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호의 ‘산골 사람들’, 세월 지나니 역사네
조문호의 ‘산골 사람들’, 세월 지나니 역사네
  • 정영신 기자
  • 승인 2018.03.19 0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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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말까지 정선 ‘그림바위 예술발전소’

다큐사진가 조문호의 ‘산골 사람들’ 사진전이 지난 2일부터 정선 ‘그림바위 예술발전소’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가 조문호의 사진들은 급속한 근대화에 빠르게 망각되고 훼손된 우리네 삶과 문화가 잊혀져가고,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 그리고 우리 것을 지켜내려고 하는 산골사람들의 강한 의지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는 땅, 사람, 생명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 옛 것에 대한 추억과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과 아울러 새로움을 안겨주고 있다.

▲ 다큐사진가 조문호 Ⓒ정영신

사진가 조문호가 강원도 산골을 처음 찾은 것은 이 땅의 정기를 받고 살아온, 우리 민족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서 두메산골 사람 찾기가 시작되었다고 작가는 밝히고 있다.

정선에서 시작되는 조양강 줄기를 따라가며 화전민들이 살던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이 땅의 새벽이슬을 머금으며 우리네 사람들 삶의 아름다우면서도 조금은 슬픈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의 있는 그대로를 사진에 담았다고 했다.

▲ 정선읍 신월리 김춘자(78세) 2003.8 59.5 x 44cm Digital Print

전시된 사진들은 동강이 수몰될 위기에 처해 각 환경단체와 주민들의 의견이 팽배하던 1990년도 무렵, ‘한국환경사진가회’ 회장으로 있던 사진가 조문호가 귤암리 만지산 중턱에 캠프를 차려 상주할 때 촬영된 사진들이다.

그 단체 소속 회원들이 동강의 생태환경과 야생화, 조류, 어류 등 각기 전문가들이 투입되어 촬영할 때, 그는 생태환경에 앞서 그 땅에서 평생을 살아 온 주민들을 찍기 시작한 것이다.

▲ 삼척 도계읍 차구리 김지석 (83세) 2003,7 59.5 x 44cm Digital Print

그는 평생을 사람만 찍어 온 사진가다. ‘강(江)보다 사람(人)부터 살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타 환경단체와는 다른 반대의견을 내놓아, 댐 건설 논란으로 빚더미에 올라 선 산골농민들의 피해보상을 주장했던 것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그의 작업은 2000년에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보상해 주는 방안을 찾으라는 답을 얻어 내기까지 싸워 온 절절한 사연을 가까이서 지켜보았기에 이 전시가 주는 인본(人本)의 의미를 다시 새길 수 있는 것이다.

▲ 삼척 도계읍 산기리 세골 김은규 (64세) 2004. 9 59.5 x 44cm Digital Print

당시 그는 동강현지주민 400여명과 함께 명동성당 야외에 천막촌을 차리고 살려달라 싸웠는데, 추운 날 야외노숙이란 게 결코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또한 충무로에 그가 관리하고 있던 ‘한국현대사진가회’ 사무실과 강의실에 집기를 치우고, 나이 많은 분들을 모아 잠자리를 챙겨주는 등 동강주민들의 투쟁에 앞장서서 활동했다.

특히 지하철 충무로역과 혜화역에서 ‘동강 백성들’사진전을 열며, 동강 수동마을에서 투신자살한 김진수씨의 사연과 사진을 찍은 유인물을 명동으로 오가는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동강의 실상을 알리기에 온 힘을 쏟은 것이다.

▲ 삼척 도계읍 차구리 이순자 (69세) 2003. 7 59.5 x 44cm Digital Print

그는 이 사실을 각 언론사에 알리기 위해, 2000년 11월9일 밤을 꼬박 샜다. 보도 자료를 제작하여 발송하고, 심지어 청와대 김대중 대통령에게 자신이 펴낸 ‘동강백성들’ 사진에세이 책과 함께 현 상황을 알리는 글을 보냈다고 한다.

그 이튼 날 석간, 문화일보 사회면 톱으로 ‘동강 살렸으면 주민도 살려라’는 헤드라인을 달고 기사가 실린 것이다. 다섯 명 째 자살로 이어지는 주민들의 피폐한 현실이 생생하게 보도된 것이다.

특히 청와대로부터 수몰지역대책위원장을 맡았던 이영석씨를 비롯한 주민대표를 부르는 연락이 왔고, 보상안으로 주택 건설비 보조, 비닐하우스 건설비 지원 등의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 정선읍 귤암리 윗만지 최돈연 (82세) 2003. 8 59.5 x 44cm Digital Print

사진가 조문호는 “그 때의 기분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이 좋았으나, 지금 생각하니 후회스러운 점도 많다고 한다. 순식간에 오래된 농가들은 흔적을 감추기 시작했고, 집집마다 티브이 안테나가 들어서며 순박한 산골사람들의 인심이 야박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구옥이란 조문호 작가가 사는 캠프로 사용했던 집만 남았고, 국적불명의 양옥집들로 완전히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돈이 사람을 망쳐가는 상황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허나 어떻게 그들만 원시의 삶을 살라고 할 수 있겠냐” 며 말꼬리를 감추었다.

동강 댐이 취소되고, 보상이 이루어진 후, 6년 동안 기록한 농민들의 삶이 바로 이번에 전시하고 있는 ‘산골 사람들’이다. 2004년에 ‘눈빛출판사’에서 ‘두메산골 사람들’ 조문호사진집이 발행되며 서울 전시가 시작되었고, 이어 주민들이 살고 있는 산골분교를 돌아다니며 순회전을 1년 동안 했다고 한다.

▲ 정선읍 신월리 최덕남 (85세) 2003. 8 59.5 x 44cm Digital Print

그의 ‘산골사람들’ 전시는 14년 만에 주민들이 사는 정선에서 열려 그 의미가 더했는데, 주민들이 14년 전과는 반대 현상을 보이고 있다. 당시 서울 전시의 호응과는 대조적으로 사진들을 대수롭게 보았으나, 이제 그 사진들을 다르게 본다는 점이다.

사실 그 때의 정겨운 산촌 풍경을 볼 수 없는데다, 그 때 찍힌 집은 물론 디딜방아, 쇠죽가마, 물지게에서 비롯하여 농기구까지 모두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때 찍힌 가족들도 대부분 돌아가신 분이 많았다. 세월이 지나면 살아 온 자체가 역사가 된다는 것을 실감한 것이다.

▲ 정선읍 귤암리 윗만지 최종대 (51세) 이선녀 (48세) 2000. 2 59.5 x 44cm Digital Print

당시 출판된 사진집 ‘두메산골 사람들’ 서문에 ‘조문호-두메산골 사람들의 초상’을 쓴 미술평론가 박영택교수는 이렇게 적었다.

“두메산골 사람들의 삶의 풍경을 기록한 사진들은 뼈저린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새삼 우리네 선조들의 삶의 모습을 환영처럼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급속한 근대화 속에서 빠르게 망각되고 훼손된 우리네 삶과 문화에 대한 반성과 비판의 시선이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여기는 생활현장과 사람들의 몸에 근접한 것이다.(중략)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평생 살았을 장소에 앉아 있거나 우연히 산 속에서 만난 사람 앞에서 잠시 멈춰서 있다. 초라한 의복에 대부분 무표정하고 무심한 자락을 온 몸에 드리우고 있다. 전형적인 시골사람들의 초상이다.

평생을 자연에 순응하며 세상과 등지고 살아왔을 이 이름 없는 민중들의 삶과 역사는 무엇이며 어떻게 말해져야 할까? 그들이 땅을 경작하고 식량을 채집하며 강하고 질긴 목숨을 꿋꿋하게 이어온 그 내력이 우리네 전통이고 역사였음을 이들의 얼굴과 몸에서 다시 확인해보는 일은 새삼 한국인의 정체성을 사유해 보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 "

▲ 평창 미탄면 백운리 엄장섭 (72세) 2003. 5 85 x 59cm Digital Print

‘얼굴은 한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세상의 끝이고 시작이다’는 박영택 교수의 말처럼 사진가 조문호 또한 사람이 중심인 세상에서 사람을 향한 그의 짝사랑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조문호 ‘산골사람들’ 전시는 이달 31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