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투오넬라의 백조’ 팔루스의 구원자, 그대 이름은 백조이니
[칼럼]‘투오넬라의 백조’ 팔루스의 구원자, 그대 이름은 백조이니
  • 박정환 칼럼니스트
  • 승인 2015.10.25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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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 변신의 귀재이자 동시에 생명 존중 사상의 메시지도 지녀

‘투오넬라의 백조’는 핀란드 설화에 빚졌으면서도 설화를 그대로 이야기 구조로 옮긴 무용아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싶다. 부분 부분 설화의 이미지와 텍스트를 차용했을 따름이지, 무용 비평가나 관객이 얼마든지 다른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열린 공연이라는 의미다.

▲ ‘투오넬라의 백조’의 한 장면 (사진제공=예술의전당)

필자는 ‘투오넬라의 백조’를 한 마디로 요약할 때 ‘남성성의 패배’로 보고 싶었다. 이제부터 그 이유를 기술하도록 하겠다. 투오넬라의 백조는 황천의 백조이기는 하지만 누군가에게 원한을 질 만한 미움 살만한 짓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말리지 못하는 게 남자의 공격성인 듯,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흑조에서 백조로 갓 변한 투오넬라의 백조를 포획하고는 목을 휙 돌려 죽여 버리고 만다. 남자의 사냥 본능이 애꿎은 백조를 사냥한 셈이다. 백조를 살해한 남자를 핀란드의 설화로 본다면 그는 투오넬라의 백조를 사냥하려 드는 ‘레민카이넨’이라는 인물일 것이다.

하지만 투오넬라의 백조는 죽음에만 머물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영웅 신화에서 영웅이나 신이 죽음을 맞이했다가 다시 살아나면 이전에는 없던 능력이나 초월적인 힘이 자리하는 경우를 보는 경우가 많다. 오시리스와 디오니소스, 아도니스와 같은 신들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투오넬라의 백조 역시 죽음을 극복하고 다시 살아나서는 다양한 이미지의 오브제로 무용 가운데서 표현된다. 무용수의 팔과 종아리는 백조의 날개가 되거나 다리가 되기도 하는 등으로 무용수의 신체 일부가 백조로 환원된다.

▲ ‘투오넬라의 백조’의 한 장면 (사진제공=예술의전당)

이는 백조가 남자 혹은 여자의 모습으로 얼마든지 재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하나의 육체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육체로도 얼마든지 변신하여 현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오브제적 연출로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투오넬라의 백조를 노리는 남자의 공격성은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무용수가 다가 아니다. 화살로 표현되는 남자의 공격성은, 남자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았음에도 투오넬라의 백조의 목숨을 노리는 레민카이넨의 집요함으로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집요하게 투오넬라의 백조의 생명을 노리던 남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그물망에 포획당해 꼼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황천의 백조를 죽이려고 득달하는 남자의 공격성이 무력화하는 순간이자 동시에 생명을 노략질하는 남자에게 인식의 전환이 발생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 ‘투오넬라의 백조’의 한 장면 (사진제공=예술의전당)

왜일까. 남자는 백조를 끊임없이 죽이고자 하는 공격성에만 경도된 이였다. 하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그물망 안에서의 성찰을 통해 그는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고는 그물망 안에서 잉태된 아이가 다시 숨을 술 수 있게 하기 위해 인공호흡까지 할 정도로 생명성에 눈을 뜨게 된다. 그동안 누군가의 생명을 노략질하고 취하기만 했던 남자가 생명의 소중함을 뒤늦게나마 깨닫는 인식의 전환이 이뤄진다는 이야기다.

투오넬라의 백조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남으로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고정된 형태의 육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변신의 이미지를 가지면서 동시에, 사냥꾼인 남자로 하여금 생명의 살상이 다가 아니라 생명이 얼마만큼 소중한가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인식의 전환도 가능하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한다. 남자의 공격성을 무마시킬 줄 아는 백조의 현명함이라니, 명계의 백조가 사고의 전환까지 촉발하는 촉매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음을 읽을 수 있는 공연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