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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인터뷰] 강익중 설치미술가 "창작자는 '왜?' 라고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해야
With를 꿈꾸는 상상력....작가만이 경계를 잇는 연결자 역할 할 수 있어
2018년 11월 08일 (목) 13:43:01 이은영 발행인 press@sctoday.co.kr

With, 꿈, 상상, 아이, 바라봄, 공공, 정직, 리더, 연결, 이루다...민족, 통일, 평화, 세계, 다리,.. 한글, 달항아리...강익중 작가와의 인터뷰를 하면서 그의 말에서 뽑아 본 키워드다. 그의 작업의 의미들이 이 단어들에서 읽혀진다. 그리고 이들의 시작은 그가 끊임없이 자신에게 하는 왜?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뉴욕에서 활동하며 백남준 이후 세계적인 설치미술가로 꼽히는 강익중은 우리에게 한글벽화 작품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우리 한글의 아름다움을 전시와 기증을 통해 알리고 있는 그는 해외 도서관과 박물관 등은 물론, 지난 2014년에는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에 기증하기도 했다.

그가 요사이 꿈꾸는 작업은 ‘평화’를 향해 있다. 동과 서, 남과 북,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다리를 만들고, 그 스스로 그 경계의 연결자, 과거와 미래의 연결자가 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최근 경기도미술관의  《이야기 사이》및 어린이벽화 10주년 기념 홈커밍 프로그램 ‘5만의 창, 미래의 벽’ 전시(10월 25일~ 2019년 8월 18일)를 위해 방한했다. 경기도미술관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모처럼 만난 ‘신선함’이었다.

굳이 나이를 뛰어 넘는 동안이어서만이 아니다. 전시장에서 그가 아이들에게 ‘바치는’  자작시를 낭독하는 모습, 그의 생각이 전해지는 말, 맑은 눈빛과 표정에서 읽혀지는 그냥 ‘느낌적 느낌’이다. 

   
▲ 강익중 설치미술가

이번 경기도 미술관 전시에서 10년 전 작품을 한 아이들과 다시 작품으로 재회한다고 들었다. 그간의 소회가 궁금하다

내 기분에는 5년 정도 지난 기분이다. 당시 기억에 강원도 마라도 등 안 간데가 없었던 거 같다. 아이들이 어린시절의 꿈을 이뤄가는 친구들도 있고, 중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친구도 있다 들었다. 다들 보고 싶다.

많은 아이들과 작품을 만나면서 유독 기억에 남는 초등학생 여자 아이가 있다. 아버지와 헤어져 사는 친구인데,  매일같이 아버지가 마시던 맥주만 기억에 남아있는 친구였다. 그 친구가 그 기억을 ‘노란 그림’으로 표현했었다.

내가 어렸을 때 무척 가난했다. 어머니가 매일 봉지쌀을 사오라고 하셔서, 부끄러워서 친구들 몰래 숨기느라 뛰어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 때 ‘누런 쌀봉지’와 그 아이가 그렸던 ‘노란 그림’의 색깔이 중첩돼 기억에 많이 남는다. 

10년 전, 아이들과 한 ‘5만의 창, 미래의 벽’ 같은 공동작업을 선보였고, 이번에는 10년 전의 그 아이들이 성장한 후의 작품을 함께 담았다. 그리고  ‘달항아리, 빨강과 파랑'작품을 이번에 선보였는데 그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나?

내 작품은 크게 말하면 함께하는 작품이 있고, 혼자 하는 작품이 있다. 혼자 하는 작품이라 해도 사실은 함께 하는 것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이번의 달항아리 작품이 그렇다. 에이브라함 링컨이 'By the People, Of the People, For the People'을 주창한 것에 나는 하나를 더 붙이고 싶다. ‘With the People’, 이 것이 내 작품의 시대정신이다.

공공미술은 보여주는 것 +함께 참여하는 작품이다. 내 경우 영화감독처럼 내가 (전체 작품)지휘를 하지만 항상 내가 하는 말은 공공미술의 특징은 “명랑한 혁명”이라 한다. 혁명은 세가지가 필요하다. 리더가 필요하고, 민중(사람)이 필요하고 대의명분이 필요하다.

내가 혁명 앞에 ‘명랑한’을 붙이는 이유는 슬픈 것 보다는 긍정적인 것이 좋기 때문이다. 대중에게 희망을 주고 특히 어려운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 '될 수 있다. 할 수 있다' 라는 긍정의 메시지를 아이들에게도 주고 싶은 것이다.

오늘 전시장에서 발표한 ‘이루어 진다’라는 자작시가 그런 내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 한국으로 오기전 연금술사 영문판을 읽었는데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주요 메시지였다. 그 말에 깊이 공감했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 우리는 우주의 한 부분이기에 우주와 우리가 같이 통하고 대화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발상이다. 내 안의 작은 우주나 밖의 큰 우주나 너무 크기 때문에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우주가 내안에 포함되고 내가 우주에 포함되고 있다고 믿는 순간 기적이 이루어진다. 그것이 어린이들에게 바라는 꿈이다.

달항아리는 오래전 전세계 아이들 그림 14만장을 모아 일산 호수공원에서 전시했는데 갑자기 큰 공이 터졌다. 터진 공을 보니 모양이 틀어졌는데 아래 위가 나눠져 있는 달항아리가 연상됐다. 달항아리는 백토로 아래위를 만들어 붙이지 않나. 그 모습을 보며 이게 민족의 모습이고 내가 하고자 하는 모습, 연결하는 것, 품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 달항아리를 그리기 시작했다.

한글과 달항아리는 지구별의 비밀암호다. 합치는 것, 모음과 자음, 남과 여, 남과 북, 밤과 낮, 우리민족의 코드가 다 들어있다. 우리의 현재 상황이 너무 중요한 것이 치료의 백신을 만들 수 있다. 헤어져 피흘린 상처를 치료의 백신으로 만들어 그걸로 세계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 Bridge of Dreams, Proposal Image for Future Project, (180-meter diameter), Imjin River, Korea, Courtesy of the Artist.jpg

개인 작업에 있어서는 어떤가?

그림은 하나의 창이다. 따뜻하게 바라보는 하나의 창이고 그림을 풀어가는 방법이다. 그림을 그리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작가들에게는 두 유형이 있는 것 같다. 안테나를 세워서 밖의 많은 정보를 취합하는(어디서 어떤 전시가 있고...등등) 분들이 있고, 나의 경우는 내 안으로 안테나를 세운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내 안으로 집중시켜 나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 나한테 맞는 스타일이다.

어떤 것이 좋다고 말할 수 없다. 영어에 듣는다는 뜻의 두 단어 리스닝과 히어링이 있지 않나. 나는 리스닝을 하고 싶다. 내 안의 울림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것이 그림을 그리는 나의 재미이자 목표다. 내 안에서 툭툭 튀어나오게, 울려서 나오게 하는 것이다. 정답이라 할 수 없겠지만. 내가 느끼는 생각, 삶이다. 그림을 그리거나 자신의 사업을 하거나 다 똑같다고 본다. 나는 내 그림을 통해 명성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면서 세상의 질서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왜?라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 나는 늘 무엇을 하건 ‘항상 왜?(why)’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한다. 여기에서 창의성이 나온다. 왜? 달항아리를 그리는지, 왜? 작은 그림을 그리는지.

작가로서 창의성이 강조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강 선생의 창의성의 의미는 좀 남다른 것 같다

정직을 바탕으로 창의적일 때 그 가치가 발휘된다 생각한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캔버스를 앞에 놓고 있다고 창의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다. 그 창의는 나한테는 하나밖에 없다 ‘왜?’다. 이것을 질문하지 않으면 ‘창의적이지 않다’라고 생각한다.

나는 리더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는데, 진정한 리더는 왜? 라는 것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시대에 따라 리더상은 바뀌어 왔다. 19세기는 영웅, 20세기는 스타, 21세기는 ‘연결자’가 리더라 생각한다. 연결자의 조건은 안이 비어있어야 한다. 영웅은 앞에 칼을 들고 나서고, 스타는 중심에 위치한다. 그러나 연결자는 보이지 않는다. 보여지면 안된다. 자기 스스로를 보이지 않고 그 속에 녹아 있어야 한다. 익명성과 호환성을 가진 연결자가 21세기 작가이자, 리더와 정치가, 스승의 모습인 것 같다.

나는 그런 연결자로서 A와 B를, 동과 서를, 호남과 영남, 남과 북을 연결시키고 싶다. (내 작품인)순천만정원의 ‘꿈의 다리’를 가보면 영호남이 다 있다. 드러나지 않으면서 경계를 허물고 연결하는... 더 중요한 연결자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자다. 경계선을 연결선으로 바꾸는 역할을 하는 사람은 작가 밖에 없다. 

이런 얘기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강익중씨는 정치인인가?’라고 묻는다. 낚시로 말하면 작가는 던지는 사람이고, 그걸 끌어올리는 사람은 과학자고, 경제는 나누고, 정치인의 역할은 분배다. 이들이 한 사이클로 움직여야 한다. 작가의 던짐이 없으면 사실 정치가가 나눠줄 수가 없다. 상상없는 민족은 살아남을 수 없다.

미술이 중요한 것은 상상을 하는 것이다. 꿈꾸는 민족이 되자. 이것을 아이들에게 항상 던져 주는 화두다. 꿈꾸는 사람과 사회가 돼야한다. 상상이 없으면 죽은 것이다.

아인쉬타인이 말 중 제일 좋은 것은 ‘로직은 A와 B에서 옮기는데, 이메진, 상상력은 당신을 아무데나 던져놔도 된다’라는 말이다. 유태인들을 왜 우수하다 하겠나. 상상력이다. 21세기의 우리는 마음껏 꿈꾸는 것이다. 자신을 어떤 틀에 규정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 그리고 5만어린이(오른쪽)_5만의 창, 미래의 벽_혼합재료, 벽면설치_1000x2700cm_2008.

경계선을 연결선으로 바꾸는 것이 작가의 역할이라는 예술관을 좀 더 쉽게 풀어달라

2016년 9월 한 달 동안 런던의 템스강에서 고향을 북에 두고 온 실향민 어르신들의 고향 그림 '집으로 가는 길 (Floating Dreams)'을 전시했다. 국제적으로 관심거리가 되고 있는 중동 난민의 선배격인 우리 어르신들의 꿈을 통해 평화의 백신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집으로 가는 길’은 세계 난민들에게 바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역만리 낯선 강물에 띄어진 우리 어르신들의 통일 꿈이 강물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대동강 두만강까지 전해질 수 있다는 믿음에서였다. 모든 강은 살아 움직이며 하나로 이어져 있다.

템스강이 런던시의 남부와 북부를 잇듯, 생각을 바꾸면 한반도를 가르고 있는 임진강도 더는 분단으로서의 강이 아니라 연결의 강, 화합의 강으로 변한다. 이를 이루는 것이 우리 세대의 몫이고, 작가의 역할이라고 생각 한다. 가장 보람있었던 전시로 기억한다.

좀 전 간담회에서 임진각에 설치된 ‘동그란 다리’를 다시 작업할 계획이라는 것을 조심스레 밝히기도 했는데

임진각에 있는 ‘동그란 다리’를 10년 전에 작업했는데 이를 확대시켜 보완작업을 하고 싶다. 원그림은 100만장인데 스캔된 그림은 30만장이 있다. 앞으로는 인터넷을 통해 200만장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전에는 사람을 만나서 작품을 모았지만 앞으로는 그림을 모으러 다니지 않아도 된다.

인터넷 강국인 우리나라의 장점을 활용해 그림들을 함께할 수 있다. 작업이 훨씬 더 풍부하고 다양하게 이루어질 것 같다.

한글의 조형성을 활용한 작품을 많이 했는데 그 계기는 무엇인지. 외국에서 주로 활동하는데 그들의 반응도 궁금하다

아이를 낳으면서 시작했다. 아내가 임신했을 때부터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98년도인데 그 때부터 생각이 아이가 자랐을 때 통일이 돼 있을까? 걸어서 북한에 갈 수 있을까? 이게 내게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이가 20년 뒤에 평양에 가려면 어떻게 할까? 다리를 만들어서 건너도록 하자는 생각에 ‘꿈의 다리’를 만들었다. 북한의 아이들 작품도 모으고 하려 했는데 그게 안돼서  1990년에 파주헤이리 마을에 10만의 꿈을 만든 것이다.

3인치로 된 내 한글 작품을 처음 산 분이 네덜란드인이다. 뜻은 모르지만, 한글의 아름다운 조형미에 반해 작품을 구매했다고 하더라. 2010년 상하이 엑스포 한국관의 외벽을 모두 오방색으로 그려진 한글로 설치를 했는데, 신비한 모양의 글자체가 단연 인기를 끌었다. 엑스포 주최 측으로부터 영예의 디자인상을 받기도 했다.

지난봄 전시 때문에 방문했던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는 한글 도서관이 있다. 소피아시립 도서관 안에 위치하고 있는데, 영어 도서관에 이어 두 번째라고 한다. 고맙고 자랑스러운 마음에 뉴욕에 돌아온 즉시 오방색으로 된 '한글 도서관' 나무 현판을 만들어 보냈다. 불가리아 친구들에게 '원더풀'이라는 편지를 계속 받고 있다. 

한글은 문자 이전에 음양의 조화를 이룬 철학이다. 남녀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듯이, 한글의 모음과 자음이 만나서 소리가 나온다.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지만 그런 한글 덕분에 반드시 통일될 것이다. 한글이 통일의 비밀 코드이자 비밀 열쇠라고 생각한다. 

   
▲ 강익중 설치미술가

지난 1994년 백남준 선생과 함께 한 2인전 ‘멀티플 다이얼로그’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됐다. 백남준 선생은 강익중 선생에게 어떤 분인가

코네티컷 휘트니 미술관에서 기획을 한 전시인데, 다른 전시 준비로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 큐레이터 유지니사이에게 전화가 왔다. “두 사람이 비빔밥처럼 갖가지 재료를 섞어 반복적으로 표현하는 공통점을 지닌 것 같다”라며 백남준 선생님과의 2인전 전시를 제안했다. 잠결에 받은 전화라 꿈을 꾼 줄 알았다.

선생님과 2인전 준비를 하면서 있었던 일화가 하나 있다. 당시 독일 뒤셀도르프에 계셨던 선생님께서 휘트니 미술관으로 팩스를 보내 주셨다. '나는 괜찮다. 강익중이 좋은 자리를 얻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I am very flexible. It is very important that Ik-Joong has the better space.’ 라는 단 두 줄의 문장이었다. 진한 감동이 밀려왔다.

백 선생님과 전시 오프닝을 마치고 월가 솔로몬부라더스의 은행장이 우리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식사가 끝날 즈음 백 선생님께서 ‘30세기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라는 질문을 던지셨다. 그리고는 어린 아이처럼 씩~ 웃으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백 선생님은 낮에 별을 보는 분이다' 라고 생각했다. 

국제무대에서 한국을 빛낸 예술가로 손꼽히고 있다. 그 요인은 무엇일까

몇 해 전 뉴욕의 지역 신문에서 재미있는 기사를 읽었다. 뉴욕 트라이보로우 다리의 톨 부스를 지나며 일일이 현금을 낼 때였는데. 유난히 한 줄이 빨리 빠지는 거다. 알고 봤더니 톨 부스에서 일하던 한 분이 미리 잔돈을 준비해서 운전자들에게 계산해 준 거였다.

성공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돈을 많이 벌거나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정직을 바탕으로 자기 일에 대해서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이 성공이다. 

미국으로 가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초등학교 시절을 서울의 이태원에서 보냈다. 지금처럼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라 어릴 때부터 다른 문화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단짝 친구 어머니께서 미군 가정에서 가사 도우미 일을 한 덕분에, 내 또래의 미국 아이들과 공놀이를 하며 자연스럽게 영어를 접하기도 했다. 아주 초보적인 수준이었지만.(웃음)

대학에 들어와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부모님의 짐을 덜어드리려 미국행을 결심했다. 대학 동창들처럼 작가가 되려고 뉴욕에 간 건 아니었다. 1984년 1월 뉴욕에 도착해서 브루클린에 있는 캠퍼스를 둔 프랫(Pratt) 인스티튜트에 입학한 후, 즉시 일을 구했다.

새로운 환경이 신선한 용기를 주었지만,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밤에 델리에서 일하면서 채소를 다듬고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옷가게 점원과 차이나타운에서 시계 노점상으로도 일했다. 지하철을 타고 일터와 학교를 오가는 때가 유일한 자유시간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 시간 동안 지하철 안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궁리 끝에 나온 것이 나의 트레이드마크인 ‘3×3인치’ 그림이다. 나와 내 주변의 모습과 일상의 풍경들을 기록했다. 그 걸 모아보니 지금까지 10만 장이 넘더라. 

   
▲광화문 흥국생명 1층에 전시돼 있는 강익중 작가의 '퀼른 파고다' 작품.

개인적으로 강 선생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이 광화문에 있는 씨네큐브(영화관)가 있는 광화문 모 그룹 사옥 건물에서다. 한글 벽화설치도 인상적이었지만 ‘파고다’라는 조각 작품의 인상이 강렬했다. 단청옷을 입은 남자가 망원경으로 마치 미래를 탐색하고 있는 듯 했다. 내 개인 SNS 중 하나의 프로필 사진으로 사용하고 있다.(웃음) 그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9.11 끝나고 2001년에 만든 작품인데, 그 때의 나를 표현한 것이다. 당시 미국에서 사람들이 거리에서 성조기 흔들고 다니면서, 위협적인 그런 상황이었다. ‘나는 뭔가, 왜 여기 있나? 나는 뭘 바라보고 있나?’ 라는 질문과 함께 스스로 방랑자라는 생각을 하면서 만든 작품이다. 아이이기도 하고, 소년같은 아이인데, 색의 베이스로 단청을 사용한 것은 내 뿌리를 표현한 것이다.

당시 대학원 시절, 뉴욕의 조그만 작업실을 오가며 공부와 작업을 하던 시절이라 작품에 있는 것처럼 가방을 들고 다녔다. 그 가방을 꺼내면 노트북과 도시락, 물통이 있는, 나의 일상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탑은 미국을 상징한다. 그리고 망원경을 통해 나와 세상을 바라보는 스스로의 모습을 상징한 작품이다.

내 작품을 이렇게 사랑해 주시니 감사하다.(웃음) 작품 모형도 내 신체를 그대로 본뜬 것이다. 그 작품에는 하나의 에피소드도 있어 더 기억에 남는다. 작품을 하기 위해 석고를 내 몸에 붙였는데...그걸 떼야할 시간이 조금 지났다. 석고가 가슴을 압박해서 숨을 쉬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만약 석고를 붙인 후배가 조금만 늦게 왔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웃음) 아찔한 순간이었다. 

작가 생활 시작 후 위기가 있었는지? 혹 있었다면 어떻게 극복했는지

누구에게나 슬럼프가 있다. 마치 세상이 나만 빼놓고 혼자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에게 위기는 나보다 큰 나를 보여주려고 할 때 생긴다. 내가 먼지처럼 작아진다면 위기를 통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강익중 작가가 경기도미술관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 달항아리 ‘빨강과 파랑’앞에서 자신의 자작시 ‘이루다’를 낭독하고 있다.

예술가로서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이미 ‘세계적인 작가’라는 명성을 갖고 있지만, 더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가

이름을 남기는 일에 연연하지 말자는 것이다. 배는 강물 위를 지나가면서 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기름이 샐 때만 지나간 흔적이 남는다. 인생이라는 배의 노를 열심히 저었으니, 이제는 잡고 있던 노를 내려놓고 강 건너에 배가 닿을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다.

인생의 배에 오른 예술가에게는 목적지가 따로 없어서 다행이다. 인연이 닿는 곳이 목적지이고, 매순간을 느끼고 감사하는 것이 목적이다. 

요사이 근황이 궁금하다

매일 차이나타운 작업실에 출근해서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을 한다. 아들이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나 아내와 둘이서 뉴욕의 집을 지키고 있다. 그동안 아들 때문에 이런저런 요리를 배웠는데 이젠 주로 밖에서 사 먹고 있다.(웃음)

앞으로 전시계획은?

내년 가을 갤러리 현대에서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9년 만의 국내 개인전이다. 어린이들의 꿈이 담긴 그림과 우리나라 실향민 어르신들의 그림들을 계속 모으고 있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인연이 닿는 전세계 여러 공공장소에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 


이루어진다

                         강익중

마음에 그리면 이루어지고 
종이에 그리면 이루어진다
남을 칭찬하면 이루어지고
나를 칭찬하면 이루어진다
먼저 베풀면 이루어지고
먼저 나누면 이루어진다
웃음을 지키면 이루어지고
초심을 지키면 이루어진다
부지런하면 이루어지고
때때로 여유로우면 이루어진다
마음에 담긴 물이 잔잔하면 이루어지고
그 물에 내가 보이면 이루어진다
무엇보다 사랑하면 이루어진다
이름 없는 들꽃이라도
스치는 바람이라도

 

강익중 프로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 프랫 아트인스티튜트를 졸업한 후 현재까지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으며 백남준 이후 국제무대에서 한국을 빛내는 예술가로 꼽히고 있다. 1994년 휘트니미술관에서 백남준과 〈멀티플 다이얼로그〉전을 열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97년 베네치아비엔날레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특별상을 수상했고 1999년 독일의 루드비히미술관에서 선정하는 '20세기 미술작가 120명'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2001년 UN본부에서 ‘AmazedWorld’ 전시, 2005년 알리센터에 ‘희망과 꿈’을 설치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최근에는 한글 작품을 제작해 전 세계 각지에 전시하거나 기증해 나가고 있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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