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 휑한 무대에 꽉 찬 소리, 오페라 '오르페오'
[공연 리뷰] 휑한 무대에 꽉 찬 소리, 오페라 '오르페오'
  • 강다연 기자
  • 승인 2015.07.27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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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악가들의 호연과 연출의 상상력 부족이 대비된 무대

지난 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선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L’Orfeo)’가  국내 초연됐다. 만토바의 카니발을 위해 쓰인 대작을, 서울시오페라단은 규모를 줄여 중극장인 M씨어터에 올렸다. 객석과 무대의 거리가 좁아진 것은 반갑지만, 그 아담한 무대마저 텅 비어 보이는 연출이 아쉬웠다.

 

악보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오페라의 한국 초연

1607년 작인 ‘오르페오’는 한국에서 자주 공연되는 다른 작품들처럼 노랫말과 오케스트라가 긴밀히 연결돼 있거나, 장면마다 음악이 롤러코스터를 타듯 극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스토리가 천천히 전개되니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때가 많고, 그런 장면에선 가수들이 주로 가만히 서서 인물의 감정을 시적인 노랫말로 전달한다.

이런 특징 덕에 ‘오르페오’는 오늘날 관객에겐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다. 물론 해외 유명 극장에서처럼 예산을 많이 들이면 가수가 노래하는 동안 군무나 무대장치로 스펙터클을 연출할 수 있다. 하지만 중극장에서 공연되는 ‘오르페오’에 스펙터클을 기대한 관객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예산이 아니라 상상력으로 공간을 채우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김학민 연출은 등장인물을 르네상스 시대 그림들처럼 배치해서, 죽은 아내를 찾으러 인간의 몸으로 저승까지 내려간 “신화”의 시대에 직접 뛰어들기보단 한 걸음 떨어져 남 얘기처럼 관찰했다. 특이한 건, 합창단이 노래하지 않을 때도 거의 한 자리에 정지해 있고, 무용수들도 있었지만 춤을 많이 추지 않았다. 가수들이야 어려운 노래를 소화해야 하니 불필요한 동선을 주지 않았겠지만, 무용수들까지 별로 움직이지 않고 거의 전 막 내내 방긋방긋 웃으며 성당 벽화처럼 앉거나 서 있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럴 거라면, 차라리 콘서트 오페라 형식으로, 오케스트라와 가수들을 모두 무대 위에 세워 연주에만 집중하는 편이 나았을지 모르겠다. 그럼 관객들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연주하는 모습이나마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었을 테니까. 통일성 없는 의상과 단조로운 조명도 몰입을 방해했다. 지나치게 정적인 연출 때문인지 고개를 꾸벅이며 조는 관객들이 눈에 띄었다.

다른 오페라 무대, 다른 공연 장르의 추세에도 뒤처진 아쉬운 연출

마지막 장면만 아니었어도, 커다란 캔버스 앞에서 막막해 하는 화가처럼, 연출가가 자신에게 너무나 많이 주어진 공백을 감당할 수 없었나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합창단과 무용단이 단체 사진 찍는 자세를 취하니 “찰칵!”하며 카메라 셔터 터지는 소리가 나고, 모든 게 갑자기 마무리되며 막이 닫히는 연출은 90년대에나 나왔을 법한 아이디어다. 오래전 오페라라고 이미 구식이 된 연출 방법을 써도 되는 것은 아니다. 셀프 카메라에 이어, 이제 드론의 시각에서 사진을 찍고 그걸 전시하는 시대에, 카메라 셔터로 막 내리는 연출을 2015년식이라 주장할 순 없다. 그리고 철저히 제삼자로서 지난 이야기를 관찰하는 입장을 강조하는 이유도 이해하기 힘들다.

 

관객들은 친절하게 잘 번역된 리브레토를 보며 능동적으로 극의 흐름을 이해해야 했다. 디오니소스의 추종자들에게 처참히 살해당하는 원작 신화와 달리, 오페라에선 절망한 오르페오 앞에 아폴로가 나타나 “너무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라”고 충고하며 하늘로 데려간다.

간절한 욕망을 다스리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욕망의 대상을 실제로 갖는 거고, 다른 하나는 욕망을 죽이는 거다. 오르페오는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고 에우리디체를 영영 잃었다. 이제 무슨 수를 써도 되돌릴 수 없다. 그에게 남은 방법은 에우리디체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서 초연해지는 것뿐이다.

열심히 직장에 나가도 월급이 부족해 집을 장만하거나 육아할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서 아이를 낳지 않거나, 결혼하지 않거나, 심지어 연애시장에도 뛰어들지 않는 한국의 젊은 세대가 떠올랐다. 이들도 욕망하는 것을 영영 가질 수 없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욕망을 제거했다. 하지만 이들을 영광의 별자리로 안내할 아폴로는 없다.

타이틀 롤을 부른 김세일 테너의 돋보이는 실력

성악적으론 만족스러웠다. 목동 역으로 여성 가수 대신 카운터테너를 기용한 것도, 테너 김세일과 바리톤 한규원을 더블캐스팅한 것도 신선했다. (주인공 오르페오 역의 음역는 테너도, 하이 바리톤도 부를 수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거주하며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김세일 테너는 아름다운 음색과 훤칠한 외모, 분명한 딕션, 정확한 음정이 돋보였다. 그의 고음은 시인답게 달콤하고 부드럽기도, 남자답게 당당하고 우아하기도 했으며, 저승에 내려가 두려움에 떠는 나직한 저음은 다소 볼륨이 적어지긴 했어도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특히 어려운 트릴에서도 고운 음색을 유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글룩은 에우리디체가 죽는 장면에서 오페라를 시작했지만, 몬테베르디는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가 서로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시간순으로 진행한다. 따라서 오르페오가 에우리디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런데 그녀가 죽어서 얼마나 슬퍼하고 그리워하는지,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세일 테너는 그런 면에서 적역이었다. 프로세르피나를 맡은 메조소프라노 김보혜는 하데스의 마음을 움직이는 요염한 하계의 여왕으로 연기도, 음색도 돋보였다.

바로크 시대 오페라를 연출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알지만, 더 많이 고민해서 가수들의 호연을 돋보이게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해외 오페라 극장과 페스티벌에서 무료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최신의 무대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요즘, 오페라 관객들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국내 오페라 무대에서도 수준 높은 연출을 보고 싶다. 하지만 아쉬운 마음은 접고, 이 무대에서 본 성악가들이 다음엔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