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스페인 춤과 동행하는 자유로운 영혼 - 돈키호테
[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스페인 춤과 동행하는 자유로운 영혼 - 돈키호테
  • 김순정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교수
  • 승인 2015.03.12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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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정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교수/김순정발레단 예술감독/한국발레협회 부회장/한국예술교육학회 부회장/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꿈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과 이해관계를 따져 가능할 때에만 행동하는 사람을 흔히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라고 한다. 세상은 이상보다 현실주의자의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이상주의자의 삶은 당대에서보다 후대에 영향을 주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 인물이 아닌 돈키호테의 경우도 그렇다.

발레 돈키호테를 처음 만난 것은 1983년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의 공연 실황을 담은 비디오였다. 소련에서 망명한 스타 발레리노 미하일 바리쉬니코프와 신예 신시아 하비가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화려한 춤 외에는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이 없었다. 이유를 지금 생각해 보니 드라마와 춤의 조화가 매끄럽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레 돈키호테의 성공은 주역 뿐 만 아니라 출연하는 모든 무용수들의 춤과 연기가 물 흐르듯이 완벽하게 결합할 때 이루어진다. 그러한 돈키호테를 직접 만나게 된 것은 2000년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였다. 대부분의 발레가 지닌 달빛아래나 궁정 안의 창백한 밤의 세계가 아니라 대낮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 아래 이루어지는 솔직하고 유쾌한 각양각색 인간군상의 삶을 보여주는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1869년 12월 14일 러시아 볼쇼이발레단에서 공연된 돈키호테는, 초연에서 실패하기 마련이라는 통설을 깨고 이례적으로 성공했으며 이후로도 성공을 이어갔다. 안무를 한 프티파는 전막에서 스페인의 향취가 그득한 민속무용을 무대화하여 클래식발레와 함께 적절하게 배치함으로써 관객이 흥겹게 작품에 몰입할 수 있게 하였다.

이후로도 안무가인 고르스키, 자하로프, 갈레이조프스키가 개작 및 수정을 시도하여 살아 움직이는 듯 사실적인 군중씬, 최상의 클래식발레기교를 보여주는 그랑 파 드 뒤(남녀 주역의 2인무)와 주옥같은 캐릭터 댄스가 조화를 이루며 백년 이상의 시간을 관통했고 오늘 날의 세련된 모습으로 굳건하게 살아남았다.

돈키호테, 1991, 키트리-김순정,가마쉬-고 김종훈

한국에 <돈키호테> 같은 본격적인 러시아발레가 상륙한 것은 1990년 한.러 수교가 이루어진 이후의 일이다. 당시 국립발레단장 임성남(1929~2002)은 그 해 러시아를 방문하여 한러 발레교류를 위한 의견을 전달한 바 있었고 윤탁 국립극장장의 초청에 의해 1991년 4월말, 볼쇼이발레단의 연출가 겸 지도자로서 마리나 칸드라체바(1934~ ) 부부가 내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91년 6월 13일부터 17일까지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국립발레단이 제67회 정기공연으로 역사적인 돈키호테 전막을 올리게 되었다.

당시 나는 여주인공 키트리역을 최태지와 더블캐스트로 맡게 되었고 직접 역을 맡은 후에야 발레<돈키호테>의 매력에 제대로 눈을 뜨게 되었다. 이전에는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세기딜리야, 판당고, 볼레로, 지가, 호타 등 스페인 춤과 집시춤 등의 다양한 캐릭터 댄스 그리고 음악(밍쿠스)의 매력에 흠뻑 도취되기도 했다. 또 하나 다른 작품에서는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인물 돈키호테를 운명처럼 만나게 된 것도 기뻤다. 그의 느릿한 걸음걸이와 자유의지에 따른 특이한 행동방식은 웃음과 동시에 다른 의미와 시공간을 느끼게 했다.

돈키호테, 1991, 키트리-김순정 바질-나형만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는 작가가 온갖 오욕을 겪고 난 후 만년인 58세에 출간했는데 당시 유행하던 기사의 무용담들을 풍자하기 위해 썼다고 한다. <돈키호테 데 라만차>라는 원 제목의 뮤지컬을 보려고 했지만 여의치 못해 책으로 읽으려 오래 전에 사다놓았지만 마음 뿐 이었다. 부담스러운 두께의 소설 돈키호테는 그래서 서가에 꽂힌 채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그러다 내년이 돈키호테 출판 400주년이라는 말을 듣고는 문득 펼쳐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발레 돈키호테를 떠올리며, 원작의 그가 어땠는지 다시 한 번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고 유쾌한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곳곳에서 웃음이 터지곤 했다. 자신의 이상 혹은 공상에 빠져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올바르고 즐거운 삶인지를 여러 번 내 자신에게 물어보게 되었다.

프티파 이전에도 발레의 선각자들은 이미 1801년 <가마쉬의 결혼>이라는 작품 등으로 돈키호테라는 근대정신의 인물을 발레 속에 끌어들였다. 당시 유명 무용수인 베스트리스가 바질역을 맡았다는 기록도 있다. 200년이라는 세월이 넘도록 발레의 역사와 함께 한 돈키호테를 생각하며, 발레속에는 눈에 보이는 것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무수한 보물들이 담겨져 있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했고 그 의미를 더욱 세심하게 들여다보아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