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키 큰 세 여자’ 퀴블러 로스로 보는 카르페 디엠
[칼럼] ‘키 큰 세 여자’ 퀴블러 로스로 보는 카르페 디엠
  • 박정환 칼럼니스트
  • 승인 2015.10.04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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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을 함부로 뽐내면 안 된다는 메시지 내포하는 연극

중세시대만 해도 사람들은 죽음을 자연 현상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페스트와 같은 대재앙 앞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상황 가운데서 사람들은 죽음이 노년에게만 찾아오는 현상이 아니라 누구에게든지 찾아올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점을 잊지 않고 있었다.

▲ ‘키 큰 세 여자’중 한 장면 (사진제공=국립극단)

하지만 페스트의 광풍이 지난 다음부터 사람들은 죽음을 ‘격리’하기 시작했다. 죽을 병에 걸리거나 노년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죽음은 앞으로 한참 뒤에나 있을 현상으로 치부하고 격리하기 시작한 게다. ‘키 큰 세 여자’ 속 C도 마찬가지다. 노년의 A가 죽음과 맞닥뜨리는 건 A가 아흔을 넘긴 고령 때문이지, 26살의 C에게는 먼 훗날에 닥칠 일이라 A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시니컬한 태도로 A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다.

2막에서 C는 자신이 걷게 될 인생 선택의 폭이 다양하게 넓다는 점을 A와 B에게 자랑하기 시작한다. 꿈 많은 20대 중반의 C가 죽음은 저 멀리 있다는 듯, A와 B처럼 인생을 살지 않겠다고 뽐내는 태도는 ‘세 여자의 아리랑 꽃’에서 20대 여성이 당찬 여자를 표방하며 자신이 걷게 될 인생길을 자랑하는 태도와 궤를 함께 한다. 참고로 B는 A를 돌보는 50대 중년 여성이다.

하지만 C의 당당한 태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C가 비웃던 A와 B에게 서서히 동화되기 시작한다. C의 당당한 태도에 대해 A와 B는 자신들도 젊은 시절에는 C처럼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시간이라는 괴물은 A와 B가 젊었을 때 품었던 인생 항로대로 인생의 길을 열어주지 않았음을 C에게 설파하고, 이런 A와 B의 태도에 C의 당당함, 혹은 인생의 계획은 부식되기 시작한다.

죽음을 눈앞에 둔 A와 중년의 B, 그리고 인생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C라는 세 인물을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눈으로 보면 어떨까. 퀴블러 로스는 죽음에 맞닥뜨린 사람들이 갖는 5가지 단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키 큰 세 여자’중 한 장면 (사진제공=국립극단)

첫째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바람이다. 둘째는 죽음을 맞이하는 자신의 처지에 ‘분노’하지만, 셋째는 죽음과 ‘타협’하고자 한다., 넷째는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단계에 이른다. 이것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언급한 ‘죽음의 5단계’다.

죽음의 5단계로 A와 B, C를 본다면 가장 젊은 C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하는 1단계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앞으로 살 날이 창창한데 무슨 얼토당토않은 죽음이냐며 죽음을 인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인생이 단맛보다는 쓴맛이 더 크다는 걸 깨닫는 중년의 B는 죽음을 부정하지 않고 죽음과 일정 부분 ‘타협’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인생이 자기가 계획했던 것처럼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죽음은 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얼마든지 엄습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되면서부터 죽음을 부정하지 못하고 죽음과 일정 부분 타협할 수 있는 3단계에 포함하는 인물이다.

마지막 A는 마침내 죽음을 인정하는 ‘수용’, 5단계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죽음이 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A의 육신을 마음대로 유린하고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않고 죽음을 받아들일 줄 아는 수용적인 인물이라는 이야기다.

▲ ‘키 큰 세 여자’중 한 장면 (사진제공=국립극단)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죽음의 5단계로 ‘키 큰 세 여자’를 보면, 죽음은 나이대를 구분하지 않고 얼마든지 그 어느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불청객이라는 점을 간파할 수 있다. 그렇다고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는 불청객인 죽음에 벌벌 떨며 생의 즐거움을 깎아가며 살 수는 없지 않는가.

‘키 큰 세 여자’는 죽음이 연령을 불문하고 불시에 찾아올 수 있는 불청객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넘어서서 현재를 즐겨야 한다는 ‘카르페 디엠’을 되새겨 주는 연극이 아닐까 싶다. 죽음이라는 불청객이 우리 생에 찾아온다면 현재의 유예된 행복은 미래에서는 찾을 수 없기에, 행복을 미래에 맞추지 말고 현재에서 찾아야 한다는 가르침의 메시지를 연극 가운데서 읽을 수 있다.

‘키 큰 세 여자’는 10월 25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관객을 맞이한다.
R석 50,000원/S석 35,000원/A석 20,000원. 만 16세 이상 관람가.
평일(월,수,목,금): 오후 8시 / 토,일,공휴일(10/3, 10/9): 오후 3시 / 화 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