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남조 시인“영겁의 시간이 내게 주어질 때까지 현역이고 싶다”
[인터뷰] 김남조 시인“영겁의 시간이 내게 주어질 때까지 현역이고 싶다”
  • 인터뷰 이은영 편집국장/정리 사진 정영신 기자
  • 승인 2016.12.0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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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공부한 적 없어, 절박한 것과 시대적 산물이고 시대가 내게 목소리 줘"

세상이 아무리 풍요로워도 우리는 늘 영혼의 배고픔이 있다. 때로는 사람끼리 만나 그 굶주림을 서로 부딪쳐가며 우정을 키우기도 하지만 말이다. 생쌀에 서정(抒情)이라는 물을 부어 밥을 짓는 것처럼, 시인은 영혼이 배고픈 사람을 위해 식탁을 차리는 사람이다. 

시국만큼이나 무겁고 차가운 기운이 무겁게 사방을 깔고 앉아있는 오후에 효창동에 있는 문화예술 공간 ‘예술의 기쁨’에서 김남조 시인과 가을과 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평생을 독서와 사색으로 자기성찰에 전념해온 선생의 인품이 느껴졌다. 

▲ 인터뷰에 응하는 김남조 시인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모두가 한권의 책이고 보물창고라고 한다. 인간의 삶을 더듬어 실을 뽑듯, 언어를 뽑아서 시를 짓는게 선생의 일일게다.

우리 기자 일행이 예술의 기쁨을 찾았을 때 선생은 얼마전 영인문학관에서 열리고 있는 선생의 시인생 70년 전시의 일환으로 마련된 강연(10월22일)의 동영상을 진지하게 보고 계셨다.

인터뷰에 앞서 선생은 그 영상을 후대에게 하나의 자료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꼼꼼히 내용과 편집의 수정을 가했다. 그가 자료와 기록에 대한 역사성에 대해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 것인지를 영인문학관 전시에서도 느낄 수 있었지만 다시 한 번 그 현장에서 귀한 역사의 한 장면을 포착하게 됐다.

이날 인터뷰는 영인문학관에서 강연 내용을 중심으로 선생이 시와 함께한 70년 삶의 조각조각의 흔적과 삶과 신앙 그에 더 고양된 사랑에 관한 소소하고도 숭고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다. 


시인생 70년을 맞으셨다. 현재 영인문학관에서 이를 기념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소회가 각별하실 것 같다.

난 태어나서 좋았다고, 살게 되서 좋았다고, 오래 살아서 좋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번기념전도 나를 위한 모임이라고 생각하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동안 팔순 때 출판기념회를 열었을 뿐이고, 90이 됐으니까 뭘 하자는 후배와 제자들에게도 내년에 하자고 했는데 영인문학관에서 자리를 마련해주어 송구스럽고 과분했다. 이어령, 강인숙 부부에게 한없이 고마울 뿐이다.

오랜 친분이 있는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 “김남조선생은 모든 젊은이의 마음속에 마돈나이자 사랑의 대상, 낭만의 대상이었다. 이제는 모든 삶의 고비를 지나 하나의 불처럼, 잘 성숙한 하나의 발효제처럼 날이 갈수록 시의 진미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준다." 는 찬사까지 해주었다. 내가 한 평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최고의 중대사는 삶이다. 나는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좋아해 그 삶으로 살아갈 것이다.

‘신앙과 사랑, 사람으로 세상 끝날 때까지 희망을 노래하리라’ 전시회 기간 중인 지난 달에 영인문학관에서 선생님의 특별강연이 있으셨는데 그 날 가장 강조하셨던 말씀으로 들었다. 좀 더 자세한 말씀을 들려달라.

나는 평생 서정시를 써온 사람이다. 인생은 결코 짧지 않더라. 인생이 덧없어 순식간이라고 하는데 세월은 그냥 가지 않고 늘 발자국을 남기면서 떠나가더라. 시는 나보다 더 크고 강하고, 나보다 항상 앞에 가 있더라. 이 세상 끝날 때까지 희망을 노래하는 노병이 되어 삶을 살고 싶다.

이번 전시에서 강인숙 영인문학관장님께서 선생님이 6.25 전란 이후에 쓰셨던 '목숨'이란 시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셨다. 시가 가진 힘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작품일 뿐만 아니라 그 시를 쓰시게된 배경도 상당히 의미심장했다. 시에 배경이 된 얘기를 듣고 싶다.

'목숨'이라는 시는 시대적 산물이다. 시대 상황이 나를 눈뜨게 하고 거대한 민족적 비극, 참담함이 나를 일깨워준 내 마음의 소리였다. 그 당시 <목숨>이란 시집은 제판에 이어 3판까지 나갔다. 시대가 스승이었고, 역사적 사건들이 시를 쓰도록 마음을 움직였다. <목숨>이라는 시집이 1953년에 발행되었으니 지금으로부터 67년전에 쓰여진 시다. 시집 <목숨>은 해방 이후 등단한 여성 시인의 첫시집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시라는 뿌리가 있었다. 반만년 유구한 세월에 매미처럼 목태우다 태우다 끝내 헛되이 순절한 우리모두 선천에 벌받는 족속이라도 그렇게 아픈 현실이면 그만 됐다, 이대로 끝나는  그것을 토대로 해서 돌멩이처럼 흔하게 구르더라도 죽지 않은 목숨을 갖고 싶었다. 우리민족이 5천년역사의 아픔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일제강점기를 지나고 6.25를 당하고 그 유구한 세월의 바탕에서 그 시가 나왔다. 내가 쓴것이라기 보다는 시대가 준 나의 축적물을 썼다.

작가이기 전에 내게 작품을 낳게 한 것은 우리시대의 상황이고 큰 의미에서는 나에게 선물같이 상속으로 전해줘 쓰게 되었다. 한 시대적 정신이 여러 시인을 만들었고, 음악을 만들었고 예술가가 아니라도 그때 그때 사람을 키워주고 어른이 되게 했다.

내가 썼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난 문학공부를 한 적이 없는데도 이 시대가 내게 선물처럼 마음을 열게 만들었다. 8.15해방은 내 일생에서 가장 큰 감동으로 지금도 남아있다. 절박한 것과 시대적 산물이고 시대가 내게 목소리를 주었다. 속에서 우러나오는 시대상황이 나를 눈뜨게 하고 거대한 민족적 비극 참담함 그것이 나를 일깨워주는 마음의 책이다. 시대가 스승이고 역사적 사건이 시를 쓰게 했다. 


아직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수 있는가/ 꼭 눈을 뽑힌 것처럼 불쌍한/사람과 가축과 신작로와 정든 장독까지

누구 가랑잎 아닌 사람이 없고/ 누구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고/ 불붙은 서울에서/ 금방 오무려 연꽃처럼 죽어갈 지구를 붙잡고/ 살면서 배운 가장 욕심없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반만년 유구한 세월에 가슴 틀어박고 매아미처럼 목태우다 태우다/ 끝내 헛되어 숨져간 이건/ 그 모두 하늘이 낸 선천(先天)의 벌족(罰族)이더라도

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그래도 죽지만 않는/ 그러한 목숨을 갖고 싶었습니다.

                                                                                   (시 '목숨' 전문)
                                                                                                                                                                        

▲ 김남조 시인은 지금도 꼼꼼함을 잃지 않고 있다

총 17권의 시집을 내신 걸로 아는데 70년 인생동안 내신 책치고는 조금 적지 않나 생각이 든다.(웃음) 그 외에 어떤 책들을 또 내셨나.

고등학교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특별히 문학을 배우지는 않고, 습작기를 거쳐 첫 시집‘목숨’을 1953년에 냈다. 시집은 17권 냈고, 수필집 12권, 윤동주 연구논문 등이 있다.
 
그 당시 여류시인들에 대해서도 썼다. 총40권정도 된다. 24회 동안 소설문학에 연재해 공들여서 쓴 꽁트집도 있다. 아무리 빛나는 문학적 업적도 한사람의 영원을 얻는 것을 다루지 못한다는 생각이다.

지난 번 강연 내용 중 막달라 마리아에게 질투심을 느끼셨다는 대목이 있었다. 독자들이 느끼기에 좀 흥미로울 수 있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여제자이자 성녀인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추종자가 되어 예수의 부활도 보았고, 거리에서 세 번이나 그리스도의 발에 향유를 바르고 죄를 회개한 여자다. 

8편의 시를 쓰는 편에 막달라 마리아가 갖고 있는 특별한 지위와 은총이나 거기에 대한 선망을 이야기했다. 시지프스라는 시를 4개 썼는데 3번째 쓴 시가 시지프스와 돌 사이의 특별한 혈연관계에 대해 썼다. 슬며시 굴리면 먼저와 기다리던 돌은 틀림없이 내려오리라는 것을 기다리는 복된 것이 나를 질투 나게 했다. 우리는 한번 이별하면 끝인데 이별하는 즉시 오작교다리를 놓고 정말 시지프스 못 봐주겠다는 표현을 쓰면서 질투심을 느꼈다. 

막달라 마리아는 성녀다. 어두운 곳에서 밝은 데로 나왔기 때문에 질투는 문학적 표현의 다양성을 위해 쓰여 졌다. 시를 통해서 예수와 가까워지고 싶다.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를 내 문학의 수은지로 삼은 것은 내 본명이 막달라마리아이기 때문이다. 남편이 성당을 다녔기 때문에  어렸을 적부터 믿었던 기독교에서 성당으로 옮겼다. 그래서 세레명도 막달라 마리아로 했다.  

그 이름에 끌린 것은 고통 때문이다. 고통을 통해서 영원은 정화된다. 고통에 빠져서 산패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위대한 영원은 그 위기를 잘 이겨내기도 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알면 알수록 매력 있는 여성이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막달라 마리아처럼 해야 한다. 예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본 여성도 막달라 마리아다. 

한 작품 한작품 모두가 소중하겠지만 선생님의 수 많은 작품 중에서 가장 애송하는 시를 꼽는다면

내가 좋아하는 ‘기도’라는 신앙시다. 

 

저의 기도는/ 아뢰이기 전에/ 밝히 살피시는 바/ 바로 그대로이나이다.
기도말의 처음은/ 나타못낼 찬미요/ 기도말의 끝은/ 안개밭에 엎드리는/ 어지러움이나이다/ 눈물이나이다
밤이슥히/ ‘아멘’이라 맺으면/ 명주실 한 올의/ 바람 이우나이다.

 

짝사랑이라는 시어에는 나 스스로를 낮추고 나의 가난함과 나의 외로움이 들어있다. 

짝사랑이나 상사병은 사랑이 심연 끝까지 내려가야 이해할 수 있다. 생손가락 하나 뽑아서 상대 호주머니 속에 넣어줄 줄 아는 자만이 상사병을 느낄 수 있다. 사랑에 대한 시중 내가 아끼는 시 ‘심장안의 사랑’이다.

 

사랑하나
내 심장 안에서 산다
착오로 방문한
우주의 여행자였으리

이 손님에게
나는
머무르라 했고
나 사는 동안
떠나지 말라고도 했다

그 다음엔
눈 내리듯 춥고
겸손한 소망 하나가
보호자 없이
태어났다.
 

지난 번 강연회 때 사랑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한 사람만이 아닌 ’복수‘의 사람을 강조하셔서 참석자들에게 웃음을 주셨다. 목숨이란 시가 나온 배경이 대학때 은사님과의 사랑이라고 들었다

평생을 못잊는 것이 아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면 내가 살아 있을 수가 없다. 날씨를 관측하는 기상학을 했기 때문에 6.25때 납치되었다. 소식이 없어 주소를 갖고 집으로 찾아갔는데 집에 없었다.

그는 내가 쓴 시를 가슴 안에 늘 넣고 다닌다며 나를 볼때마다 이야기했다. 가장 잊을 수 없는 추억은 눈 올 때 한강다리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면서 외투주머니 속에 내손을 넣고 걸었던 기억이다. 60년 전인데 그 기억만이 남아있고 다른 것은 기억에 없다.

지금까지 그 일을 가슴에 갖고 있으면 나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솔베이지노래처럼 방랑의 길을 떠난 주인공 페르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린 것처럼 60년여년 세월을 가슴에 넣어두었다면 나는 살수가 없었을 것이다. 공동운명같이 그런 상처들이 총알들어간 것처럼 가슴이 숭숭 뚫린 시대였다.

그때는 연락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군대간 아들이나 군용에 끌려가서 언제 돌아올지 몰라, 매일 서울역에 나가 기차에서 내리는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해보는 부모도 있었다. 그 당시 사랑 또한  역사만큼이나 슬픈 사랑을 했었다.

▲ 여전히 '현역 시인'임을 강조하는 김남조 시인

선생님의 인생에서 남편이신 김세중 조각가를 빼놓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고인이 돌아가신 후 김세중조각상을 제정해 해마다 시상을 하고 계신데 상의 배경을 말씀해 달라

2년 전만 해도 이곳은 우리가족이 살았던 집이었다. 수십 년간 살던 집을 김세중기념사업회에 기증해 이 터에, 지난해 ‘예술의 기쁨’이라는 복합문화공간을 만들었다. 광화문광장에 있는 이순신 동상을 조각한 김세중(1928~1986)이 내 남편이다.

지금도 이순신동상을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고 있는 사람이 많다고들 한다. 김세중기념사업회에서는 ‘김세중조각상’을 만들어 젊은작가들에게  수여하고 있는데 올해로 30회째다.

김세중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고, 김남조 선생님 자신은 어떤 사람으로 스스로 생각하시는지?(웃음)

나는 지성보다도 감성이 풍부한사람이다. 서정시를 쓰면서 평생을 살았다. 나이 들면 시 발표하기가 힘든데 지금도 계속 시를 쓰는 현역 시인이다. 특별할 수도 없지만 시와 사랑을 좋아한다. 마산고등학교 선생할 때 연극을 하게 되었는데 미술대학 학생 무대를 그려주려 온다고 했는데 그때 온사람이 김세중 청년이었다.

그때는 학생은 있는데 교수가 부족했던 시절이었다. 그때 김세중은 전임강사였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청년이었는데 이미 전임강사였다. 나는 28살에 숙명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그것은 목숨이라는 시집을 낸 직후였다. 목숨이라는 시집 덕분일거다. 어쩌면 시대가 준 선물이나 마찬가지다.  

통금이 있을 때 아이들이 ‘엄마 2분 남았어’ 하면 남편이 작업실에서 집에 들어왔지만 선량하고 좋은 사람이다. 조각가를 위해서 많은 공언을 했고, 신앙을 갖고 열심히 사신 분이다.

지난 해 사저를 문화예술인들의 공간으로 ‘예술의 기쁨’이란 건물로 새단장 해서 내놓으셨다. 당시 사회적으로 상당한 화제가 됐고, 그 뜻을 기리는 분들이 많았다. 지금 운영은 어떻게 하고 계신가

청년조각상을 시작으로 올해로 30회째 수상자가 나왔다. 수상자들이 모두 휼륭해 둥지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미술관으로 묶어놓으면 문인들한테 혜택이 가지 않아 자체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문인들이 출판기념회하는 강당도 필요하고, 수상식 할 때 공간이 필요해 지금까지 1년 반이 되었는데 운영은 어려웠지만 보람이 있다. 예술가들이 사랑하는 공간으로 변하고 있어 다행이다. 

문화예술계가 지금 심각하다. 지난해 연이어 터진 표절문제와 요사이는 특히 문학인들의 성추문이 여럿 터져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한 말씀 해달라

시인 김남조로 불려 여류라는 말은 없어졌다. 성추문이란 말은 근래에 생겼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사랑 자체가 없어진 것 같다.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컴퓨터와 휴대폰만 본다. 생각을 풍성하게 해야, 나무처럼 잎이 나고 꽃이 피어나지 않나. 그런데 요즘 학교교육은 O, X 답을 원하다보니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자연적으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해 사랑을 바라보지 못해 사랑이 적어지고 있어 안타깝다.

서로 바라보는 시간을 만들지 않아 사랑하는 얘기가 없어지는 시대가 되어간다. 이시대의 교육은 일괄적으로 단순화시키기 때문에 사람이 바라보는 대상을 사람이기 전에 기계로 본다. 결혼하는 사람도 여자가 집에서 아이를 기르는 대신 직업을 갖는 여자를 좋아하다 보니까 많은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난 내 작품도 표절하지 않는다. 40년 전에 쓴 작품하고 비슷하게 쓰면 자기표절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시를 쓸 때도 완전히 초심자가 되어 떨림을 느끼고 겁먹곤 한다. 지금까지 많은 시를 써왔지만 중복된 시는 없다. 시 앞에서는 지금도 긴장한다. 자기작품이라도 중복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시문학 부분만이 아니라 선생님은 문학계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계시다. 후배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시고 싶은가

근래의 내 작품에 '나는 노병입니다. 태어나면서 입대하여 최고령 병사가 되었습니다. 나의 병무는 삶입니다'고 썼다. 나는 90이지만 여전히 현역시인이다. 

나는 평생을 통해 읽어갈 책을 오래 살았기에 상당히 뒷부분까지 읽었고, 젊은이들이 아직까지 읽지 못한 심오한 문장을 읽어왔기에 앞으로 내 시는 더 좋아질 것이다. 아직도 쇠퇴하지 않는 감수성과 감동의 능력은 내 큰 자산이다. 이 감수성으로 계속 울림이 있는 시를 써나갈 것이다. 추수를 끝낸 가을 벌판에서 이삭을 줍는 농부처럼, 생쌀에 서정(抒情)의 물을 부어 밥을 짓는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다.

앞으로 작품계획과 활동은 어떠신지 궁금하다

삶을 좋아하기 때문에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동안 누리지 못한 것을 누리고 싶은 욕심이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좋은 시를 읽고, 음악을 들으면서 느끼고 싶다.

또한 인간이 살아가는 삶을 더듬어 실을 뽑듯, 언어를 뽑아서 생활이 들어있는 시도 쓰고 싶다. 왜냐하면 시간과 싸우는 영원한 고통을 상징하는 시지프스 바위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노동 앞에 헤아릴 길 없는 영겁의 시간이 내게 주어질 때까지 현역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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