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호의 빼딱한 세상 바로보기]사진작가 허울 쓴 나쁜 인간들로 온 국토가 몸살을 앓는다.
[조문호의 빼딱한 세상 바로보기]사진작가 허울 쓴 나쁜 인간들로 온 국토가 몸살을 앓는다.
  • 조문호 사진가
  • 승인 2016.04.26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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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호 사진가

안산 대부도 절벽의 천연기념물인 수리부엉이 새끼를 찍겠다고 둥지 주변의 나무를 모조리 잘라내 서식지를 엉망으로 만들더니, 또 어떤 이들은 동강할미꽃을 찍겠다고 벼랑에 기어올라 할미꽃을 망가트린다는 연이은 소식들로 온 국민의 원성을 사고 있다.

봄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동강할미꽃 찾아, 서식지인 정선 귤암리로 몰려든다. 아름다운 꽃을 찍는 걸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일부 사진인의 잘못된 욕심들은 바위틈에서 자라는 꽃의 묵은 잎과 줄기를 없애거나, 이슬처럼 보이려 물까지 뿌려댄다. 동강할미꽃은 해가 떠올라 날씨가 따뜻해야 꽃이 피기 때문에, 핀 꽃에는 이슬이 맺힐 수 가 없다. 그리고 화면을 단순화하려 꽃을 감싼 마른풀을 뜯어내고 있는데, 생태사진은 꽃도 꽃이지만, 꽃의 습성이나 자연적인 주변 환경이 중요하다는 걸, 왜 모를까? 자연환경에 대한 보호의식은 물론, 야생화사진의 가치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으니 더 안타깝다.

매년 이 맘 때면 화엄사 매화나무를 찍으려 하루500여명이 몰려드는가 하면, 구례 산수유 같이 꽃피는 마을들이 사진인 들로 북적인다. 꽃구경이라면 모르겠으나, 똑 같은 사진을 찍어 다들 어디에 쓸까? 때로는 모델까지 동원해 영화촬영 하듯 몰려다니는 걸 보면 정말 가관이다. 이 모든 원인은 단 한가지다. ‘사진작가협회’에 입회하기 위한 공모전 출품사진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 단체에 들어가야 사진작가가 되는 줄 착각들 한다.

하기야 회원증에다 ‘사진작가증’이라 적어 놓았으니, 순진한 초보들이 속을 수밖에 없다.이제 전국회원 만 명에 가까운 공룡집단으로 성장해, 그 먹이사슬에 의해 초보 사진인 들이 희생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사진을 제대로 하는 사진가들이 그 단체에 소속되었다는 이야기를 아직 들어 보지 못했다. 80년대 중반 단체의 구태에 환멸을 느낀 사진학과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들이 탈퇴하므로 명실상부한 아마추어 단체로 남게 된 것이다.

회원들의 자질 향상을 위한 사진교육은 뒷전이고, 숱한 공모전 비리나 만들어내며, 회원증 장사와 감투 늘리기에 급급하더니, 이제 그 한계점에 달한 것 같다. 문제는 그 단체를 이끌어가는 주체들이 사진을 전공하지 않은 아마추어라는 점이다. 뭘 모르니 후진들을 제대로 지도할 수 없는 것이다.

지난 해 야생화사진의 대가라는 김정명씨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가 발표한 동강할미꽃은 마른풀이 제거되거나, 꽃잎에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심지어는 인공조명까지 사용해, 마치 스튜디오에서 찍은 것 같았다. 엉터리 사진들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발표하니, 너도 나도 그 짓을 따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대구에 사는 장국현씨는 제 작년 울진에서, 대왕송을 찍기 위해 주변의 금강송과 활엽수를 스무 다섯 그루나 베 낸 일도 있었다. 여론의 질책에도 자성은커녕, ‘예술의전당’에서 안 된다는 전시를 소송까지 걸어 열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무슨 대단한 예술을 하는지 모르지만, 인간으로서 기본이 되지 않은 몰염치들이다. 내가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다,

어디 그 뿐인가, 세월호의 원흉 유병헌도 사진한다며 국제적 망신을 시키지 않았더냐?
1983년에는 청산가리를 먹여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찍었던 희대의 살인마 이동식도 아마추어 사진인이었다. 취미 사진의 순수함이 이런 몰지각한 이들로 이름이 더럽혀 진 것이다. 사진이 돈 있는 자나 할 일 없는 건달들의 자기 과시욕으로 악용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진을 제대로 공부했거나, 전업으로 메 달리는 사진가들은 대부분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반평생을 사회기록에 매달려 온 나 역시, 남은 건 신용불량자란 딱지뿐이다. 이러나저러나 범법자이긴 마찬가지니 차라리 사진을 그만 두고 싶다. 더 이상 열심히 작업하는 선의의 사진가들을 욕되게 하지마라.

'동강 할미꽃' 할미야 할미야 벼랑에 핀 할미야 열길 높은 벼랑에 달려 누굴 그려 피었느냐 칼바람에 오무렸다 햇살에 얼굴 내미는 동강가에 할미야 죽은 울 엄마 그립게 하는 동강가에 할미야.

1983년 새해벽두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전국을 충격에 밀어 넣었다. 살아있는 여인에게 독약을 먹이고 죽어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이동식(당시 42세)의 범행수법은 경악을 넘어 공포 그 자체였다. 범행 3년여 만인 86년 6월 범인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수사착수부터 검거까지 전 과정에 직접 뛰어들었던 서기만 경위(전 남부경찰서 강력반장)의 마음은 여전히 무겁다. '죽음의 사진작가’에게 희생된 더 많은 피해자들의 한(恨)을 풀어주지 못한 탓이다.

지난 97년 12월 32년간의 경찰생활을 마감한 서 경위는 최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충격적인 비화를 털어놓았다. 범인 이동식이 무려 22명의 여성들을 무참하게 살해한 연쇄살인범이자 사이코패스라는 것이다. 경찰수사발표에는 이동식의 여죄 여부가 포함되지 않았었다. 공식적으로 드러난 그의 살인혐의는 단 한 건 뿐이라는 얘기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동식의 또 다른 범죄행각이 국가권력에 의해 묻혀버렸다는 점이다. 사건이 ‘해외토픽’ 등을 통해 외신을 타자 당국이 국가위신을 문제 삼아 수사 중단을 명령했다는 것이다.

범인이 사형당하고 20여년의 긴 시간이 지났지만 서 경위의 자책감은 여전하다. 밝혀지지 않은 희생자와 그 유족들 앞에 면목이 없다며 한숨을 쉬는 그. 1983년 1월 그곳에선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1983년 1월 14일 이동식은 내연관계였던 김모(당시 24세)여인에게 “누드사진을 찍어주겠다”며 경기도 시흥의 야산으로 유인, 독살했다. 그는 극약을 먹고 괴로워하는 김 여인의 모습을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았다. 여인의 숨이 끊어지자 이동식은 피해자의 옷을 모두 벗기고 누드촬영을 감행하기까지 했다. 김 여인의 마지막 순간은 총 21장의 사진으로 남았다.

당시 언론은 이동식을 ‘사탄의 사진작가’ ‘변태 사진작가’ 등으로 칭하며 대서특필했다. ‘시체 흉내’ 강요경찰발표와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동식은 경력 7년의 아마추어 사진작가였다. 모 사진작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몇 차례 입상경력도 있는 그는 주로 여인의 누드를 찍었다. 월 27만원 정도를 버는 보일러 배관공으로 일했지만 당시 시가 150만원이 넘는 고급 카메라를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작품 욕심이 많았다.

“이게 당시 이동식 집에서 압수한 사진들입니다.”착잡한 표정의 서 경위는 기자에게 두툼한 서류봉투 두 개를 내밀었다. 낡은 봉투를 열자 찍은 지 오래돼 보이는 사진 수백 장이 쏟아져 나왔다. 사진 속엔 차마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여인의 나체가 한 가득 펼쳐져 있었다. 짙은 화장에 긴 속눈썹을 붙인 미인이었지만 하나같이 시체를 연상케 하는 기괴한 포즈 탓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입가에 피를 쏟으며 하얀 천을 씌운 관 위에 엎드린 모습, 가슴에 과도가 꽂힌 채 피 범벅이 된 모습, 목을 매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혀를 빼 문 모습 등등 사진 속 여인은 살아있음에도 죽은 자의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죽음은 가장 극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이라며 살인과 시신 촬영을 감행한 이동식의 정신병적 집착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서 경위의 설명이다. “(사진 속 여인은)이동식의 두 번째 처입니다. 슬하에 아들 둘을 키우고 남편의 전처소생까지 품을 정도로 성실한 여자였지요. 지나치게 순진한 탓에 이런 변태적인 요구도 묵묵히 따를 만큼 순종한 게 흠이라면 흠일까.”부인을 상대로 한 이동식의 변태 행각은 상상을 초월했다. 부인의 체모를 모두 깨끗이 정리한 것은 기본이고 여성 중요부위에 이물질을 넣은 모습까지 사진으로 남겼다. 노골적인 성교장면을 기록한 사진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동식의 최대 관심사는 역시 죽음의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었다.

아내를 모델로 한 ‘연출된 죽음’에 식상함을 느낀 그가 진짜 희생양을 고른 것은 예고된 수순이나 다름없었다. 범행 나흘 뒤인 1월 18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김 여인의 시신이 덤불 속에서 발견됐다. 사건을 접수한 경찰은 500명이 넘는 피해자 주변 인물을 탐문한 끝에 이동식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서울 가락동 집을 급습, 그를 체포한 서 경위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피해자의 행적과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모두 종합했을 때 이동식은 가장 유력한 용의자 아니, 확실한 범인이었습니다. 문제는 결정적인 물증을 잡는 것이었지요.

특수절도와 횡령 등 전과 4범인 녀석은 한마디로 거짓말에는 도가 튼 범죄꾼이었습니다. 순순히 살인을 인정할 리 없었지요.”이동식의 집과 일터인 보일러 가게를 압수수색하며 형사들은 결정적인 단서이자 충격적인 물증을 잡을 수 있었다. 바로 숨진 김 여인의 사진과 이동식의 일기장이었다. 범인이 아내를 모델로 찍은 수백 장의 음란 사진도 고스란히 확보됐다.

사진학계 최고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홍순택 당시 신구대 교수의 증언도 한 몫 했다. 시간 순으로 나열한 21장의 사진에서 홍 교수는 “1~16번 사진까지는 김 여인의 생전 모습이며 이후 사진은 숨진 상태”라고 분석한 것이다.충격적인 진실은 속속 드러났지만 사건은 끝난 게 아니었다. 얼굴색하나 바뀌지 않고 “모르는 일”이라며 잡아떼는 범인을 옭아매려면 더 결정적인 증거가 필요했다. 바로 필름 원본이었다.

“피해자의 마지막을 담은 사진 만큼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명확한 살인혐의를 입증하려면 사진의 원본, 그러니까 원판 필름을 꼭 찾아야 했습니다.”경찰 조사 내내 이동식은 일말의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듯 했다. 오늘날 흔히 ‘사이코패스’라 불리는 정신병질자의 전형이었다고 서 경위는 회상했다. 그런 범인과 나흘 동안 엄청난 신경전을 벌인 끝에 “숙직실 벽 합판을 뜯어보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이동식의 말대로 10cm 정도 두께의 숙직실 벽을 뜯자 숨겨둔 원판 필름이 수북하게 쏟아져 나왔다. ‘죽음의 사진작가’가 촬영한 회심 작, 그 원본이었다. 비밀수첩에…엽기적인 살인행각을 벌였지만 이동식은 연쇄살인범이 아니다. 적어도 경찰의 공식수사발표에 따르면 말이다.

그러나 서 경위는 그를 ‘희대의 연쇄살인범’으로 지목했다. 압수수색 과정에서 입수한 범인의 ‘비밀수첩’에 더욱 충격적인 범행이 기록돼 있다는 것이다.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이동식이 검거 직전까지 쓴 일기장이 있습니다. 그 일기를 보면 녀석이 또 다른 살인을 저질렀다는 걸 짐작할 수 있지요. 이걸 토대로 여죄를 추궁하니 역시 자백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검찰에 송치하기 직전까지 녀석이 내게 실토한 피해자가 무려 22명이나 됐지요. 김 여인 뿐 아니라 희생자가 21명이나 더 있다는 겁니다. 그 중엔 오랫동안 행방불명 상태였던 이동식의 전처도 포함됐습니다.

”서 경위에 따르면 문제의 수첩엔 뜻을 알 수 없는 시(詩)가 잔뜩 쓰여 있었다. 가족 등 다른 이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일종의 암호로 작성된 것이었다. 이 가운데는 희생자의 유해를 토막 냈음을 짐작하게 하는 문구도 있다고 서 경위는 조심스럽게 전했다. “처음엔 뜬 구름 잡는 시인 줄 알았는데 녀석과 이야기를 해보니 모두 자신의 살인계획을 정리해둔 것이었습니다. 다시 놈을 족쳐 나머지 희생자들의 유해라도 찾아야 했습니다.”특히 검거되기 10여 년 전 이혼한 전처 B여인의 생사 여부는 반드시 밝혀야 할 숙제였다. 혹시나 여동생이 험한 꼴을 당했을까 B여인의 오빠는 직접 수사팀을 찾아와 하소연하기도 했다.

마침내 이동식은 살해한 전 부인의 시신을 버린 곳을 서 경위에게 털어놓았다. “곧장 동료들과 함께 현장으로 뛰쳐나갔지요. 유해 발굴에 필요한 장비며 인력까지 싹 동원했는데 난데없는 복병이 나타난 겁니다.”깊은 한숨과 함께 서 경위는 말문을 이었다. 그 내용은 참으로 충격적이고 서글펐다.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해외토픽’으로 외신에 소개된 게 문제였습니다.

‘더 이상 나라망신 시킬 수 없다’며 사건을 빨리 종결하라는 상부의 명이 떨어진 거지요. 그나마 다행인 건 발굴 현장에서 시신이 안 나왔다는 겁니다. 이동식이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고 가능성은 많지만 더 이상 수사를 진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담당 수사팀 자체가 해체됐으니 말입니다

.”인터뷰 말미 서 경위는 착잡한 얼굴로 기자에게 무언가를 꺼내보였다. 열쇠고리에 매달린 손가락 한 마디만한 장식품이었다. 마치 사람의 귀를 잘라놓은 듯한 모양의 그것은 나무토막처럼 딱딱했다. “이동식이 검찰에 송치되기 직전 제게 준 겁니다. 월남에 전투부대로 파병됐을 때도 이걸 지니고 있어서 목숨을 부지했다더군요. ‘아주 귀한 것이니 잘 지니고 있으라’던 녀석의 목소리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혹시 이게 사람의 신체 일부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지나친 기우일까요?”

1982년 12월 14일 서울 금천구 호암산에서 24세 여성의 시신이 발견된다. 조사결과 사망자는 이발소 여종업원 김모씨로 밝혀진다. 발견 당시의 상태가, 일단은 독살로 추정되었으나 이상하게도 저항한 흔적이 전혀 없고, 시신이 옷을 벗고 바닥에 쓰러져 몸부림치다 죽었다는 것이다. 그럼 이 김씨는 굳이 산까지 올라가서 굳이 옷을 벗은 뒤 독약을 먹고 바닥에서 몸부림치다 죽었다는 괴상하기 짝이 없는 결과가 나온다.

이 사건의 범인은 전과4범으로, 복역 후 보일러공으로 살던 이동식(당시 42세)으로 출소후에 사진에 취미를 붙여 이것저것 사진을 찍으며 살았다고 한다. 의외로 사진에 재능이 있어서 한국사진작가협회의 회원이 되었고 전시회까지 열었을 정도였다. 그는 예전부터 죽음을 사진에 담고 싶어했다. 죽음을 가장 극적이고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생각했었고, 후처를 모델로 네크로필리아적인 요소가 담겨 있는 사진을 몇 번이나 찍었다.

그러나 연출된 죽음만으로는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어느 날 자신이 다니던 이발소의 면도사 겸 부업을 하는 김모씨에게 출세를 시켜주겠다며 누드 사진을 찍자고 한다. 김모씨가 수락하자 함께 산에 올라갔고, 옷을 벗기 전 김씨에게 추울테니 감기약을 주겠다면서 약을 건네준다. 그 약은 청산가리였다. 이씨는 독약을 먹은 김씨가 땅바닥에 쓰러져 죽어가며 몸부림치는 모습을 21장이나 사진으로 찍었다. 죽어가면서도 옷을 벗기면서 계속 사진을 찍었으며 죽은 후에도 계속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검거 후 재판을 거쳐 범인 이동식은 사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