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 나인티9 무용단의 ‘침묵’에서 본 예술가의 현실인식
[이근수의 무용평론] 나인티9 무용단의 ‘침묵’에서 본 예술가의 현실인식
  •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16.12.01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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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나인티9 무용단(장혜림)의 ‘침묵’공연(11.18~19, 대학로예술소극장)을 보고난 후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를 찾아 읽었다. 독일로 망명한 루마니아 태생 여류작가의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으로 공연의 모티브를 제공해준 소설이다.

<숨그네>란 특이한 제목은 숨(breathing)과 그네(swing)의 합성어다. 그네의 진동처럼 규칙적으로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는 숨쉬기의 뜻이라면 이는 목숨과도 통하는 말일 것이다. 어떠한 악조건 하에서도 끝까지 살아남고 마는 생명의 끈질김을 2차 대전 중 루마니아에서 러시아 강제노역장으로 끌려간 17세 소년 레오의 회고담으로 풀어간 이야기였다. 

‘침묵’은 아프리카 말라위 출신의 흑인소녀 엘라로 화자(話者)를 바꾸었다. 그녀는 노래하기를 좋아하고 아프리카 대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소프라노가수다.

전쟁, 독재정치, 인종차별, 경제난 등 외부환경에 영향 받는 슬픔과 아픔, 두려움 등 개인의 상처는 공통적이다. 시간과 공간은 바뀌지만 고통 속에 침묵하는 인간의 조건은 동일하다는 것이 작품의 주제가 된다.

어두움 속에서 독백으로 들려주는 엘라의 내면을 여성무용수 다섯(손가빈, 연은주, 이민주, 유현정, 장서이)이 춤으로 풀어간다. 춤은 침묵의 예술이다. 기차의 짐칸에 실려 미지의 곳으로 옮겨지고 있는 그들은 ‘Yes’라는 말 밖에는 토해낼 줄 모른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열차 안에서 그들은 이미 지쳐버린 노예들인 것이다. 추위와 배고픔에 겹쳐진 불안감속에 표정은 비탄에 젖고 유형지에서 죽어갈 운명을 예감하는 듯 몸짓은 절망적이다.

기차가 멈춘다. 인적 없는 외딴 곳, 무릎까지 눈 쌓인 설원가운데서 열차 문이 열리고 잠시 동안이 휴식이 주어진다.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지만 이 짧은 시간의 자유가 그들에겐 소중하다.

설원에서의 춤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를 구성한다. 무대가득 수북이 쌓인 플라스틱 알갱이가 눈을 대신한다. 플라스틱더미를 헤치며 흐느적거리며 걷는 느린 춤사위가 눈 속을 헤매는듯하고 바람에 불려 날리는 알갱이들이 휘날리는 눈송이를 연상케 한다.

여인들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노래가 흘러나온다. “숲에는 대나무 꽃피고/도랑에는 아직 눈 쌓여 있는데/당신이 보내온 짧은 편지/가슴이 저리네”. 1부가 전반적으로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임에 비해 2부에선 시적인 정서가 살아나고 무대요소들이 작품의 주제를 잘 받쳐준다. 상체부위에 밧줄에 묶인 듯한 성민경의 황토색 의상은 노예의 신분을 암시한다.

피아노와 기타, 클라리넷이 연주하는 슬픈 음악이 안개처럼 낮게 깔리고 희미함을 주조로 하는 김건영의 조명과 어울리며 서정적인 풍경을 연출해준다. 강제수용소에서의 고통스러운 일상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음에도 무용수들의 춤은 원작이 전해주는 시정(詩情)을 무대 위에서 성공적으로 구현해낸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시종일관 놓치지 않고 따라가는 작품의 주제의식이다. 장혜림은 ‘침묵’이 ‘숨그네’(2015), ‘심연’(2016)과 함께 영혼을 어루만지는 나인티9(Ninety Nine)의 춤 <1 ounce, 28.4g>의 레퍼토리를 구성하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첫 작품인 ‘숨그네’가 추위와 배고픔에 기인하는 육신의 고통을 표현하고자 했다면 두 번 째인 ‘심연’의 주제는 소중한 것을 잃고 울부짖는 비탄과 상실감일 것이다.

‘침묵’의 텍스트(이주희)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아우른다.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침묵하며 기차와 함께 인생의 끝을 달리는” 포로들의 절망을 1부(기차, 포로들의 춤)에서 보여준 후 “잔인하리만큼 고요한 밤의 침묵사이로 불어오는 차디찬 바람이 죽어있던 영혼을 깨우고 긴 침묵을 깨는 노래를 조심스레 불러보는”희망을 2부(설원, 자유의 노래)에서 일깨워주는 것이다.

달리는 열차의 10개 차창의 불빛과 먼동이 터오듯 밝아지는 산 너머 광채는 이러한 이미지를 연속시키는 김종석의 감각적인 무대미술일 것이다. 나인티나인(99)을 완성시키는 1%는 무용가의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이 1%의 영감을 관객과 소통하기 위해 그들은 99%의 땀을 흘린다.

영감을 상징화할 수 있는  땀이 있기에 예술은 소중하고 고귀한 것이다. ‘침묵’은 ‘공연예술창작산실 우수신작 릴레이공연’(11.17~12.9)에 선정된 8개 무용작품 중 하나지만 문화예술위원회가 지원하는 창작산실사업을 가치 있게 만든 2016년 최고의 수확이라고 평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