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비무장지대 문화운동의 재논의
[윤진섭의 비평프리즘]비무장지대 문화운동의 재논의
  • 윤진섭 미술평론가/시드니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
  • 승인 2015.03.13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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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진섭 미술평론가 / 호주 웨스턴 시드니 대학 철학박사 / 광주비엔날레 큐레이터 / 서울미디어아트비엔날레 총감독 /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 국립현대미술관 초빙큐레이터(한국의 단색화전) /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장 역임 / 현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부회장, 시드니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
예기치 않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 한 인간의 인생을 바꿔 놓듯이, 민족이나 국가도 자신이 모르는 사이 타자에 의해 운명이 바뀔 수 있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은 한반도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한반도의 운명은 미국인 두 사람이 그은 단  하나의 선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이다.

미국 육군부 작전국의 본 스틸 대령(주한 미군사령관 역임)과 미 육군장관 보좌관인 딘 러스크 중령(케네디정부에서 국무장관 역임)은 작전국의 사무실 벽에 걸린 지도에 38선을 그어본 후 38선 점령계획안을 기초했다. 이 안이 미국 합참과 제3부 조정위원회를 거쳐 대통령에게 보고되었으며, 이는 다시 ‘일반 명령 제1호’로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비밀 해제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의 문서번호 ‘319-ABC File 1942-1948, No. 387’은 한반도의 운명이 기존에 잘못 알려진 것처럼 얄타회담에서 결정된 것이 아님을 증언하고 있다. 한반도의 38선은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항복의사를 표명한 당일 자정 무렵 앞의 두 사람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그 결정은 소련이 한반도를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내려진 조치였다. 소련도 미국의 이러한 결정에 동조, 38선에서 더 이상 남으로 진군하지 않았다.

아마 그 당시만 해도 찰스 본스틸과 딘 러스크 두 사람이 지도 위에 그은 한 줄의 선이 무려 70여 년 간이나 한 민족 구성원의 운명과 삶을 그토록 바꿔놓을 줄 짐작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지도 위에 황급히 그은 한 줄의 선은 실제로는 200여km에 달하며, 그 줄은 한국 전쟁이 멈춘 후에 그어진 군사분계선 155마일(248km x 4km)과 비슷한 길이이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남과 북에 진군한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38선을 경계로 군정이 시작되었다. 남한에는 미국의 군정을 겪은 후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이승만 정권이 수립되었고, 북한에는 소련을 등에 업고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김일성 정권이 들어섰다.

1948년,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을 국호로 정한 이 양대 세력에 의한 한반도 분할은 비단 국토의 분할뿐만이 아니라, 사상과 이데올로기의 분열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동란은 미국과 소련을 위한 일종의 대리전이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인 이 전쟁으로 인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기까지 수백만의 인명 살상이 있었으며, 남북한 간에 무려 천만 명에 달하는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휴전이 성립된 이래 비무장지대(D.M.Z : Demilitarized Zone)는 60여 년 동안 사람이 거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천혜의 생태보존지역으로 남았다. 오늘날 비무장지대는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생태계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이 비무장지대를 천연상태로 보존하자는 문화운동이 1990년대 초중반에 걸쳐 일어났다. 화가이자 교육자인 이반 교수에 의해 주도된 이 문화운동에 연인원 수 백 명에 달하는 작가들을 비롯하여 학계, 정치계, 문화계, 종교계 등 약 천 여 명의 인사들이 동참했다.

여기서 우리는 비무장지대 문화운동이 일어난 1990년대의 상황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이 전시가 해방 이후 좌우로 갈려 이념적 갈등과 사회적, 정치적 분열을 겪어 온 한국 근현대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촉발된 냉전 상황의 소산이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으로 대변되는, 문학에서의 좌우 이데올로기에 대한 테마와 유사하게 미술에서도 70-80년대를 통해 소위 모더니즘 대 민중미술이라는 양분된 구조가 나타났다. 이른바 ‘순수’와 ‘참여’ 논쟁이 그것이다. 단순화가 가져올 문제를 무릅쓰고 도식화하자면 ‘순수’에는 소위 말하는 모더니즘 작가들이, ‘참여’에는 민중미술 작가들이 중심을 이룬다.

8. 15 해방 이후에 형성된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한국사회에서 중립을 허용치 않는 고질적인 병폐를 낳았다. 중용 혹은 중립적 자세를 취하기 위해서는 비단 이데올로기 문제뿐만 아니라 처세나 신상, 정치적 견해에 있어서조차 불이익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한국 사회는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 영남과 호남, 신구세대 간의 갈등이 뿌리 깊게 얽혀 형성된 흑백논리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따라서 고착된 분단 상황이 낳은 트라우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0년대 초중반 3회에 걸쳐 열린 비무장지대전은 미술계에 고착된 좌우의 이념적 대립, 참여와 순수 논쟁을 극복, 그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 움직임으로써 긍정적 평가가 가능하다. 그것은 넓게는 비무장지대의 자연과 생태를 보존하고자 한 비정치적인 문화운동이었으며, 좁게는 화단의 내적 통합을 기하고자 한 첫 시도였지만, 지속적으로 전개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비무장지대 문화운동과 함께 ‘이산(Diaspora)’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이다. 1983년, 대한민국의 공영방송인 KBS TV가 실황으로 중계한 ‘이산가족찾기’는 애끓는 사연으로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린 장기 프로그램이다. 한국동란으로 촉발된 남북한 간의 이산가족은 그 숫자가 무려 천만 명에 달하여 비무장지대 문화운동과 함께 사회적/문화적 퍼포먼스로 다루어볼 필요가 있는 소재이다.

좌우 이데올로기에 의한 인간성의 파탄과 인명의 살상, 한국 특유의 분단 상황은 예술에 다양한 소재를 제공해준바 있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에 급증하고 있는 탈북민들과 다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외국계 이주민들 역시 예술의 다양성을 낳는 요인들로서 이에 대한 비평적 분석이 요청된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