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 비운의 두 여인, 국립발레단의‘마타하리’와 유니버설발레의‘니키아’
[이근수의 무용평론] 비운의 두 여인, 국립발레단의‘마타하리’와 유니버설발레의‘니키아’
  • 이근수/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18.11.19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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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수/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가을이 깊어갈 즈음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의 정기공연이 동시에 열렸다. 국립발레단의 초연작품인 ‘마타하리(Mata Hari)’와 유니버설발레단의 레퍼토리 작품인 ‘라 바야데르(La Bayadere)’다.

작품 속 두 여인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마타하리와 니키아가 모두 뛰어난 미모를 지닌 무희(舞姬)였다는 점, 두 여인 모두 권력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비운의 여인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들에겐 목숨보다 더 중요한 사랑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타하리’는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와 독일의 2중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프랑스에서 처형된 전설적인 여인의 예명이다. 여명의 눈동자란 뜻이다. 국립발레단이 이탈리아 안무가인 레나토 자넬리를 초청하여 안무한 ‘마타하리’(10,31~11,4,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는 2016년 발간된 파울로 코넬료의 소설인 ‘스파이(A Espia)’의 줄거리를 따랐다.

나는 김지영과 이재우가 마타하리와 연인 마슬로프 역을 맡은 첫날 공연을 보았다. 사형판결을 받고 침대 하나만이 놓여 있는 음습한 독방감옥에서 그녀는 처형을 기다린다. 대통령의 사면에 걸었던 마지막 기대도 사라졌다. 짧고도 화려한 여인의 삶은 그를 둘러싼 남자들의 배신으로 끝났다. 그녀의 회상 속에 한 남자의 기억만이 오롯이 남았다.

첫 결혼에 실패한 후 자바 섬을 떠나 파리로 진출한 그녀는 뛰어난 미모와 몸매를 바탕으로 무대의 스타로 탄생한다. 장군과 은행가, 정치인들과 폭 넓은 교제를 맺으며 파리 사교계의 꽃으로 등장한 그녀는 베를린과 러시아 등으로 행동반경을 넓혀간다. 전운이 감도는 유럽에서 이것이 그녀의 발목을 잡고 간첩이란 올가미가 쓰여진 그녀의 삶은 결국 총살로서 막을 내린다.  

1막과 2막으로 나누어진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티베리우 소아레(루마니아)가 지휘하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1막)과 5번(2막)을 배경음악으로 한다. 화려하지만 방탕한 사교계의 삶은 무겁고 우울한 10번으로 오히려 어둡게 그려진다. 사교계의 인기를 잃은 후 파리와 베를린을 오가며 가슴 속엔 마슬로프에 대한 사랑을 품고 외롭게 투쟁하는 위태로운 삶은 5번 교향곡의 공격적이고 도발적인 연주로 뒷받침된다.

전반적으로 조명은 어둡고 무대장치는 젠 스타일의 미니멀한 분위기를 풍겨준다. 흑색과 청색 등 어두운 색감과 망사를 주조로 한 의상 역시 단순성을 강조하고 있다. 김지영의 육감적인 춤과 연기가 마타하리의 캐릭터를 잘 살려낸 반면, 마슬로프(이재우), 매클라우드(이영철), 루소(정영재), 라두(박종석), 칼레(변성완), 클뤼네(김명규B) 등 역할이 분산된 남성무용수들의 존재감은 희박했다. 소설의 스토리전개를 급하게 따라가는 숨 가쁜 연출 속에서 20세기 초 파리 무용계를 풍미했던 발레 뤼스(디아길레프) 춤의 편린을 볼 수 있던 것은 다행이다.

연극적 구성을 벗어나 발레무용으로서의 예술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스토리의 과감한 생략과 주인공을 위주로 한 춤의 집중이 필요했을 것이다. 1막에 교향곡 5번을, 2막에 교향곡 10번을 배치하는 방법으로 음악의 순서를 바꿨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라 바야데르’는 인도의 무희란 뜻이다. 유니버설발레단 창립 15주년 기념작으로 세종문화회관 초연 시(1999)에는 문훈숙과 박재홍이 ‘니키아’와 ‘솔로르’를 춤추었다. 비탄과 환희, 배신과 절망으로 이어지는 감정의 곡예를 절묘하게 풀어가는 문훈숙의 솔로와 이어지는 아라베스크 명장면을 보면서 느꼈던 감동이 지금도 새롭다.

올해 공연(11.1~4,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은 원 안무가인 마리우스 프티파 탄생 200주년과 세종문화회관 개관 40주년을 기념하여 세종문화회관(김성규)과 공동으로 주최했다. 볼쇼이발레단 수석무용수인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와 데니스 로드킨이 첫날과 마지막 날(11.1, 4), 유니버설발레단의 홍향기∙이현준(11.2), 김유진∙이동탁(11.3), 강미선∙콘스탄틴 노보셀로프(11.3)가 나머지 3회 공연의 주역을 맡았다.

나는 둘 째 날 공연을 보았다. 세간의 관심이 러시아 초청무용수인 자하로브∙로드킨 캐스팅에 집중되어선지 이날 주역들은 힘을 잃었고 긴장감이 떨어진 무대는 전반적으로 산만했다. 관객들을 흡인할 카리스마를 지닌 토종 발레스타의 발굴과 육성이 절감된 공연이었다.

코끼리가 등장하는 거대한 무대규모, 온 몸을 금색으로 치장한 황금신상의 춤, 출연자들의 화려한 이국적 의상 등 볼거리와 함께 3막(망령들의 왕국)에서 느린 아다지오 음악에 맞춰 우아하게 반복되는 32명 백색 발레리나의 아라베스크가 작품에 대한 인상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