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무용학자 정병호와 무형문화재 無用論
[성기숙의 문화읽기]무용학자 정병호와 무형문화재 無用論
  • 성기숙 무용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승인 2018.05.17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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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무용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어느덧 한국무용학의 개척자 정병호 선생이 타계한지 7주기에 이른다. 10여년 전의 일이다. 선생은 알츠하이머 발병 몇 해 전 어느 날 대치동 자택으로 불러 서재의 책과 공연자료를 하나하나 설명하시곤 연낙재로 옮겨가라고 했다. 거역할 수 없었다. 명령에 가까운 단호한 주문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2007년 정병호 선생이 소장했던 무용학 관련 문헌을 비롯 선생이 직접 수집 발굴한 민속예능자료 및 최승희 공연자료 등이 연낙재로 기증됐다. 희소적 가치가 높은 방대한 자료들로서 그 자체가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손색이 없다. 정병호 선생 소장자료의 연낙재 귀속은 단지 스승과 제자라는 인연의 끈을 넘어 소위 천명(天命)으로 선택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몇 해 전 정병호 선생이 기증한 옛글과 사진들을 모아 두 권의 단행본을 펴냈다. 『한국 전통춤의 전승과 현장』(2011), 『한국 전통춤의 원형과 재창조』(2011)가 바로 그것이다. 민속예능의 현장을 조사연구한 성과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춤을 매개로 과거와 현재, 순간과 영혼의 공존을 모색한 연낙재 고유의 방식으로 편집된 기록화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애착이 크다.

무용학자 정병호를 이해하는 두 가지 키워드

언젠가부터 특별한 버릇이 생겼다. 현실의 피폐함을 잊는 방식의 하나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시간의 경계를 넘나든 다양한 표정의 공연자료들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어 하나의 ‘춤역사’를 직조해내는 현상이 흥미롭다. 정병호 선생의 손때 묻은 민속예능 사진들과 육필원고를 마주할 적마다 특별한 감회에 젖는다. 학자로서의 소신과 신념을 일깨우는 원동력이자 나침판이라고나 할까.

무용학자 정병호를 이해하는 키워드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신무용가 최승희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통한 인물사적 복원이고, 둘째는 민속춤의 현장연구를 통한 한국무용학의 이론적 체계를 세웠다는 점일 것이다. 우선, 최승희에 대한 관심의 시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나도 중학생의 몸으로 몰래 극장에 가서 최승희 무용공연을 봤다. 그때에 본 최승희의 춤은 보살춤, 초립동, 에헤야 노아라 등이었다. 보살춤은 광채가 나는 보석과 구슬을 꿴 줄을 몇 가닥 몸에 걸쳤을 뿐일 정도로 반나체의 모습을 하고 높은 무대에 올라가 손만 가지고 춘 것이었다. 조명이 처음에는 배꼽 부분을 비추다가 차차 온몸으로 퍼졌는데, 사춘기에 보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겠지만 하도 요염해서 ‘어쩌면 사람이 저렇게 아름다운 예술이 있을까!’ 하고 느꼈다. 소문에 그이가 세계적인 무용가라는 말이 들렸다. 나는 그때에 그 흥분과 감격을 간직하려고 최승희 사진 몇 장을 사 가지고 돌아왔다”

정병호의 저서  『춤추는 최승희, 세계를 휘어잡은 조선여자』(1995) 의 서문이다. 알다시피 최승희는 20세기 조선이 낳은 최고의 예술가로 세계무대를 누빈 춤의 선구자이다. 전통시대 전수개념에 머물던 춤을 개화하고 미몽에서 깨어나도록 추동했다. 타고난 재능과 출중한 외모 그리고 완벽한 테크닉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무대에서 관객들을 한 눈에 사로잡을 정도로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발산했다. 이른바 ‘살인적 인기’를 누렸다. 해외순회공연을 마치고 귀국한 최승희는 1940년대 초반 전국순회공연의 일환으로 광주극장에서 공연무대를 가졌다.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결정적 순간’은 있는 법. 무용학자 정병호를 춤의 세계로 끌어들인 것은 다름 아닌 최승희였다. 감수성이 예민한 중학생 시절 광주극장에서 마주한 최승희의 ‘보살춤’은 사춘기 소년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나체에 가까운 ‘보살춤’을 접하고는 한 눈에 매료됐다. 최승희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최승희에게 사로잡힌 영혼은 냉전이데올로기 체제에 저당 잡힌 채 50여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드디어 때가 왔다. 1980년대 후반 월북예술가들에 대한 해금조치 이후 가슴 속에 묻어 뒀던 무용가 최승희에 대한 ‘짝사랑’이 비로소 피어올랐다. 최승희의 삶과 예술활동의 궤적을 쫓아 세계를 누볐다.

최승희 연구를 위해 한국을 비롯 일본, 중국, 미국, 유럽, 러시아 등 세계 여러 나라를 현지 답사했다. 자료를 모으고 증언채록을 하는 등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자료적 접근성이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월북 이후 최승희의 무용행적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세하게 다뤘다. 이 책에 등장하는 가족과 제자, 예술적 조력자 및 당대 문화지성들의 증언은 기록적 가치를 더한다. 수집된 자료의 방대함이 그저 놀라운 뿐이다. 최승희 매니아를 자처한 정병호는 무려 7년이라는 세월을 고스란히 최승희 인물연구에 바쳤다.

최승희, 신화에서 실존적 인물로

『춤추는 최승희, 세계를 휘어잡은 조선여자』는 불후의 명저로 손색이 없다. 최승희 연구의 교과서이자 바이블적 가치로 읽힌다. 신화 내지 전설에 머물러 있던 최승희는 이 책의 출간으로 세상 밖 ‘공론의 장’으로 온전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책의 출간 이후 최승희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은 더욱 증폭됐다. TV드라마, 연극, 영화, 뮤지컬, 소설 등 다양한 장르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최승희를 콘텐츠로 한 작업에서 정병호의 평전은 원천자료서 긴요하게 쓰인다. 한국근대무용사 탐색에도 더없이 귀중한 저작으로 손꼽힌다. 정병호의 학문적 저력의 기원은 무엇인가?

무용학자 정병호는 태생부터 남달랐다. 그는 1927년 전남 나주의 대부호 집안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서울공대 전신인 경성공업전문대학을 졸업한 보기 드문 엘리트였다. 근대문학사의 기인이자 초현실주의자로 회자되는 ‘날개’의 작가 이상과 동급생이었다고 전한다. 근대 신교육의 세례를 받은 부친의 영향으로 정병호는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 바이올린, 아코디언 등을 배웠다. 스케이팅 실력도 수준급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서양악기를 연주하고 스포츠를 즐기는 등 보기 드문 호사를 누렸다. 

소년 정병호가 일제강점기 서양문명의 혜택으로 정서적 풍요를 누렸던 것은 집안 내력과도 무관치 않다. 선생의 집안은 나주평야 일대 비옥한 농토를 가진 전형적인 호남의 부호였다. 나주역 근처 99칸짜리 기와집 사랑채엔 농악패, 사당패 등이 며칠씩 묵어갈 정도로 집안 어른들은 후한 인심의 소유자였다. 대농(大農)인 그의 집에는 수 십명의 머슴들이 기거했다. 농사철에는 50여명으로 구성된 농악대가 자체적으로 꾸려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 농악은 하나의 운명이었다. 어린 시절 농악대와 어울려 쇠가락을 치면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다가 집안 어른들에게 들켜서 매 맞기가 일쑤였다. 그래도 마냥 신이났고 즐거웠다. 농악가락에 실린 신명난 몸짓은 어린 영혼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농악을 비롯 민속예능을 연구하는 전문학자로 우뚝 서는데 귀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단행본으로 펴낸 『농악』(1986)은 전국의 농악판을 누비고 다닌 결과의 산물이다. 흙냄새 물씬 나는 우리 민속문화에 대한 값진 결실이자 농악연구의 시금석으로 자리매김된다.

정병호 선생의 민속학자로서의 진면목은 『한국의 민속춤』(1992)에서 절정을 이룬다. 전국에 산재한 민속춤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역작이다. 이 책은 각 지역의 민속현장 답사를 통해 발굴, 수집된 자료를 토대로 저술됐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우리 춤에 내재된 한국적 미의식에 대한 정병호의 지적 탐구는 10여년의 숙성과정을 거쳐 『한국무용의 미학』(2004)으로 완결된다.

한국 민속무용학의 초석을 다지다

정병호 선생은 정년퇴임 이후에도 식지 않는 열정으로 학문적 집념을 불태웠다. 72세의 나이에 펴낸 『한국의 전통춤』(1999)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약 9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과 다채로운 사진자료가 이를 웅변하다. 전통춤의 기원과 역사, 춤의 유형, 실체와 특징 등을 실증적으로 다뤘다. 특히 한국의 전통춤을 궁중춤과 민속춤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논의해온 기존 경향에서 탈피해 보다 폭넓은 관점에서 통찰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미하다.

그는 틈만 나면 민속예능의 현장을 찾아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농촌, 어촌, 산촌 등 전국방방곡 민속예능이 살아 숨 쉬는 현장에는 늘 정병호가 있었다. 굿판, 농악판, 춤판 등 모든 판을 휩쓸었다. 산간벽지를 찾아가 자료수집을 하다가 간접으로 몰려 봉변을 당하는 등 말못할 해프닝도 겪었다. 한마디로 사서 고생을 한 셈이다. 전통시대 기층 속에 스며있는 다양한 민속예능을 문화원형적 가치로 존재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정병호의 업적은 기념비적이라 하겠다.

주지하다시피, 한국무용학의 생성과 발전은 아카데미즘과의 연관 속에서 싹트고 숙성돼 왔다. 1963년 이화여대 무용과 창설이후 여러 대학에 무용과가 생겼다. 그러나 대학무용과는 실기 위주로 운영되어 진정한 의미의 무용학의 발전은 더디게 진행될 수 밖에 없었다. 학적 토대가 열악했던 척박한 풍토에서 무용학자 정병호가 이뤄낸 성과는 실로 눈부시다. 그는 일평생 20여권에 달하는 무용학 관련 저서를 남겼다. 한국무용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다.

어디 그뿐인가. 정병호 선생은 전통문화의 새로운 트렌드를 창출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1970년대 사실주의 양식의 지배력이 약화되는 대신, ‘전통의 현대화’를 화두로 ‘우리 것’에 대한 재발견 작업이 시도된다. 무형문화재 제도와 더불어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를 비롯 탈춤부흥운동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전통문화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한국학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다. 유신시대 새로운 학풍(學風)의 노정에 정병호가 존재하고 있음은 예사롭지 않다. 특히 당대 최고의 문화지성으로 손꼽히는  『뿌리 깊은 나무』의 한창기, 『공간』의 김수근, 『춤』지의 조동화 등 소수의 지적 엘리트들의 조력으로 정병호는 괄목할만한 학문적 성취를 이뤘다.

그는 탁월한 기획자이기도 했다. 아카데믹한 안목과 전통(춤)에 대한 남다른 심미안으로 전국에 산재한 민속춤과 춤꾼을 발굴하여 서울무대에 입성시켰다. 전통무용연구회를 발족, 지방의 숨은 예인들을 발굴하여 중앙무대에 소개했다. 기획과 공연해설, 신문기고 및 평론활동 등 1인 다역을 자처하며 전방위적으로 활동을 펼쳤다. 이른바 ‘명무전(名舞展)’ 기획의 창안자가 정병호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무형문화재 無用論

돌이켜 보건대, 정병호 선생이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남긴 업적은 재음미의 가치가 있다. 선생은 약 20여년 간 문화재위원을 지냈다. 그의 손길을 거쳐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종목은 수 십종에 달한다. 1세대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대부분은 정병호의 발굴, 조사연구에 힘입어 인간문화재 반열에 올랐다.

정병호의 이론적 조력으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종목은 열거하기조차 숨가쁘다. 승무, 태평무, 승전무, 학연화대무, 밀양백중놀이, 평택농악, 이리농악, 강릉농악, 임실필봉농악, 송파산대놀이, 발탈, 진도씸김굿, 경기도당굿, 진도다시래기, 영산재 등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데 이론적 뒷받침을 자처했다. 또 우리 춤의 시조 한성준의 손녀딸 한영숙을 비롯 김숙자, 이동안, 하보경, 이매방, 강선영, 이흥구, 엄옥자 등이 정병호의 조사연구에 힘입어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가 되는 영광을 누렸다. 한국의 무형문화재 역사에서 정병호 선생을 제외하고는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다. 그만큼 선생은 무형문화재 제도의 생성과 발전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말년 알츠하이머 투명 직전까지 선생은 춤의 현장을 활보하며 민속춤을 강의하고 신무용가 최승희의 위대함을 설파했다. 그런데 선생은 최승희의 삶과 예술적 업적을 실증적으로 통찰하여 평전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신무용에 대한 평가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실로 아이러니컬한 대목이다. 신무용은 망국으로 인하여 주체적 기반에서 전문화되지 못하고 식민지무용으로 상품화되었다고 비판했다. 전통이 무시된 채 흥미본위의 구경거리로 전락되었음을 꼬집었다. 신무용의 태생적 한계를 지적하면서 우리 춤 고유의 본질과 원형을 되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특히, 무형문화재 무용론(無用論)을 주장한 대목은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진다. 선생은 무형문화재 지정에 있어 우리 춤 고유의 본질과 원형이 훼손되는 것을 우려했었다. 또 일부 무형문화재가 보유자 중심으로 권력화, 사유화되는 현상도 못마땅하게 여겼다. 무형문화재 지정에 산파역할을 한 주역이 무형문화재 무용론을 설파한 것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정병호 선생은 한국무용학의 초석을 다지는데 일평생 헌신한 최고의 학자로 손꼽힌다. 선생은 왜 말년에 이르러 무형문화재는 없어져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했을까? ‘전통(춤)의 정통’이 망실되고 예(禮)와 도(道)가 무너진 오늘의 혼란한 상황을 미리 예견이라도 했단 말인가? 선견지명(先見之明)이 놀랍기만 하다. 선생이 던진 메시지를 곰곰이 되짚어 볼 때이다.

성기숙(무용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