은 거세게 이어졌다. “우리도 이 지긋지긋한 섬을 떠나 뭍에 나가 살고 싶소, 땅은 팔리지도 않고, 제기랄......,”, ‘이대로 뒀다간 민둥산이 되겠다.’는 생각이 순간 이창호의 뇌리에 강하게 스쳐갔다.

외도에서의 생경한 경험과 충격을 뒤로한 채 서울로 올라온 이창호는 아내 최호숙에게 느닷없이 섬을 사자고 제안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최호숙에게 섬은 1년 전(1968) 그리스의 갑부 오나시스가 고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을 아내로 맞을 때 세기의 결혼식을 올린 데다 결혼 후 통 크게 선물로 준 '스코르피오스(Skorpios, 스콜피오섬으로 더 알려짐)'였다. 최호숙에게 외도는 스코르피오스였고 이를 구입하자는 남편의 가슴은 오나시스보다 넓고 멋져보였다. 그때 최호숙 34세, 이창호는 36세였다.

동상이몽의 3개월이 흐른 8월, 부부는 외도와의 공식적인 첫 대면을 통해 지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가족들과 친지, 친구들과 함께 외도로 향했다. 통영에 도착해 다시 배를 타고 거제도로 간 다음 버스를 타고 비포장 길을 달려 밤 10시가 넘어서야 구조라항에 도착했다. 짧은 휴식도 없이 대기하고 있던 고깃배로 갈아탄 일행의 두려운 항해는 계속되고 칠흑 같은 어둠과 파도가 삼킬 듯 거칠게 덤벼들 무렵 거기에 외도가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일행이 눈을 뜬 건 다음날 정오가 다 되어서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스코르피오스는 없고 가파른 낭떠러지와 이름 모를 넝쿨과 잔목들만이 밀림처럼 무질서하게 펼쳐져 있었다. 순박하게 내리쬐는 해금강의 태양과 쪽빛 파도는, 마치 거칠게 때로는 포근하게 이따금은 무념무상의 포악함에서 오는 두려움과 긴장감을 자극해 주었다. 마치 《정글북》의 늑대소년 모글리 같은......, 이처럼 외도의 민낯은 묘한 마력이 있었다.

이들 부부의 외도(外道)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원주민들이 내 놓은(아니 맡겨졌다는 표현이 옳을 듯) 땅을 조금씩 사들이기 시작했다. 먼 미래를 위해 동백나무 5천 그루를 심기도 했다(1970). 한집 두 집 주민들은 외도를 떠났고 마침내 1973년(10.26) 소유권이 완전히 넘어왔다. 교사로 모은 전 재산으로 직물상을 했고 또 거기서 일군 밑천이 곧 외도이기에 이창호, 최호숙에게 외도에서의 자립은 무엇보다 절실했다. 고심 끝에 단행한 감귤농사와 양돈은 냉해와 돼지고기파동으로 처참한 실패를 맛보게 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남해안에도 관광의 붐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막막했지만 관광농원 사업을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막연하게 들어 일단 거제군에 공원점사용 신청을 냈다. 그리고 또 몇 년의 기다림, 천신만고 끝에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1976.12).

본격적인 관광농원 조성이 시작된 것이다. 외도 역사상 가장 힘든 공사로 기록될 선착장공사, 조각상과 화분을 옮기다 겪은 네 번의 골절, 나무를 심고 돌을 옮기다 지쳐 쓰러진 쉴 새 없는 나날들. 하루에도 수십 번 포기하고 싶었다. 천만근 무거운 몸으로 잠이 들 때면 차라리 해가 뜨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이창호의 무모함과 최호숙의 세심함, 외도의 마지막 원주민으로 오늘이 있게 해준 강수일 고문의 전문성과 책임감은 서로에게 게으름을 용납할 수 없게 한 견제였고 격려였다. 그리고 1992년에는 드디어 '문화시설지구'로의 지정허가를 받아냈다. 어떠한 희망도 약속받지 못한 채 섬을 샀고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지 20여 년, 서류를 만들어 수도 없이 관청을 들락 거린지 10년의 성과였다.

그러고도 3년, 1995년 4월 15일 역사적인 개원식을 가졌고 열흘 뒤인 25일 첫 손님을 받았다. 결과는 상상이상이었다. 매일 33척의 유람선이 1만 8천명까지의 손님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이창호는 이를 두고 인천상륙작전 때 연합군 대열이라고 표현하곤 했다. 그리고 8년 후인 2003년 이창호는 외도의 동백꽃이 아직 채 지기도 전인 3월 1일, 사진 한 장 없이 피난 나와 평생을 그리워하던 어머니! 그 절절함 마저 에덴 가든에 놓고 비너스 가든을 지나 짙푸른 해금강을 향한 채 숨을 거두었다.

이렇게 외도라는 국화꽃이 피게 된 것이다.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울었으며, 간밤엔 무서리가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던 것이다. 외도. 참 많은 인연들이 짧지 않은 세월을 두고 스위스 손목시계의 부품만큼이나 정교하게 만났고, 빗나갈 때는 아슬아슬하게 스치듯 빗나가며 켠켠히 모인 것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창호가 월남하다가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 때 그 시간에 남해로 낚시를 가지 않았다면 또 동백나무로 군불을 때지 않았다면, 1968년에 재클린이 그리스로 시집가지 않았다면......, 결코 비껴 갈 수 없는 인연의 퇴적물이다. 하나하나가 외도를 꽃피우게 할 해금강의 금빛 물결 같다. 박물관은 이렇게 해서 생겨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