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동학(東學)과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
[특별기고]동학(東學)과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
  • 심우성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민속사학자
  • 승인 2016.01.22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심우성 민속사학자/전 한예종 교수

아호!
오늘의 젊은이들은 「동학」이 무엇인가? 그의 내용을 살피는데 관심이 거의 없다. 스승님 선배님들께서 알려주신 「깨우침」과 다양한 문헌자료(文獻資料) 등을 알리기 위해 이 글을 쓴다.

「동학혁명」의 불길」 

1894년 2월 15일, 전라도 고부군민들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항거,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 1854~1895)의 영도 하에 항쟁이 시작됐다.

원인으로서는 19세기 중엽부터의 삼정(三政)의 문란과 흉년으로 불긴은 만석보(萬石洑)를 파괴하고 관아를 습격 점령하자 점차 농민전쟁의 성격을 띠게 돼 4월 26일 백산(白山)에 집결하여, ① 사람을 죽이지 말고 재물을 손상 시키지 말 것.② 충효를 다해 제세 안민할 것③ 왜이(倭夷)를 축멸하여 성도(聖道)를 밝힐 것. ④ 병(兵)을 몰아 서울로 들어가 권귀(權貴)를 진멸할 것 등의 4대강령을 선포했다.

▲1894년 12월 28일 전봉준은 전라도 순창에서 피체, 서울로 압송되어 다음해 4월23일 처형, 효수됐다.

6월 1일에는 전주성(全州成)을 점령했으나 6월 5일 조정이 요청한 청국군 1,500여 명이 인천에 도착하자 6월 12일 관군과의 협상으로 자진 해산했다. 이 동학 형명은 ‘청일전쟁’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 

▲전봉준(1854-1895)은 전라도 순창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돼 다음해 4월 23일 처형, 효수됐다.

1894년 12월 28일 ‘전봉준’은 전라도 순청에서 피체, 서울로 압송돼 다음해 4월 23일 처형, 효수 됐다. 

『동학의 노래』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은새야
녹두 잎이 까닥하면
너 죽을 줄 왜 모르니

가보세 가보세 
을미년 일미적
병신되면 못 가보리 
(동귀일체 p.163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전봉준 (全琫準 1854(철종5) ~ 1895(고종 32)은 동학혁명(東學革命)의 지도자, 초명 명숙(明淑), 별명 녹두장군(綠豆將軍),창혁(彰赫)의 아드님. 전라북도 태인(泰仁)출신.

아버지가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된 후부터 사회개혁에 대한 뜻을 품게 됐다. 30세 경 동학에 입문하여 고부접주(古阜接主)가 되고 각지를 다니며 동지를 규합한다. 한편 은거중인 대원군(大院君)과 접촉해 국정개혁에 대한 의견을 교환 했다. 

▲동학 2대교주 최시형(1827년~1898년) 동학혁명 후기 북접(北接) 10만 병력을 이끌고 공주에서 싸웠으나 참패,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붙잡혀 처형됐다.

1892년 조병갑(趙秉甲)이 고부군수(古阜郡守)로 부임, 과분한 세금을 징수하고 근거 없는 죄명을 씌워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못된 짓을 자쟁하던 중, 수세(水洗)를 많이 거두어들이기 위하여 만석보(萬石洑) 밑에 다시 보(洑)를 축소, 불법으로 수세(水洗)를 징수하자 농민대표와 함께 그의 시정을 진정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힘에 의한 응징을 결심, 이듬해 1월 농민과 도학교도를 이끌고 궐기, 관아를 습격하여 강탈되었던 세곡을 농민에게 반환하고 부패한 이속(吏屬)들을 감금했다.

이 보고를 받은 정부에서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를 안학사로 보내어 선처를 확약하자 일반 농민군을 해산,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으나 「이용태」 역시 탐욕이 심한 위에 농민군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처벌을 강행했다.

이에 재봉기를 결의, 이 기회에 국가정치와 사회제도의 전면 개혁을 단행하고 보국안민의 동학사상을 펼 뜻을 굳혔다.

이 해 3월 동지 정익서(鄭益瑞), 김도삼(金道三) 등과 합의하여 동학의 조직을 이용, 동학교도를 주도세력으로 하고 농민대중의 호응을 얻어 진용을 정비한 후 고부의 백산(白山)을 근거로 8천여의 병력으로 대오(隊伍)를 편성, 동도대장(東徒大將)이 돼 척왜(斥倭)·척양(斥洋), 부패한 지배계급의 타파 등 사대강령(四大綱領)을 내세우고 부근의 군읍(郡邑)으로 진격, 관군(官軍)을 무찔렀다.

▲동학교주 최제우(1824년~1864). 사도난정(邪道亂政)의 죄로 대구에서 처형되고 1907년 신원(伸寃)됐다.

중앙에서 관군을 이끌고 온 양호(兩湖)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을 황토현(黃土峴)에서 대파하고 이어 부안(扶安)·정읍(井邑)·고창(高敞)·무장(茂長) 등을 장악, 4월 28일에는 전주(全州)를 점령했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淸軍)이 오고 동시에 천진조약(天津條約)을 빙자해 일본군도 입국해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탐관의 응징, 시정(施政)의 개혁, 노비의 해방 등 12개 종목의 실현을 확약 받고 일단 선유(宣諭)에 응하기로 결정해 휴전을 성립시켰다.

그 후 20여명의 간부를 인솔, 각지로 다니며 교도를 격려하고 집강소(執綱所)를 전국에 설치하는 등 조직 강화에 힘쓰는 한편, 정부의 관헌들과 대등한 처지에서 시정을 감시하고 신임 관찰사 김학진(金鶴鎭)과 도정(道政)을 상의하는 등 강력한 권한을 차지했다.

그러자 부패한 지배계급의 근절과 본격적인 시정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재궐기를 계획하던 중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진전됨에 따라 조선에서의 침략행위를 더해 가는 일본의 흉계에 격분, 다시 봉기했다.

9월 삼례(參禮)에서 남도접주(南道接主)로 12만의 병력을 지휘, 북도 접주 손병희(孫秉熙)의 10만과 연합해 교주(敎主) 최시형(崔時亨)의 총 지휘하에 항일구국(抗日救國)의 기치를 들고 대일전(對日戰)을 시작했다.

한 때, 중부·남부의 전역과 함남·평남까지 항쟁의 규모가 확대됐고, 특히 이천(利川)·목천(木川)·공주(公州) 등지에서 혈전(血戰)을 벌였으나 우수한 무기와 조직적인 훈련을 받은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패배, 11월 ‘금구(金溝) 전투’를 최후로 분쇄되고 말았다.

이에 수명의 등지들과 순창(淳昌)에 되신, 재기를 도모 하다가 현상금을 탐낸 한신현(韓信賢) 등 지방민의 급습으로 피로리(避老里)에서 잡혀 서울로 압승(전봉준)되고 이듬 해 3월 사형되고 말았다.

「東學農民戰爭 文獻資料」

具良根· 「甲午農民戰爭 原因論」 1993.05.15. 아세아
오세윤· 「새야 새야 파랑새야」 2004.02.10. 글나무
채길순· 「새로 쓰는 동학개행 (Ⅰ)」 강원도, 충청도, 서울, 경기도 2012.09.10. 모시는 사람들
박맹수, 정선원· 「공주와 동학농민혁명」 2015.03.31. 모시는 사람들
金龍德, 金義煥, 崔東熙 「東學革命 全琫準」 1976.02.10. 동학출판
신용하· 「東學과 甲午農民戰爭硏究」 1993.11.05. 潮閣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