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소리는 목청이 아니라오’ 김소희 선생과의 만남-2
[특별기고]‘소리는 목청이 아니라오’ 김소희 선생과의 만남-2
  • 심우성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민속사학자
  • 승인 2015.03.13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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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우성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민속사학자
만정(晩汀)선생님.

지금 여기 선생의 영결식장에는 슬픔에 잠긴 유족과 가까우셨던 친지와 이웃, 그리고 소복한 무릎 제자들이 하늘을 우러르며 눈물을 삼키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 선생께서 서울을 떠나시는 영결식 마당에는 여기 저기 꽃이 피고 또 지면서, 파란 이파리가 싱그럽게 돋아나고 있습니다. 홀연히 떠나시는 선생께서 저희들에게 주시는 마지막 손길인 양 지금 이곳에는 봄 온기가 스며오고 있습니다.

고아한 한복차림에 단아하게 쪽을 찌시고 예술보다도 사람 됨됨이를 일깨워 주시려 했던 만정의 마지막 체온이 마로니에 공원에 잔잔히 일렁이고 있습니다. 엄엄히 사랑하셨던 유족들과 아끼고 아꼈던 제자들…. 그리고 선생께서 그토록 소중히 여기셨던 국악예술고등학교의 모든 식구들이 떠나가심을 가슴깊이 애도하고 있습니다.

선생께서는 우리의 사표이셨고 큰 기둥이셨으며 어머니셨기에 떠나신다는 것이 믿어지지를 않습니다. 더욱이 조금 전까지 이 마당에 울려 퍼졌던 그 청아한 소리와 정겨운 육성 녹음이 저희들 귓가에 역력히 머물러 있으니 말씀입니다.

제가 만정님을 처음 뵌 것이 1954년이니 어언 40년이나 되었군요. 서울중앙방송국에 몸담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나운서로서 방송에서 판소리를 소개하고 말씀도 나누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무렵 선생께서는 비길 데 없는 독창적인 소리의 경지를 구축하시면서 주위의 인기를 독차지하셨던 마흔 살 전후이셨습니다.

▲ 명창 김소희

그로부터 저는 선생의 사랑을 남달리 받아왔습니다. 국악예술학교가 창덕궁 앞에 자리 잡을 무렵, 방송국을 그만두고 민속예술을 연구한답시고 방황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교장이셨던 박헌봉 선생께 특청을 드려 미숙한 저를 ‘국악사’를 가르치는 교사로 채용토록 해주셨으니 이 바닥으로 이끌어 주신 인도자이셨습니다.

평소에 그처럼 만나 뵙고 싶었던 국악계의 큰 스승을 한 자리에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국악예술학교는 우리 국악계의 단연 큰집이었습니다. 만정 선생은 물론이요, 박녹주 선생, 김여란 선생, 박초월 선생, 성금련 선생, 한영숙 선생, 박귀희 선생, 지영희 선생, 한범수 선생, 김성대 선생, 윤영춘 선생, 남운용 선생, 김윤덕 선생, 김순태 선생, 유개동 선생, 이창배 선생, 그 밖에도 큰 기둥께서 이 학교에 다 계셨으니 저는 하루하루가 그저 행복하기만 했습니다.

이처럼 훌륭한 배움터로 이끌어 주셨던 만정 선생께서 오늘 저희들 곁을 떠나시려 하는군요. 선생께서는 이제 저승에 가시면 앞서 가신 여러 선생님과 만나서 못다 하셨던 정담도 나누시고, 또 저희 후학에 대해 걱정도 하시겠지요.

▲ 명창 김소희 소리가 담긴 음반들

언젠가 말씀하셨습니다. 학습 있는 명인 대가들이 한 사람 한 사람 가버리니 막막하기만 하고, 그저 훌쩍 떠나고만 싶으시다고. 저희들 몰골이 오죽 답답하셨으면 그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또 한가지 옛날 생각이 나는군요. 선생께서 저를 국악예술학교 교사로 채용하셨을 때만 해도 저는 젊디젊은 20대 초반인지라 장차 올바른 사람 되라고, 국악을 열심히 연구하라고 특히나 일깨워 주신 두 분이 계셨습니다.

박녹주 선생께서는 어울리지 않는 응석까지 받아주시며 한 돈짜리 금반지까지 빼주시며 귀여워 해주셨는데, 만정께서는 사랑을 회초리를 드시고 베푸셨습니다. 이 두 어른의 사랑의 조화가 그나마 저로 하여금 오늘이 있도록 도와주셨다는 생각입니다.

어떤 이는 만정 선생을 ‘학’이라 하는가 하면 ‘거북’에 비유하기도 하고 ‘연꽃’이라고도 합니다. ‘난초’에 비유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매란국죽’, 매화와 난초와 국화와 대나무의 모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만정 김소희 명창 소리 장면

선생께서는 소리를 하시면서 춤을 추시고 온갖 기악을 하시고 또 글씨를 쓰셨습니다. 그저 하신 것이 아니라 분야마다 일가를 이루시면서, 삶의 양식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소리를 춤으로 추시고, 기악을 소리로 담으시는가 하면 글씨가 소리요, 소리가 글씨로 승화하는 과정을 부단히 시도하셨습니다.

이처럼 고매한 경지를 한 치의 틈도 없이 밀고 나가시려 하니 때로는 맵고 차다는 말씀도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또 웬 일입니까. 선생의 그 차고 매운 꾸짖음을 그 어느 제자도 서운해 하는 자 없으니 말씀입니다. 올곧게 꾸짖어 주시는 마지막 스승이 바로 만정 김소희 선생이셨습니다.

선생님!

이제 장황한 사설은 그만하고 고별의 말씀을 올려야하는가 봅니다. 딸, 아들, 손자를 비롯한 모든 유족들, 어제 오후 입관의 의례를 올리면서 오열하는 그 얼굴 얼굴에서 유지를 받들겠다는 다짐을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저기 저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계시겠지요. 슬픔을 씹으며 자랑스러운 스승의 뒤를 잇겠다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지를 않습니까! 꼭 스승의 올곧은 그 몫을 다할 것이니, 고이 눈을 감아 주시기 바랍니다. 관계 요로와 세상 사람들도 다 선생께서 오늘 떠나심을 진심으로 애도하면서 명복을 빌고 있습니다.

▲ 김소희 선생님 영결식장에서

만정 선생님!

지금 저희들은 여기 마로니에공원에서 고별 의식을 올리고 있습니다. 실은 선생께서는 영원히 우리의 곁에서, 아니 이 삼천리 금수강산에서 떠나실 수가 없으십니다. 영원불멸의 참 소리를 소중히 담아 우리 모두에게 남겨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선생의 소리는 만고불변의 유산으로 이 땅에 살고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먼저 떠나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들도 곧 뒤좇아 뵙게 될 것이니 말씀입니다. 어서 평온히 눈을 감아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선생을 마지막 뵈온 것은 어제 오후 4시, 입관 직전이었습니다. 표정이 너그러우셨습니다. 지금 여기 영결식장 안의 흐느낌은 선생의 유지를 받들고자 하는 제자들의 다짐의 소리이오니 부디 눈을 감아 주시기 바랍니다.

1995년 3월 21일 아침 후학 심우성, 삼가 명복을 비옵니다.

만정 김소희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