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협녀, 칼의 기억’ 감독은 왜 김고은을 여자 오이디푸스로 만들었나
[칼럼] ‘협녀, 칼의 기억’ 감독은 왜 김고은을 여자 오이디푸스로 만들었나
  • 박정환 칼럼니스트
  • 승인 2015.08.24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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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 성적 2승 2패...김고은이 위험해

‘2승 2패’, 이 성적은 이종격투가나 권투선수의 성적표가 아니다. 영화배우 김고은의 흥행 성적표다. 김고은의 흥행 성적은 그녀가 출연한 영화 가운데 ‘영아’와 ‘네버다이 버터플라이’를 배제한 상업영화를 기준으로 헤아렸음을 밝힌다. 김고은은 ‘은교’를 통해 화려한 데뷔를 알린다. 신인 배우가 감당하기 힘든 파격 노출을 ‘은교’에서 감내하기는 하지만 김고은은 ‘노출’이 전부였지 노출 이상의 연기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몇몇 신인 배우와는 달리 연기적인 잠재력을 ‘은교’를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 ‘협녀, 칼의 기억’의 한 장면

하지만 그의 두 번째 상업영화 출연작인 ‘몬스터’는 ‘망작’에 불과했다. 김고은은 전작 ‘은교’와는 달리 ‘미친 년’이라는 콘셉트 아래 처음으로 열혈 액션 연기에 도전한다. 하지만 제아무리 배우의 연기가 빛난다 해도 시나리오와 연출이 함량 미달에 다다르면 배우의 연기는 작품의 함량 미달 탓에 녹슬고 만다. 망작 ‘몬스터’로 말미암아 김고은은 ‘은교’에 뒤이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다.

한 번의 부침을 겪은 김고은이 2승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하게 만든 영화는 ‘차이나타운’이었다. 사실 ‘차이나타운’은 강력한 흥행 맞수를 만나고 있던 터라 흥행이 쉽지 않은 영화였다. 바로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라는 할리우드 발 블록버스터의 폭격의 대항마였기 때문이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개봉에 한 주 늦게 개봉하기는 했어도 한국영화 ‘약장수’가 처참하게 침몰한 다음부터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하다시피 한 한국영화였는데, 여자 투톱 영화라는 흥행의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차이나타운’은 손익분기점을 넘는 기록을 세우며 김고은은 ‘몬스터’의 악몽을 지울 수 있었다.

하지만 ‘몬스터’의 악몽이 이 여름에 되살아났다. ‘협녀, 칼의 기억’을 통해서다. ‘협녀, 칼의 기억’은 이병헌과 전도연이라는 투 톱 배우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듯했지만, 사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홍이를 연기하는 김고은이다. 홍이의 정신적인 성장과 각성을 통해 이병헌과 전도연의 운명이 좌우되는 홍이를 위한 영화였다. 하지만 언론시사회가 끝난 직후 영화를 보고 갸우뚱하는 고개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 ‘협녀, 칼의 기억’의 한 장면

지나간 이야기지만 언론시사를 마친 다음 필자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 영화는 흥행에서 고전하거나 좌초하기 일쑤였다. ‘소수의견’은 한 줄기로 일관되게 흐르는 저력이 있었던 ‘변호인’과 달리 곁가지가 너무 많아 중장년 관객의 흡입력이 약하다는 평을 남긴 바 있는데, 필자의 평대로 ‘소수의견’은 흥행에서 좌초하고 말았다. ‘손님’ 역시 가해자와 피해자의 원한 관계를 우화 ‘파리 부는 사나이’와 융합하는데 실패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는 평을 남겼는데, ‘손님’ 역시 좌초하고 말았다.

‘협녀, 칼의 기억’ 역시 이들 영화와 마찬가지였다. 언론시사회에서 ‘협녀, 칼의 기억’를 본 다음에 맨 처음으로 보이는 단어가 있었는데 그건 ‘무협 마스터피스’가 아닌 ‘패륜’이었다. 전도연과 이병헌의 관계를 알고 난 다음에도 김고은은 주저하지 않고 전도연이 예상했던 길을 걷고는 그 길을 완성한다. 그런데 이상했다. 홍이 역의 김고은이 전도연이 예상했던 길을 걸어야만 했던 ‘당위성’이 좀체 보이지 않았다.

홍이가 전도연과 이병헌에게 칼을 겨뤘어야 하는 당위성을 관객에게 납득 가능하도록 설득하지 않은 채 김고은의 캐릭터를 구축했다면 김고은은 더 이상 홍이가 아니라 오이디푸스, 신이 정한 그대로 따르고 움직이는 ‘장기의 체스말’에 불과한데도 감독은 김고은을 자율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 가능한 존재가 아니라 체스말, 여자 오이디푸스로 만들어버렸다.

▲ ‘협녀, 칼의 기억’의 한 장면

박흥식 감독의 체스판 안에서 김고은은 이병헌과 전도연이 홍이에게 어떤 위치의 인물인가 하는 자리매김을 할 이성적인 판단이나 사유를 할 사이도 없이 아비와 어미에게 칼을 겨누는 운명에 천착하는 여자 오이디푸스, 박흥식 감독이 짜놓은 체스판의 체스말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만일 할리우드 영화의 전형적인 공식, ‘가족주의’의 공식을 영화가 염두에 두었더라면 영화는 홍이가 왜 가족공동체의 재결합이라는 우선적이고도 전형적인 공식보다 왜 ‘역사의 응징’이라는 판단에 기치를 내세웠을까를 분명히 짚고 관객에게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였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영화는 이 과정을 소홀하게 생각하는 잘못을 범한다.

김고은 자신의 지위가 응징자인 홍이의 위치가 아닌 혈육의 위치에 선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병헌과 전도연에게 칼끝을 겨누게 만들었다는 건, 징벌 받아야 할 역사의 죄인에게 칼을 겨누는 ‘응징자’의 김고은이라기보다는 왜 가족공동체에 칼을 겨눌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사유가 배제당한 채 혈육을 칼로 응징해야 하는 운명에 종속당한 여자 오이디푸스로밖에 보이지 않게 만든다.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공연이든 영화든 중요한건 ‘이야기의 힘’이다.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혹은 연출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짚고 공연이나 영화를 만들지 못한다면 그 영화나 공연은 이야기의 힘을 100% 전달하지 못하고야 만다. 김고은의 분발이 더 필요한 건 물론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