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수의 미술시장이야기]서예(書藝)와 calligraphy
[박정수의 미술시장이야기]서예(書藝)와 calligraphy
  • 박정수 미술평론가/ 정수화랑 대표
  • 승인 2015.03.26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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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수 미술평론가/ 정수화랑 대표
서예는 서체를 가르치는 일이 아니다. 서예의 범위가 축소되고 의미가 디자인 정도의 수준으로 약화되면서 사람들의 정신성까지 낮아지고 있다. 서예를 배운 젊은이들이 인사동 등지에서 전각 파는 기술자가 되거나 calligraphy를 지도하는 강사가 되는 시스템으로 전락 되어서는 곤란하다.

중국의 서법(書法), 일본의 서도(書道)와 함께 우리나라의 서예(書藝)는 학문의 영역임과 동시에 예술의 영역이기도 한 고유의 영역이다. 글을 잘 썼다는 것은 글자나 글씨의 모양새가 우아하고 유려하다는 의미보다 글자나 글씨에 담긴 의미와 내용이 훌륭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글에 담긴 정신이나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에 의해 졸필(拙筆)이나 악필(惡筆)을 멀리 하고자 했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예(書藝)가 미술이냐고 묻는다. 서예라는 단어를 영어사전에 찾아보면 calligraphy로 풀이하고 국어사전에는 글씨를 붓으로 쓰는 예술이라고 적혀있다. 인터넷에 calligraphy로 찾으면 글자를 아름답게 쓰는 기술이라 하면서 좁은 의미로는 서예(書藝)라고 모니터가 알려준다. 서예가 calligraphy의 좁은 의미란다.

서예가의 자존심을 지켜나가면서 서예는 문자디자인이 아니라고 강력히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인터넷에 떠도는 사전의 의미부터 바꿔야 한다. 사대사상도 아니면서 서예가 calligraphy의 좁은 의미라고 나타나 있는 것에 흥분해야 마땅하다.

동양정신을 이해하고자 하고 서예의 본래적 의미를 찾고자 하는 입장에서 서예와 calligraphy를 엄중히 분리하고 싶다. calligraphy는 아름다운 서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원론적 의미에서 본다면 calligraphy는 글자의 아름다움과 유려함을 중시하는 현대전각(篆刻)에 더 가깝다.

calli는 kallos라는 그리스어를 어원으로 둔 아름답다는 의미이며, graph는 새기다 혹은 긁다, 쓰다의 개념이다. 여기에 반해 서예(書藝)에서 서(書)는 성인의 말씀(曰)을 붓(聿)으로 적은 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서예와 calligraphy는 개념이나 어원에서 완연히 다른 입장임에도 여전히 혼용하고 있다.

서예는 글 쓰는 이들의 소양이다. 서예가 미술의 한 분야로 이해하고 있다면 서예는 calligraphy의 작은 개념으로 이해하면 그만이다. 서예가에게 논란의 소지가 많을 일이지만 서예(書藝)는 미술보다는 문학에 더 가깝다. 한국미술협회에 서예 분과가 있는 이유는 서로간의 이익을 위해 정해진 상태일 뿐이다.

calligraphy에는 서(書)가 없다. 서예는 글을 손 글씨로 쓰는 것이고, 캘리그라피(Calligraphy)는 글자를 글씨로 나타내는 일이다. 글은 생각이나 어떤 내용을 글자로 나타내는 것을 의미하며, 글자는 소통을 위한 음성체계를 시각화한 기호가 된다. 글씨는 글자의 모양이다. 펜글씨조차 사라진 마당에 미술시간이나 국어시간에 서예를 가르쳐야 한다고 하면 입시에 방해된다며 반대할 이 많을지 모를 일이다.

서예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스스로 답을 구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정신세계를 구축하지 못함이며, 자신의 정신세계를 손 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글자를 디자인하거나 유명했던 누군가의 글씨 모양새를 흉내 내는 일에 그치고 있음이다.

서예라고 하는 것의 원론은 글을 가르치는 일이다. 글은 글씨나 글자의 모양새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정신적인 가치를 생산하는 일이다. 공모전에 입상하지 못하면 후학을 기를 수 없다거나 스승을 두지 못하면 같은 지역에 서실을 열지 못하는 이상한 자리다툼은 더 이상 곤란하다. 글(정신)을 가르치고 글씨를 습득하게 하는 인문학적 소견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