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침묵의 시선’ 가해자에게 사과 받지 못하는 상황이 한국과 데칼코마니처럼 겹치는 이유
[칼럼] ‘침묵의 시선’ 가해자에게 사과 받지 못하는 상황이 한국과 데칼코마니처럼 겹치는 이유
  • 박정환 칼럼니스트
  • 승인 2015.09.01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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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을 강에 던지는 바람에 강에서 잡은 고기는 안 먹어

인도네시아 발리와 우리나라의 제주도가 공통점이 있다면? 아름다운 풍광? 감탄할 만한 아름다운 경치도 공통점이기는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이 두 지역을 역사라는 프리즘으로 들여다보면 ‘피의 역사’가 도사리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제주도는 ‘제주 4.3 사건’, 발리는 강물이 사람의 피로 도배된 나머지 사람들이 강의 생선을 잡아먹지 않을 정도로 제주도와 발리라는 두 땅은 피비린내 나는 비극이 아름다운 경치 뒤에 숨어있다.

▲ ‘침묵의 시선'의 한 장면

영화 ‘침묵의 시선’을 기술하기 전에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인 사실을 먼저 다루는 것이 독자의 이해도를 높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20세기는 이전 세기에선 볼 수 없는 ‘인간 도륙의 세기’라고 해도 빈 말이 아니다. 6백만 명의 유태인이 가스실에서 죽어간 건 몸서리치기 쉬워도 스탈린 치하에서 몇 천만 명이 죽어나갔다는 사실은 잘 모를 수 있다. 몇 천만 명이 죽어간 사실도 제대로 모르는데, 하물며 백만 명의 사람이 죽어간 사건을 기억하기 쉽겠는가.

후투족과 투치족의 충돌로 백만 명이 죽어간 검은 대륙의 비극이 일어나기 전부터 아시아에서는 굵직한 여러 학살 사건이 있는데, 영화의 배경이 되는 학살은 인도네시아 수하르토가 정권을 잡으면서부터 비롯되는 대학살이다. 1965년 수하르토가 집권할 때 그의 군부 통치를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 수하르토의 군사 집권을 반대하는 세력 가운데에는 공산당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수하르토 정권은 ‘공산당 척결’을 기치로 공산당은 물론이고, 자신의 군사 독재 집권을 반대하는 세력을 공산당이라는 매카시즘으로 포장하고는 백만 명 가량 도륙하는 대학살을 자행한다. 수하르토 당시 자행된 대학살은 인도네시아라는 지정학적 자장에만 머물렀다면 그나마 다행이었을 텐데, 십 년 후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가 집권하면서 캄보디아를 피로 물들인 대학살, 이십 구년 후에는 르완다 내전으로 단 사흘 동안 백만 명 가량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참사로 이어진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유의사항이 있다. 우리네 표현 가운데 “때린 놈은 다리를 못 뻗고 자도 맞은 놈은 다리를 뻗고 잔다”는 말이 불변하는 진리임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절대로 보면 안 된다. 1965년 당시 피해자는 등과 어깨에 칼을 맞고도 살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공산당 척결을 기치로 내건 군부 독재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집으로 도망친 피해자를 악착같이 찾아내서 배를 가르고 내장을 끄집어낸다.

▲ ‘침묵의 시선'의 한 장면

1965년에 죽어간 형을 대신하여 피해자의 동생은 당시 학살에 가담한 가해자를 찾아간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답변은 “미안하다”는 사과가 아니었다. 이미 지난 과거를 왜 들쑤시느냐는 핀잔이 돌아왔다. “때린 놈은 다리를 뻗고 자도 맞은 놈은 다리를 못 뻗고 자는” 아이러니가 지배한다.

한 술 더 떠 피해자의 어머니는 억울하게 죽어간 형의 죽음을 가해자를 찾아다니며 묻고 다니는 작은 아들에게 더 이상 가해자를 찾아다니지 말라고까지 이야기한다. 가해자가 납치나 폭행을 사주하는 등 얼마든지 해코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에, 작은 아들마저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아들이 잘못된 다음부터 이빨이 하나씩 빠지기 시작해서 지금은 단 두 개의 이빨만 남았다고 한다. 아들의 잘못된 죽음이 아버지의 육체마저 잔인하게 유린하고 훼손했다.

가해자에게 사과를 받아도 모자랄 판에 물리적인 해코지를 두려워해야 하는 상황이 정상적인 상황인가? 백이면 백, 모두 아니라고 할 테지만 인도네시아는 당시 군부 세력을 지지했던 이들 가해자들이 투표로 합법적인 권력을 얻는 ‘권력의 상위층’으로 부와 권세 모두를 누리는 아이러니가 지배하는 땅이 되고 말았다.

‘침묵의 시선’을 볼 때 필자는 이상하게도 이 비극이 인도네시아에만 국한하지 않는다는 걸 영화 상영 30분이 채 되지 않아서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영화를 보며 우리의 상황과 연관시키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기에 말이다. 해방이라는 기쁨을 맞이할 때 우리는 친일파를 청산했어야 마땅했다.

▲ ‘침묵의 시선'의 한 장면

하지만 그 작업을 원활하게 청산하지 못한 탓에 친일파는 지금도 인도네시아의 가해자처럼 부와 권세를 누리며 지금도 한국 땅에서 떵떵거리며 산다. 이완용의 땅 475만 평 중 국가로 환수된 땅이 불과 3천 3백 평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올해로 우리나라가 해방 70주년을 맞았다고 하지만 친일 청산의 작업은 우리 땅에서 반세기를 넘어서도 너무나도 요원한 작업임을 보여주는 디스토피아적 절망의 리트머스가 아닐 수 없다.

친일파 혹은 가해자의 영향력이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경제 정치적인 상황을 쥐락펴락하는 디스토피아를 ‘침묵의 시선’을 보는 가운데 발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인도네시아의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사과는커녕 해코지를 두려워해야 하는 ‘침묵의 시선’ 속 상황이, 이완용이라는 대표적 친일파의 땅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 와서도 0.1%도 환수되지 않은 우리네 상황과 정확하게 겹쳐 보이는 끔찍한 데칼코마니를 보여주고 있기에 말이다.

참고로 이 영화는 ‘액트 오브 킬링’과 쌍생아 같은 영화라, 이 영화를 관람하기 전이나 후에 ‘액트 오브 킬링’을 볼 것을 권한다. 9월 3일 개봉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