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 ]근대대중문화예술의 개척자 -배구자(裵龜子)
[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 ]근대대중문화예술의 개척자 -배구자(裵龜子)
  • 김순정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교수
  • 승인 2018.10.22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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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정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교수

발레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토슈즈는 엄격한 훈련을 거쳐야 비로소 제대로 신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신성불가침 영역이라 생각했던 토슈즈에 대한 환상은 서서히 걷히고 있다. 최근에는 일반인들도 일정기간의 훈련과정을 거치고 나면 과감하게 토슈즈에 도전할 수 있는 시대다. 

누구나 전문 발레리나 수준으로 올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발레 움직임의 원리를 익히고 세부규칙, 프로토콜을 지켜간다면 언젠가는 토슈즈를 신고 무대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어려운 목표에 도달하고자 하는 노력과 더불어 성취가 주는 만족감과 특별한 심미적 체험을 주는 발레를 직접 해보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며 기쁨을 안겨줄 것이다. 

최초로 토슈즈를 신고 춤을 춘 이는 누구였을까? 서양에서는 이탈리아 출신이자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활약한 마리 탈리오니(1804-1884)로 알려져 있다. 1832년에 초연된 <라실피드>에서 토슈즈를 신고 발끝으로 서서 춤을 추었다. 낭만주의 발레리나로 유명한 그녀는 세계무용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탈리오니는 과연 누구였을까. 탈리오니 보다 100년 뒤 조선에서 태어난 배구자였다.

근대 무용가로 잘 알려진 최승희(1911-1967), 조택원(1907-1976)의 유명세에 밀렸던 배구자(裵龜子1905-2003)는 무용 활동을 일찍 그만두고 광복 이후 일본에 살다가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했기에 오래도록 우리에게 잊힌 인물이었다.

더구나 친일파 밀정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배정자(1870-1952)의 조카이자 이토 히로부미의 딸이라는 소문까지 더해지는 등 배구자의 삶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무용잡지에서 배구자의 동생인 배한라 여사의 인터뷰나 동정을 통해 배구자의 존재를 어렴풋하게 짐작하는 정도에 그쳤다.
 
배구자는 1913년 일본에 건너가 악극단이나 곡예단 성격의 덴카츠좌에 들어가 마술, 무용, 음악, 곡예, 연기 등 여러 장르의 예술을 연마했다. 그 후 엔터테이너 기질이 강한 대중예술가로 성장한 배구자는 일본에서 명성이 자자할 정도였다.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는 1916년 러시아 마린스키극장 출신 발레리나 엘레나 스미르노바가 공연을 했고 이어 당대 최고의 발레리나인 안나 파블로바의 공연도 있었다. 일본발레의 어머니라 불리는 엘레나 파블로바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러한 상황들은 배구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16세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순회공연 도중에 안나 파블로바의 <빈사의 백조>를 직접 보게 되었던 배구자는 이를 자신의 공연 레파토리로 삼았다. 그리고 1926년 평양공연 중인 덴카츠좌를 이탈하여 경성으로 가서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경성 시절, 배구자는 무용연구소를 열어 제자양성을 했고 연구생 12명에게 수 십 가지 무용을 가르치면서 발레를 중심교육과정으로 삼았다고 한다. 1928년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첫 번째 개인공연이자 고별공연인 <배구자 독창. 독무회>에서는 독창을 하고, 독무 <아리랑> 등의 다양한 레파토리와 함께 <빈사의 백조>도 있었다.

공연을 보고난 후 장편소설 <상록수>의 저자 심훈(1901-1936)은 특히 발레에 대한 좋은 인상을 이야기하며 배구자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이시이 바쿠의 현대무용에서 출발한 최승희나 조택원과 다르게 종합예술을 지향하는 악극단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던  배구자는 순수무용가라기보다는 대중예술가의 면모가 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다.

배구자악극단은 전국순회공연에 이어 1930년대 초에는 일본에서도 공연을 이어 갔다. 일제강점기 일본과 조선에서 치마저고리를 입고 공연하는 배구자에게 조선인들은 큰 감동과 위안을 받았으며 인기는 절정이었다. 

또한 배구자는 1931년 나운규의 영화 “10년”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나운규(1902-1937)는 우리 영화의 출발점인 <아리랑(1926)>의 시나리오, 주연, 감독을 한 탁월한 예술가다. 이후 나운규는 배구자의 무용순회공연에 동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영화 <아리랑>을 만든 나운규와 독무 <아리랑>을 춘 배구자의 삶이 중첩되기도 한다. 

바라던 대로 꽃을 피우지는 못하였으나 배구자는 무용수이자 창작정신을 지녔던 창의적 예술가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민요에 맞춘 춤을 만들려 했고, 검무나 승무를 새롭게 만들고자 했던 것에서도 그런 기질을 알 수 있다.

평양 출신 남편 홍순언과 함께 배구자는 1935년 동양극장을 설립했다. 최초의 연극전용극장으로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회전무대 등 최신시설을 갖추고 연중무휴로 공연을 이어갔다. 그러나 3년 뒤 홍순언의 사망으로 동양극장은 문을 닫았고 배구자의 활동도 뜸해졌다.

올해만 하더라도 세계 최고수준이라 할 마린스키발레단, 볼쇼이발레단의 내한공연이 이루어지고 대한민국발레축제, K-발레월드 등 각종 발레페스티벌이 성황리에 열렸다. 여러 무용 장르 중 유독 발레공연에는 유료관객이 객석을 가득 채우고 있다. 동네마다 골목마다 발레학원이 생겨나고 일반인들이 몰려들어 발레 기본과 작품을 연마하고 있다.

이에 발맞추어 일반인들을 위한 발레 콩쿨이 만들어지고, 발레 축제도 열리며 최고의 수준을 지닌 프로무용수들을 초청해 단체 및 개인강습을 받고 있다. 

바야흐로 발레의 대중화 시대가 열렸다 할 수 있고 발레와 여러 장르가 융합된 보다 총체 예술 공연형태가 각광받고 있다. 이런 시대에 배구자가 태어났다면 아마 춤과 연기, 노래 등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만능 무용가 또는 뮤지컬 배우가 되지는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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