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국의 국악담론] 8.15 해방 직후 격동기의 국악계
[김승국의 국악담론] 8.15 해방 직후 격동기의 국악계
  • 김승국 수원문화재단 대표이사
  • 승인 2017.03.09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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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국 수원문화재단 대표이사

1945년 8월 15일 36년간의 고난의 일제치하에서 벗어나 해방이 되자 바로 다음 날인 8월 16일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산하의 ‘음악건설본부’(약칭 ‘음건’)가 설립되고 여기에 작곡부, 성악부, 기악부, 국악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음건’은 국악과 양악에 걸친 모든 음악가의 조직이었는데, 명실 공히 한국음악인의 집결체가 되었다. ‘음건’의 ‘국악위원회’는 아악과 민속악의 갈등 구도를 끝내고 해방된 조국에서 국악의 건전한 계승과 발전을 꾀하기 위하여 민속악계를 대표하는 박헌봉과 아악계를 대표하는 함화진 사이에 타협이 성립되어 ‘국악건설본부’라고 개칭을 하여 국악계 각 분야의 대표로서 위원회를 구성하여 발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다 동년 8월 29일에는 ‘국악건설본부’의 발전적인 해산과 더불어 ‘국악회’가 창설되었고 동년 10월 7일에 ‘국악원’으로 명칭을 개정하고 부서를 개편하여 원장․부원장․사무국․문화국으로 나누고 문화국에는 다시 아악․정악․기악․창악․무용으로 가르고, 각 부서의 책임자까지 발표하였다. 당시 ‘국악원’의 부서 및 임원을 보면 위원장은 함화진(咸和鎭)이었고, 부위원장은 박헌봉(朴憲鳳)이었다. 

함화진은 조선조 장악원 악사 출신으로 1932년부터 1939년까지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 아악사장(雅樂士長) 직을 맡아 지내다가 이후 향토음악에 전념하기로 하고 아악부를 떠났다. ‘조선음악통론’을 통해 근대이후 처음으로 음악역사학의 체계를 세웠으나 해방 후 1947년 좌익계 대량검거 선풍에 피검됐다가 월북의 길을 택하는 비운을 겪는다. 

박헌봉은 경남 산청 출신으로 가야금, 장단, 판소리, 민요, 정가 등 민속악과 아악의 실기와 이론을 두루 능통한 국악이론가 및 평론가였다. 8․15 해방 후 주도적으로 국악재건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대한국악원장’, 서울시문화위원, 국립극장운영위원, 국악협회 이사장, 문화재위원을 역임하였다. 국악교육을 위하여 국악인을 규합하여 1960년 오늘날 국립전통예중·고의 전신인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였다. 저서로는 ‘창악대강(唱樂大綱).’ 등의 저서가 있다. 

함화진 박헌봉이 이끄는 ‘국악원’의 사무국은 유기룡(劉起龍), 문화국은 장인식(張寅湜), 김윤덕(金允德), 김천흥(金千興), 정남희(丁南希), 최경식(崔景植), 이병성(李炳星) 등이 맡고 있었다. 

국악원의 구성원 면모나 사업부서를 볼 때 당시 ‘국악원’은 소위 국악계의 모든 역량이 결집됐음을 알 수 있다. ‘국악원’은 전통에 대한 해석과 조선음악의 원리 파악이라는 근본에 대한 연구작업은 물론 각종 공연활동을 전개했으며, 또한 농악경연대회, 농악채보에 관한 좌담회, 음악서적발간, 우리음악을 오선보에 옮기는 작업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했다. 

그러다 1947년 8월 ‘국악원’ 위원장 함화진이 좌익연좌 혐의로 은퇴하고, 동년 9월에 부위원장 박헌봉이 위원장을 맡아 기구를 총무국, 공연국, 기획국, 서무부, 창악부, 민요부, 기악부, 무용부, 국극부, 연구부로 개편하고 ‘국극사’, ‘국극협회’, ‘조선창극단’, ‘김연수창극단’, ‘임방울일행’의 5개 산하 창극단체를 두고 활발한 국악 부흥운동을 펼쳐 나갔다. 

한편 8.15 해방 후 ‘이왕직아악부’는 ‘구왕궁아악부’로 개칭하였으나 구왕궁 사무처의 기능이 마비상태에 있어 ‘아악부’ 전체회의를 거쳐 정국과 사회가 안정되어 ‘아악부’가 궤도에 올라설 때까지 우선 부원들이 자치적으로 ‘아악부’를 운영하기로 하였으며 장차 ‘국립국악원’ 개원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아악부’는 아악의 전통을 유지하고 아악인의 사산(四散)을 방지하기 위하여서는 국가의 보호 아래에 아악부를 두어야만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1948년(단기 4281년) 8월 ‘아악부’를 대표한 아악사장 이주환의 명의로 국회에 ‘아악부 국영안’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이 청원서가 받아들여져 동년 12월 17일 제115차 국회 본회의에서 ‘아악원 국영에 관한 청원서에 관한 의견서’가 가결되었고 정부에 대한 청원 절차를 거쳐 1950년 1월 19일 ‘대통령령 제271호’로 ‘국립국악원’ 직제가 공포되었다. 원래 아악부에서의 청원은 ‘국립아악부’, 또는 ‘국립아악원’으로의 개편을 바랬던 것이지만 정부에서는 좁은 의미의 ‘아악’보다는 전통음악 전부를 총칭하는 ‘국악’이라는 명의가 합당하다고 판단하여 ‘국립국악원’으로 명칭 변경하여 공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로 1951년 4월 10일에야 ‘국립국악원’이 개원을 보게 되고 한 때 박헌봉이 이끄는 ‘국악원’에서 함께 활동하던 아악계의 인사들은 ‘국악원’을 떠나 ‘국립국악원’으로 활동영역을 옮겨 가게 된다.

‘구왕궁아악부’가 ‘국립국악원’으로 승격 국영화되자 박헌봉이 이끄는 ‘국악원’ 측은 아악사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된 ‘국립국악원’을 민속악의 향도(嚮導) 기관으로 인정할 수가 없다고 반발하며 민속악 중심의 별도 국립음악기관의 설립을 50년대부터 70년대 초까지 정부에 끈질기게 탄원하였다. 그러나 민속악계의 지도자들에 비하여 학문적으로나 행정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었던 ‘국립국악원’ 측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조직적인 견제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헌봉이 이끄는 ‘국악원’은 1953년 2월 수복 후에 ‘대한국악원’으로 개칭하였으며 1961년 11월 20일 정부의 방침에 따라 ‘대한국악원’과 1948년 결성된 박녹주, 임유앵, 임춘앵, 박귀희, 김소희, 한영숙 등이 이끌던 ‘국악여성동호회’와 1954년 박귀희, 김소희, 김여란, 박초월 등이 설립한 ‘민속예술학원’ 등 3개 사단법인 단체가 발전적으로 해체하여 1962년 1월 26일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로 통합 발족하게 되며 ‘국악원’의 ‘창극단’은 현재 ‘국립창극단’으로 그 명맥을 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