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인터뷰/추사 기념사업회 최종수 회장]“추사 동상 제자리로…”,
[특별인터뷰/추사 기념사업회 최종수 회장]“추사 동상 제자리로…”,
  • 인터뷰 정리/이은영 편집국장/강다연 기자
  • 승인 2015.07.30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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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선생 또 다시 유배당한 형국…제주서 ‘추사 선생 모시기 서명운동’ 중
▲ 최종수 추사김정희선생기념사업회장. 제주의 추사 동상이 제자리를 찾지 못해 표류하고 있는 현실에 인터뷰 내내 그의 눈시울은 뜨거웠다.

지난 6월,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의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와 기념관을 돌아보고 왔는데 뭔가 허전하고 빠진 것 같았다. 지난해 한 모임에서 만난 추사기념사업회 최종수 회장에게서 들은 얘기대로라면 그 곳에 추사 동상이 세워져 있어야 했다. 하지만 동상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 최종수 회장에게 전화로 물었더니, 놀랍게도 이미 철거돼 유적지도 아닌 다른 자리에 세워졌다고 한다. 10여 년을 추사 기념사업에 매진했던 최 회장의 목소리가 떨리는 게 전화상으로도 전달됐다.

추사 김정희는 빼어난 서예가면서 금석학에도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 청나라에까지 이름을 떨친 한류 슈퍼스타의 원조다.

그의 열렬한 팬이자, 추사 연구 분야에 기념비적인 공을 세운 최종수 회장을 직접 만나 추사가 ‘위리안치’(집 밖을 나오지 못하고 집안에서만 지내야 하는 형벌)됐던 집 앞에 세워졌던 동상 철거의 이유와, 그가 엄청난 양의 추사 관련 자료를 일본에서 어떻게 들여왔는지도 자세히 들어봤다. 그를 지난 6월 말 과천문화원 내에 있는 추사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최종수 회장 profile
사)한국효문화센터  이사장 (현)/사)추사김정희선생기념사업회장/한국문화원연합회장
/과천문화원장/과천향교 전교/사)경기도향토사협의회 회장/2016. 문화재23점 포함 추사자료
 2750점 기증받음/국민포장 수상/국민훈장 수상

◇문화재청, 궁궐을 숙박시설로 개방 VS 역사인물  동상 철거, 이율배반
추사동상 추사유배지서 철거… 아무 관련 없는 4차선 도로가로 옮겨져

추사 유배지에 추사동상이 세워졌었다고 들었는데 현장을 가서 보니 추사동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찌된 일인지?
많이 속상한 일인데... 아이고...

최종수 회장은 제주의 추사 동상이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엉뚱한 자리에 옮겨져 있는 것에 매우 가슴 아파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왜 동상이 최초 자리에서 사라진 것인가?

문화재청에서 사적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허가를 안 해줬다. 동상이 어마어마하게 큰 것도 아니고 사람 키보다 약간 큰 정도, 2m 20cm쯤 된다. 유허비도 여기 있고, 서귀포시에서도 허락했는데 결정적으로 문화재청에서 반대했다.

이게 어떻게 사적 훼손인가. 그 앞에 기념관도 들어섰고 기념관 뒤 추사가 지냈던 집 앞에 기념비도 세워져 있는데 그건 문화재청이 어떻게 설명할 건지? 이해도 안가고 말이 안되는 얘긴 것 같다.

비석을 세우는 것도 훼손인데, 아마 그건 사적 지정하기 전부터 아마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까지 내가 얘기할 건 아니다. 어쨌든 제주에 진정서를 보냈고, 현지에서도 서명운동(기자 주-'추사 선생 모시기 서명운동')이 진행 중이다. 이 동상은 제자리에 가야 한다.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위치에 세워야 빛이 나는데, 더구나 추사가 살았던 곳에 추사 기념관을 세웠고 거기에 추사 동상이 못 들어간다니… 이건 문화재청에서 유연하게 풀어줘야 할 일 같다. 한 3주 전쯤 제주의 한 신문에 실린 가십이 있다. 초등학교 학생이 추사 유배지를 보러 왔는데, 동상은 다른 곳에 세워진 이유를 물어봤다 한다. 거기에 어른들이 아무 대답도 못 하더라는 기사였다.

사람들이 추사 유배지에서 동상을 만나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거다. 추사가 살던 집을 국가에서 사적으로 지정해 놨고, 그 본인이 왔는데. 흉물스러운 물건도 아니고, 추상적인 조각도 아니고, 실재 인물의 표준 영정을 바탕으로 만든 작가의 동상인데 안 된다니 납득할 수 없다. 추사 선생이 8년 동안 유배생활 했던 곳인데, 후손들이 못나서 다시 한 번 유배를 당하는 셈이다.

▲ 추사 김정희 선생의 동상이 최초에 최적지로 선택해 안치됐던, 추사기념관과 추사가 8년간 유배생활을 하며 머물던 집 사이에 추사 선생이 안정감 있게 서있다.(좌측). 문화재청에 의해 사적지 훼손이라고 본래 자리(좌측 사진)에서 철거돼 설치된 제주 서귀포시 남문지의 추사동상(우측). 동상 앞으로 4차선 도로가 자리하고 있다.

후손들이 못나서 다시 한 번 유배를 당하는 셈”

지금 추사 동상이 과천, 예산, 제주에 세 개 세워졌다. 각각의 특징도 있고. 다 유적지 안에 들어 있는 게 아닌가?

과천에선 과지초당 경내에 있다. 과지초당은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예산은, 추사고택 들어가는 자료관 앞에 있다. 둘 다 나름대로 경내에, 동상이 서 있을만한 자리에 있다. 제주만 저렇게 됐다. 작가와 계약할 때 조건을 붙였다. 첫째, 얼굴은 표준영정을 기본으로 한다. 둘째, 각 지역에서 지냈던 시절의 특징과 분위기에 맞게 작가가 변형을 해달라. 셋째, 크기는 실물 크기 정도로 해달라. 이렇게 작업에 착수해서, 작가가 어떤 안을 내면 내가 검토를 하고 지방자치단체의 의견을 듣는 시간도 가졌다. 예산의 경우, 추사가 태어난 곳이어서 표준영정에 그려진 얼굴을 그대로 재현했다. 그래서 의자에 앉은 모습이다.

서귀포는, 이건 작가가 구상한 이야기다, 추사가 안에서 글을 쓰고 연구를 하다 잠깐 바람 쐬러 밖에 나온 거다. 앞뜰을 거닐고 먼바다를 바라보면서 한 손엔 종이를, 다른 손엔 붓을 들고 사유에 잠기는 모습이다. 머리에 쓴 유건과 허름한 복장도 그대로 재현했다. 과천의 경우, 말년에 과지초당에서 지낼 때다. 생을 마감할 때가 되니 느긋한,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재현했다. 그래서 한 손엔 부채를 들고 뒷짐을 지고 있다.(*추사 동상 제작자는 광화문 세종대왕상을 제작한 홍익대 김영원 교수다)

▲추사 동상이 본래 자리에서 추사와 관련없는 엉뚱한 곳으로 '유배'된 것에 가슴아파하며, 말을 잇지 못하는 최종수 회장.

애쓰셨는데 가슴이 많이 아플 것 같다.

어둑어둑해질 때 작가와 같이 가서 세워놓고 왔는데, 다시 가니 이미 철거해서 담 밖 화물차에 실어놨더라. 눈물이 확 쏟아졌다. 십 수 년째 추사 기념사업에 매진하고 있는데... 서귀포시로선 불가피했을 거다. 바로 다음날 방송사에서 취재를 나온다고 했으니까. 법적으로 안 된다는데 관청의 지시를 무시하고 동상을 세웠다고 언론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런 부분이 너무 경직됐다. 사적을 훼손한단 얘긴 추사 선생 유배했던 집을 가릴 정도로 크기가 크다든지, 아니면 거기에 무슨 건물 같은 걸 지어서 피해를 준다든지 해야 나오는 것 아닌가.

“그럼 어디가 좋겠냐”고 하니, 전혀 연고도 없는 4차선 도로 가에 먼지를 뒤집어써 가면서 이 위치에 세우라는 거다. 임시로 그렇게 하도록 했지만, 속상해서 작가는 제막식 하는 데 안 왔다. 당신들이 알아서 제 자리에 갖다 놓든지 하라고 했다. 당시 서귀포시 관계자가 '유배지는 이미 부결된 곳이니 안된다'며 내 의견을 묻길래, "원래 자리에 그냥 해달라, 여기가 안된다면 이 경내 안에다 세울 수 있게 해달라”는 두 가지 의견을 서귀포시에 냈다. 7월에 다시 심의한다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동상이 예사롭지 않은 작품인데. 작가가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을 만든 김영원 홍대 교수다. 특별히 이 분을 택한 이유는?

최근에, 역대 대통령 동상을 다 만들어서 청남대에 세웠다. 아직 제막을 못하고 있지만. 그가 유명한 조각가라던데 난 사실 조각은 잘 모른다. 동상을 제작할 때, 처음엔 조달청에 맡겨서 입찰을 의뢰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난 그렇게 못 하겠다고 응수했다. 난 그런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예술품은 조달청에서 제일 싼 값으로 제작하는 건 아닐 것 같았다. 게다가 기간도 넉넉하지 않았다. 견본을 만들어 심사를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사업 기간상 빨리 착수해야 했다. 동상영정심의위원회 위원장인 안휘준 박사에게 자문을 받았더니, 투명하게 공모를 진행하는 게 좋다고 조언해줬다. 공모에 꽤 많은 사람이 참가했다.

추사와 어떻게 인연을 맺었기에 이렇게 추사 기념사업에 투신했는가?

2003년 과천 문화원장을 하면서, 추사가 39살 때 추사의 아버지가 과천에 별장을 지었고, 말년에 추사 선생이 4년 동안 살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과천에서 추사 기념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다 2006년에 일본에서 후지츠카 아키나오 선생한테 추사연구의 대가인 그의 아버지후지츠카 치카시 씨의 자료를 기증받게 됐다. 그중 문화재만 23점이다. 가족과 관련한 자료, 편지 등 연구용 자료가 2,750점이다. 그 외 모든 자료 1만여 점을 다 싣고 왔다. 너무 많아서, 처음엔 항공편으로 갖고 오려다 선박 편으로 왔다.

◇추사 연구 계속해 달라는 조건으로 기증받아

그 많은 자료를 어떻게 다 기증받을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이 궁금하다.
이야기가 길다. 2006년이 추사 선생 서거 150주년이라, 과천 문화원장으로 재직하던 2005년에 기념사업을 추진했다. 어떤 프로그램을 할지 협의하다, 추사 선생 학문과 예술에 대한 국제 학술회의를 하기로 했다. 한국, 미국, 일본, 중국, 대만이 참여하는 정도로 계획하고, 우리 회원(추사 기념회)들이 일을 분담했다. 나는 일본을 담당했다. 그런데 일본 쪽에 누가 추사 연구를 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과거 후지츠카 치카시 박사가 경성제국대학교에 있을 때 추사 연구 논문으로 동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 그 아들이 살아있는데, 후지츠카 아키나오라고, 교육학자라는 것만 알려졌었다.

당시 문화재 청장이 유홍준 청장이었다. 유청장도 추사 팬이다. 완당평전도 쓰고. 그래서 유청장을 만나 부탁했더니, 자기도 찾다가 못 찾았단다. 내가 찾으면 잘 좀 얘기해달라고 오히려 내게 부탁했다.

몇 달 동안 그를 찾느라 헤매다 서산에 갔을 때, 지인과 얘길 하는데 그가 “어제 동경대학교 교수 셋이 다녀갔다”는 말을 했다. 왜 다녀갔느냐 물었더니, 한국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조사차 왔었단다. 순간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쳐서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리고 전화했다. 동경대 교수였던 후지츠카 치카시 박사의 아들, 후지츠카 아키나오 씨를 찾는 데 좀 도와달라고. 세 번째 전화했을 때 요시다 교수라는 분이 찾아보겠다더니, 정말 그 달 말에 메일을 보내 후지츠카 아키나오 씨의 연락처를 알려줬다.

다음날 바로 전화해서 “아버님의 논문을 학술회의에서 발표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더니, 생각해보겠단다. 이렇게 시작해서 일주일에 두어 번씩 전화로 연락했다. 근황을 물은 다음 추사 선생 자료 남아있는 거 없느냐고 했더니, 2차 세계대전 때 불타서 아무 것도 없단다. 그럼 ‘논문이라도 발표해 달라’ 요청했다. 선친에 대한 얘기만 해줘도 충분하니까. 후지츠카 아키나오 씨도 승낙했다. 내가 일본으로 가서 직접 방문하겠다고 했더니, 그럴 필요까진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초대장도 드리고, 우리가 연구한 자료도 증정해드리고...무조건 그냥 가겠다고 했다.

실제 국제학술대회 명의로 초청 공문을 만들어 팀을 꾸린 다음 일본에 갔다. 2003년부터 멤버였던 ' KBS TV 진품명품'의 김영복 위원도 동행했다. 방 세 개, 거실 하나인 작은 집에 책과 자료 등이 가득차 있어, 앉을 자리를 겨우 마련했을 정도였다. 나와 후지츠카 아키나오 씨가 마주앉아 얘기하는데, 집안을 둘러보던 김영복 씨가 뒤에서 사인을 보내더라. 하지만 후지츠카 씨에게 재차 추사 자료가 있는지 물어도 없다고만 대답한다. 김영복 씨가 아무리 사인을 보내도 “그럼 저건 뭐냐, 있으면서 왜 없다고 하느냐”고 따져 물을 수는 없지 않나.

그 때 후지츠카 씨가 이미 93세였다. 편지를 주고 받을 때 호흡이 힘들고 다리가 아파도 정신은 맑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에게 우리의 기념품과 연구자료를 드렸다. 2년 동안 연구를 많이 했다는 게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었다. 이번 방문에선 그를 초청한 것에 만족하며 귀국하려 했다.

▲최종수 회장이 주관해 펴낸 추사연구 자료 책자 등. 최회장은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기자에게 추사관련 책자들을 한 묶음 손에 들려주었다.

◇동경대학 기증 요청 거절했던 후지즈카 씨

그런데 다음날, 오전 10시쯤 숙소에 있는데 전화가 와서 아직 일본에 있느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언제 가느냐고 또 묻는다. 저녁 비행기로 간댔더니, 그럼 우리 집에 다녀갈 수 있느냐고 청한다. 그때 뭔가 감이 왔다. 그러겠다고, 팀원들이 다 같이 가겠다고 했더니 나만 오라고 했다. 이상한 제안이 아닌가. 그래서 “아시다시피 내가 일본 말이 서툴다, 통역을 데려가겠다.” 하고, 일본서 만나 합류하게 된 동경대학교 유학생 한 명과 같이 갔다.

후지츠카 씨는 “어젯밤에 잠을 한 숨도 못 잤다”더라. 우리나라 학자들도 인정했듯, 아버지 후지츠카 치카시 씨는 추사에 대해선 제1인자였다. 태평양전쟁 때 그의 연구실에 있던 모든 게 불타 없어졌지만, 집에 남아있던 자료는 아들이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는 이 자료들 때문에 본인이 여태 죽지도 못하고 살아있는 거라 말했다.

알고 보니 동경대학교에서 자료를 인수하러 왔었다. 그런데 두 번이나 거절했다 한다. 목록이라도 작성하게 해달라고 다시 요청이 왔는데, 그것마저 거절했다. 동경대에 보내면 지하창고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을 게 아니냐는 거다. 조카에게 물려줘 봤자 그 애한텐 그게 휴짓조각일 뿐이다, 그래서 아버지 뜻을 이어받을 사람을 찾느라고 여태 죽지도 못하고 기다렸다 했다. 전날 짧은 시간이지만 나와 이야기하면서, 일본 말을 잘은 못해도 진지한 태도를 읽은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날 준 자료를 보고 연구를 계속해 나갈 거라 확신한 것 같다. 그래서 “이 자료들을 최 원장에게 주면 선친의 뜻을 이어갈 것 같으니, 기증하겠다.”고 말했다. 극적인 장면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기증하겠다는 확인서를 써 달라고 했다. “내가 준다고 하면 주는 거지, 그런 게 왜 필요하냐”고 말했지만 내겐 두 가지 걱정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쳤다. 첫 번째, 그의 가족이 누가 있는지 그땐 파악이 안 됐었다. 가족들이 그걸 나 대신 동경대학교에 기증하라 한다면 일이 틀어질 거다. 그리고 워낙 중요한 자료라, 중간에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 거니까. 결국, 기증 의향서를 받아냈다. “과천문화원원장 최종수 앞. 추사와 관계된 모든 자료를 최 원장에게 기증할 의향이 있다. ”

◇추사 자료 기증은 3세기 왕인박사에 대한 보답

그렇게 나와서 일행들과 다시 한 번 상의했다. 모두 흥분했다. 특히 김영복 씨는 이 자료들이 얼마나 귀중한지 아니까. 자료를 픽업해야 하는데, 고민을 많이 했다. 나한테 기증한 거니까 내가 가져와야 하지만 양이 너무 방대했다. 그래서 과천시에 요청해, 시가 인수하는 거로 결정했다.

그분이 내건 조건이 있는데, 다 지키진 못했다. 첫째는 연구를 계속해달라, 둘째는 별도의 자료실을 만들어 달라, 셋째는 아사히 신문에 공표해달라는 것이었다. 1월 14일에 다시 방문해 기증품 목록을 작성하는데, 그가 아사히 신문에 이걸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3세기에 백제 왕인박사 덕분에 일본이 백제의 문화를 흡수했는데 일본인들은 그걸 모른다, 그래서 보답으로 이 자료를 한국에 보낸다, 일본 사람들이 이걸 알아야 한다”고. 난 손을 잡고 부탁했다. “이걸 알리면 반대 여론이 형성될 거다, 동경대학과 일본에서 가만히 있겠느냐.”고. 그래도 자꾸 알려야 한다기에, 내가 설득했다. 아사히 신문에 알리는 건 언제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목록을 작성하며 보니까, 있는지조차 몰랐던, 처음 보는 자료들이 꽤 나왔다. 자료와 해제 정도는 아사히 신문에 알리는 게 맞다고 하시는데, 그걸 내가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세 가지 약속이 나온 거다. 2006년 2월 2일에 언론에 보도자료를 배포했고, 메이저 신문, 방송에 다 보도됐다. 9시 메인 뉴스로 방송국에서 터뜨렸다. 아사히신문 서울지부에도 연락했는데 거기선 안 왔다.

이런 과정을 유홍준 청장이 당시 총리에게 말해서 그에게 훈장을 수여하기로 했다. 훈장 수여일인 2006년 5월 18일에 후지츠카씨가 (한국에) 와야 하는데 못 왔다. 그래서 하나뿐인 가족인 조카를 대신 초청했는데, 조카도 몸이 약해서 요양 중이었다. 결국, 일본에 보내서 일본 대사가 전수하기로 하고, 내가 중간 역할을 하기로 했다.

◇대한민국 대통령 훈장 받은  후지츠카 아키나오 씨

그때 그분은 이미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었다. 상은 조카가 일본 대사관에서 대신 받은 후, 나와 함께 자택에 방문해서 목에 걸어 드렸다. 사진도 찍고. 의식은 있었다. 대통령이 주는 훈장을 받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소감을 말했다.

훈장을 전달하면서 눈물겨운 일이 있었다. 학술대회에 참가하기로 했는데 못하게 된 것 아닌가. 훈장을 수여하고, 논문 일부를 낭독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 보내는 것으로 참가를 대신하기로 했다. 본인 의지였다. 난 “숨이 가빠서 낭독을 못 하겠으면 제목만 읽어달라”고, 그것도 안 되면 사진만 찍자 했는데, 굳이 논문을 끝까지 읽으려다 결국 혼절했다. 응급처치를 취한지 3~40분 만에 깨어나긴 했는데, 이날 이후 얼마 안 돼서 돌아가셨다. 내가 못할 짓을 했다 싶다. 후지츠카 아키나오에 대한 기록과 메모를 엮어 자료집처럼 출판해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비하인드 스토리보단 자료에 중점을 두어 모아놨다. 그런데 내가 제대로 구성할지, 자신이 없어 망설이고만 있다.

자료 만여 점을 통째로 운반하기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

1차로, 2,750점은 리스트를 만들어서 가져왔다. 본인 생전에(1월 16일) 비행기로 실어왔다. 나머지 자료는, 본인이 죽은 후 나에게 다 주도록 조카에게 유언했다.  난 그에 대한 확인서도 받았다. 후지츠카씨가 돌아가신 후 8월에 다시 갔더니 조카가 “필요한 자료는 다 가져가라. 나머진 내가 다 버리겠다”고 했다. 둘러보니 필요한 자료가 계속해서 나왔다. 논어 등 한자책들, 또 그분이 영화광이라 필름, 비디오 등이 많이 있었다. 소장 자료 100여 박스를 캐비닛 채로 배에 실어왔다. 그 자료로 과천에 박물관을 지었다. 간송이나 리움처럼, 대작을 보유한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있는데 추사 연구자료는 과천에 제일 많다.

◇'세한도' 손재형 선생 이후 가장 중요한 추사 자료

▲ 빼어난 작품성으로 그 가치가 무한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후지츠카 아키나오 씨로부터 기증 받은 자료 중 가장 주목할만한 추사 자료는 무엇인가.

친필 작품은 다 문화재로 지정됐으니 그런 걸 제외하고라도, 추사와 옹방강(기자 주 - 추사의 스승)이 주고받은 서간, 옹방강이 쓴 책, 옹방강의 글씨 등이 상당수 있다.

후지츠카 치카시 씨의 연구소는 1944년에 불탔다. 어떤 것들이 얼마나 불타서 소실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집에서 원판 필름(추사 작품들을 사진으로 찍은 것)이 상당수 발견됐다. 시대가 시대니만큼 유리 건판 형태다. 거기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이 찍혀 있었다. 다 불타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추사 작품은 후지츠카 치카시 씨가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다. 손재형 선생이 그에게서 세한도를 가져오게 된 일화는 유명하지 않나. 그 사건 후로는 추사 관련해서, 내가 제일 큰 자료를 인수한 거라고 말해 주더라. 내가 손재형하고 닮았다는 말과 함께.

추사는 여러모로 큰 업적을 쌓았지만, 가장 뛰어난 면모를 꼽는다면.

두 번씩이나 유배를 가면 보통은 좌절한다. 그런데 그는 좌절하지 않고 끝없이 공부하고, 연구하고 글씨를 썼다. 세계적으로도 대단한 ‘추사체’가 나왔고. 그런 점이 훌륭하다 생각한다. 학문과 예술에서 다 완성을 이뤘다.  제자인 우선 이상적에게 계속 주문해서, 그가 목숨 걸고 바다 건너에서 구해다 갖다 줬다. 8년 동안 그렇게 해준 게 고마워서 그에게 세한도를 그려준 거다.

◇오는 8월, 추사의 생을 무용으로 연출한 공연 열려

이상적도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역적으로 몰려 귀양 간 사람에게 이역만리에서 책을 구해다 준다는 건 쉽지 않았을 거다.

이 책(기자 주 - 추사 기념사업회 편찬, <추사 21세기에 다시 태어나다>) 뒤에 공연 장면이 있다. 바다를 건너가는. 그 시대엔 그게 죽음의 길이지, 삶의 길이 아니었을 거다. (사진을 보여주며) 영상을 투사하고 배를 띄워서 연출하는 장면이다. 이 공연이 8월 달에 무대에 오른다. 예산이 많으면 3D로 가는 건데. 그렇게 제작을 못 했다. 삼성동 코엑스에서 세계 대회를 했는데, 그 때 3D를 처음 봤다. 대단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기 어려우니 홀로그램 영상과 무용극을 접목했다. 올 해 공연은 8월 28일이다.

몇 년도에 처음 만들었나.

(추사기념사업회 오은명 이사가 대답을 거들었다) 2009년이다. 그전엔 ‘추사’를 국립창극단과 같이 만들었다. 작곡은 이용탁 씨가 해주셨다. 그런데 위인전이다 보니 다들 고루하고 재미없다고 하더라. 스토리에 극적인 전개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럼 아름답고 예쁘게라도 만들어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영상, 홀로그램을 이용했다. 그런데 우리 같은 사립 단체는 예산이 부족하다. 다행히 영상 쪽에서 잘 도와주는 젊은 친구를 만나, 1년에 한 번씩 영상을 조금씩 추가해 하면서 여기까지 어렵게 왔다.

기념사업회에서 했던 일은 또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학술회의가 있다. (해마다 했는지?) 해마다 열진 못하고, 수 회 열었다. 그리고 추사선생 추모 기념 전국 휘호대회를 예산문화원과 공동 주관한다.

▲ 위 사진처럼 추사 김정희선생의 동상이 본래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추사가 머물렀던 집(사적지로 지정됨)과 조화를 이룰 뿐만아니라, 이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추사의 정신을 기릴 수 있게 하는데 훨씬 효과적이다.  얼마전 제주의 한 신문에 실린 가십이 있다. 초등학교 학생이 추사 유배지를 보러 왔는데, 동상은 다른 곳에 세워진 이유를 물어봤다 한다. 거기에 어른들이 아무 대답도 못 하더라는 기사였다.

기념사업 계속해서 추진할 것

그럼 세 군데의 기념관과 박물관, 고택 유적지가 연계해서 하는 사업은 있나.

그 단계까진 아직 못 갔다. 지방자치단체와 연계해야 하는데, 지자체마다 예산이 다르고 추구하는 목적도 조금씩 달라서. 전시회나 학술회의를 해도 공동으로 하는 방법, 국제적으로 교류하는 방법, 그리고 추사를 현양하는 방법 등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할 계획이다.

우리나라에서 추사 연구자로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 중 유홍준 씨 외에 또 누가 있는가? 학자와 연구자들에 대한 지원은.

추사 연구자로서 누가 잘하느냐, 이런 걸 내가 얘기하긴 어렵다. 다들 잘하는데, 유홍준 씨는 달변이고, 어려운 내용도 평이하게 설명하는 능력으로 추사를 널리 알렸다.

다른 박사들과 대화를 많이 해도, 추사에 대해 많이 아는 분은 김영복씨 같다. 대단하다. 그리고 한양대학교의 정민 교수다. 이 사업을 하면서 여러 번 접촉을 시도했으나 전혀 인연이 안 닿았다. 그러나 그 분이 앞으로 뭔가 다른, 새로운 추사 이야기를 할 것 같다. 내가 파악하기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자료를 제일 많이 접한 사람이 정민 교수다. 2006년에 일본에서 추사 자료를 가져온 후 전시회를 열었다. 그 때 정민 교수가 다녀갔다. 그런데 난 그를 몰랐고, 누구도 그 때 정민 교수가 다녀갔단 얘기를 해주지 않았다.

내가 추사에 관해 쓴 책이 있다. 학술 서적이 아니라 교양서적이다. 그런데 정민 교수가 자신의 책에서 내 책의 내용 일부를 인용했다. 그가 하버드 대학교의 교환 교수로 가서 연구차 1~2년 있었는데, 엔칭 도서관에서 추사 자료를 많이 봤다. 조만간 책에서 그 자료로 연구한 결과를 풀어내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최근 창덕궁 낙선재 등 궁궐을 숙박시설로 꾸며 외국인들에게 개방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의 찬반의견이 분분하다. 화재의 위험성이 있는 목조건물인 궁궐을 숙박시설로 사용하게 한다는 데는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정작 아무런 위해를 끼칠 요소도 없을뿐더러 그 자리에 서 있어야 더욱 빛이나고 의미가 깊을 추사 동상을 추사기념관 밖을 떠돌게 하고 있다. 궁궐을 숙박시설로까지 개방할 생각을 가진 문화재청이 추사동상에 대해서도 좀 더 의미있는 숙고를 해주는게 마땅할 것이다.

누구보다 추사를 존경하고, 추사 연구에 열정적인 최종수 회장이 추사 유배지의 소중함을 모를 리 없다. 더 많은 사람이 추사를 추억하길 바라는 마음에 후손들이 동상을 세운 것도, 크게 보면 추사 유배지의 뜻깊은 역사 한 조각이다. 지난 10년 동안 추사 기념사업에 매진했던 최 회장의 간절한 소원은 결코 억지스럽거나 무리한 것이 아니다. 서울문화투데이는 서명에 참여한 제주 도민 및 최종수 회장과 한마음으로, 추사의 동상이 추사가 유배와서 학문과 예술에 정진하며 후학들도 키워냈던워 그 공간에 세워지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