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 연극인 손숙과 박정자가 구순 이병복을 위해 낭독 공연 하기까지
칠순 연극인 손숙과 박정자가 구순 이병복을 위해 낭독 공연 하기까지
  • 박정환 칼럼니스트
  • 승인 2015.08.25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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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인 이병복 구술채록 ‘우리가 이래서 사는가 보다’ 출판기념회 열려

칠순의 연극인이라면 후배 배우들에게 존경받고 어르신으로 대우 받아 마땅한 연배다. 한데 칠순의 연극인이, 그것도 연극계에서 내로라하는 두 배우 손숙과 박정자가 대접을 받기는커녕 누군가를 기념하기 위해 낭독 공연을 했다면 믿어지겠는가? 손숙과 박정자의 이 거짓말 같은 낭독 공연은 바로 구순의 이병복을 위해 이루어진 뜻 깊은 공연이었다.

▲ 연극인 이병복 구술채록 ‘우리가 이래서 사는가 보다’ 출판기념회에서 환하게 웃는 이병복과 극단 자유 김정옥 연출가

이병복은 연극인이자 한국 무대미술과 의상을 하나의 예술 장르로 개척한 무대미술가로, 1966년 ‘극단 자유’를 창단해 40년을 이끌어온 장본인이자, 살롱드라마 공연의 산파 역할도 모자라 4년마다 열리는 프라하 세계무대미술경연대회에서 1991년부터 2003년까지 매회 한국이 수상하는 결과를 이끌어온 기념비적 인물이다.

25일 12시 성동구 카페성수에서 열린 연극인 이병복 구술채록 ‘우리가 이래서 사는가 보다’ 출판기념회에서 손숙과 박정자의 낭독 공연은 저서 ‘우리가 이래서 사는가 보다’의 축약본이었다. 손숙과 박정자가 이병복의 생애를 번갈아 읽는 낭독 공연 가운데서 이병복의 다사다난한 인생을 이십여 분으로 압축해서 읽을 수 있었던 낭독 공연이라는 이야기다.

만석꾼인 영천 이씨 집안은 일제 강점기 때 아들 네 명을 모두 유학 보낸 진보적인 부잣집이었다. 이런 영천 이씨 가문의 딸로 태어난 이병복의 인생에 얼룩이 진 건 6.25 동란, 밤새도록 큰 길에 드르륵하는 쇳소리가 난 건 북에서 남침한 북한의 탱크가 진격하는 소리였다. 6.25 때 아버지에게 막내삼촌은 피난 갈 것을 권유했지만 이병복의 아버지는 피난 가는 것을 거절했다. 처음 보는 장교가 아버지에게 잠깐 볼 일이 있다고 하면서 데리고 간 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연극인 박정자씨(좌측)와 손숙씨(우측)가 이병복의 생애를 번갈아 가며 낭독하고 있다.

대구에서 숨어 살 때 이병복은 후배에게 ‘재미있는 사람’으로 장차 남편이 될 남자 권옥연을 소개받는다. 그런데 이 남자, 초면이 아니다. 버스정류장에서 보던 남자였다.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묘한 인연으로 생각했는데 두 사람은 부부의 인연으로 맺어진다.

이병복은 예술가의 DNA를 타고난 사람이지만 배우자를 위해 헌신한 것이 너무나도 많다. 남편인 권옥연은 서양화가다. 남편이 그림을 그릴 적에는 남편이 물질적으로 신경 쓰게 하지 않는 게 신조라고 생각하고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묵묵히 해낸다. 예술가의 길, 엄마의 길, 그리고 내조의 길이라는 세 노고를 묵묵히 감내하는 가운데서 한국무대미술가협회 회장이 되었고, 한국 연극사와 무대미술사의 역사적 현장에 함께 해온 주인공이 되었다.

“조금 늦게 태어났으면 좀 더 멋있는 일을 했을 텐데 그럼에도 열심히 살았다”는 이병복은 “일만 있으면 행복할 뿐”이라며 종이로 적은 기념사 대신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즉석의 축사로 이날 출판기념회를 맞이하는 소감을 밝혔다.

이날 출판기념회에서 이병복은 “요새는 공포스러운 디지털 시대”라며 “무슨 능력이 남았을까 자문자답하며 마음도 몸도 춥기만 하다. 권옥연(남편) 그늘 밑에서 있었다. 내게 있어 일은 축복받은 신앙이나 마찬가지다. 어떻게 여러분에게 보답해야 할지 마음도 몸도 춥다”며 ‘춥다’는 표현을 반복하고 있었다.

▲ 연극인 이병복 구술채록 ‘우리가 이래서 사는가 보다’ 출판기념회에서 출판 낭독사를 하는 이병복

극단 자유에서 이병복과 동고동락을 함께 해 온 김정옥 연출가는 “극단을 대표하며 역할이 잘못되었다”며 “예술적인 일에 (이병복이) 전념하고 제가 살림을 맡았어야 했다. 하지만 이병복 선생님이 예술가였기 때문에 잘못 맡은 게 잘 되었는지 모른다”는 축사를 남겼다. 이 때 이병복은 김정옥 연출가에 대해 “남편보다 함께 싸우고 지지고 볶은 사람”이라고 애정 어린 응수를 남겼다.

“어릴 적 극단 자유를 부러워했다”는 윤석화는 “박정자, 손숙 선생님처럼 좋은 배우가 극단 자유에 많았다. 40년 전 저는 왜 극단 자유 단원이 되지 못했을까 하고 생각했다”며 “이병복 선생님은 우리가 이래서 사는구나 하고 우리 등을 토닥거려 주는 것 같아서 또다른 용기와 소망을 주는 분이다. 이 세상에는 히스토리만 있는 게 아니다. ‘허스토리’(HerStory)도 있다”며 이병복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병복 구술채록 ‘우리가 이래서 사는가 보다’는 여성 원로의 삶과 이야기를 기록하는 여성생애사 구출채록 총서 중 첫 번째로 발간된 저서다.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출판부에서 발행된 ‘우리가 이래서 사는가 보다’는 8월 15일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