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기획] 탑골공원, 홀대받는 서양음악의 산실(1)
[테마기획] 탑골공원, 홀대받는 서양음악의 산실(1)
  • 강인/문화예술평론가, 한국경제문화연구원 전문위원
  • 승인 2019.02.18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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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문화예술평론가, 한국경제문화연구원 전문위원

1904년에 조성된 탑골공원(사적354호)은 한국 근,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名所)다. 
이곳은 서울의 가장 중심지인 종로 3가에 위치한 1만 5천여 제곱미터의 작은 공간이지만 그 안에는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10층 석탑’, 보물 제3호인 ‘원각사비’ 등의 소중한 유형 문화재와 여러 무형의 문화유산을 소유한 보고(寶庫)다.

아마도 국보 제1호인 ‘남대문’은 거의 모든 국민이 알고 있지만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국보 제2호인 것과, 그것이 탑골공원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탑골’이라는 명칭도 당시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 ‘백탑(白塔)’이라 불렀던 원각사지 10층석탑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곳은 본래 고려시대에 세운 ‘흥복사(興福寺)’를 조선시대 세조가 ‘원각사(圓覺寺)’로 개명하였고 그 후 연산군에 의해 연방원(聯芳院)이라는 기생방으로, 조선후기 한 때는 지식인이 모이던 장소로, 대한제국시대에는 고종황제의 명(命)으로 지정된 최초의 서양식 도심공원으로, 일제강점기인 기미년(1919년)에는 3,1운동의 발상지로, 또한 일본 총독부에 의해 ‘승리(勝利)’라는 이름의 요정(料亭)으로 사용되는 등 숱한 변천을 거듭하였다.

▲ 1906년 10월 6일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프란츠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가 군악대에 의해 최초로 연주된 후 찍은 기념사진(앞줄 중앙에 서 있는 사람이 군악대장 ‘백우용‘, 그 옆에 중절모를 쓰고 서 있는 사람이 ’에케르트‘이다)

이러한 귀중한 사적지인 탑골공원이 수난과 오욕을 동반한 역사적 변천과, 귀한 것을 귀하게 보지 못하는 무지와 무관심으로 인해 그 빛을 잃은 채 홀대받는 ‘잡(雜)골’로 변모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탑골공원은 각종 잡다한 변화들이 끊이지 않았다

1956년에는 공원 안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동상이 세워졌으나 4.19 혁명 이후 군중들에 의해 철거되어 종로거리를 끌려 다니는 참상을 겪었으며, 1963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3,1운동 기념탑’을 세우고 ‘삼일문’이라는 자신의 친필 현판을 남문(南門) 출입구 상단에 부착했으나 기념탑은 1979년 신군부에 의해, 현판은 2001년 ‘한국민족정기소생회’라는 단체에 의해 새벽녘에 기습적으로 철거되었다. 그 후 지금의 ‘삼일문’ 현판은 ‘독립선언서’ 원문에 쓰인 글씨체로 바꾸어 부착해 놓은 것이다.

1967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공원 담장의 절반을 헐어 북서쪽과 동쪽 일부지역을 둘러싼 말발굽 모양으로 2층의 상가건물을 건립하였는데, 이 상가가 이른바 ‘파고다아케이드’로서 탑골공원 주변은 종로 최대의 상업지구로 변하게 된다. 이로 인해 공원은 전체면적의 1/4이 도로확장으로 잘려나가고 동서남북 4문 중 동서북 3문이 폐쇄된 채 ‘남문’만 원래의 자리를 옮겨 개방됨으로 사적(史蹟)으로 지정된 탑골공원은 흉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파고다아케이드는 1983년 사적지의 경관(景觀)과 도시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전두환 정권에 의해 철거되었다.

그 이후 1990년대에 이르는 동안 탑골공원에 대한 관심이 점차 사라지며 이곳은 노년층의 휴식 전유공간이 되었고 오늘날에는 일명 ‘박카스아줌마’가 활보하는 노인퇴폐의 온상으로서 젊은이들과 수준 있는 시민은 물론 인근 인사동 전통문화의 거리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까지도 기피하는 부끄러운 장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나라 서양음악의 산실(産室)
 

앞서 탑골공원의 변천사를 요약해서 살펴보았다. 

탑골공원이 우리민족에게 소중한 무형의 정신적 유산인 것은 이곳이 3,1운동의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이로서 탑골공원은 민족정기의 상징적 장소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탑골공원의 역사적 기억을 3,1운동의 발상지에 국한시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도 이곳의 성격을 ‘독립유적지’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탑골공원의 역사적 가치를 간과하는데서 오는 관념적 오류이다.

서양음악의 전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국민들이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국보 제2호인 것과 그것이 탑골공원 안에 있다는 것을 잘 모르듯이 아마도 탑골공원이 ‘우리나라 서양음악의 산실’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서양음악이 전래된 것은 1892년 고종황제를 통한 대한제국 군악대 설치령에 의해서이다. 당시 일본의 세력은 조선의 명성황후 시해 후 더욱 고종을 압박하였고 이에 대한 친러(親露) 세력의 반발로 결국 고종은 거처를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는 소위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하게 된다.
그로부터 3개월 후 고종은 러시아 군대 파병 요청을 위해 러시아로 ‘충무공 민영환’ 특사 일행을 파견하였다. 이에 따라 민영환은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레닌그라드)에서 거행된 ‘니콜라이 2세’의 황제 대관식에 참석, 러시아 군악대의 연주를 보고 귀국하여 고종에게 군악대 창설을 제안, 허락을 받으므로 1900년 12월 19일 ‘칙령 제59호’에 의해 역사적인 대한제국 군악대가 탄생되었다. 이로 인해 최초로 이 땅에 서양음악의 씨앗을 심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음악계의 잊을 수 없는 은인 ‘프란츠 에케르트’

▲ 프란츠 에케르트

이에 따라 군악대를 이끌어갈 인물로 독일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Franz von Eckert)’를 초빙하기로 결정, 당시 외무대신 ‘박제순’이 서울에 주재하던 독일영사 ‘하인리히 바이페르트(Heinrich Weipert)’를 찾아가 요청했고 이를 수락한 에케르트는 1901년 2월 19일 제물포를 통해 서울에 도착, 같은 해 4월 5일 군악대 교사로 3년간 고용계약을 맺었다.

프로이센(Preussen) 왕립 악단장을 지낸 에케르트는 앞서 독일 해군 군악대 지휘자로 근무하던 시절인 1879년, 일본에 파견되어 서양음악을 전해주었다. 특히 일본 군악대와 황궁의 고전음악부를 위해 일했으며 도쿄의 황실 가족들을 위한 오케스트라를 조직해 지도하였고 초등학교를 위한 음악도서들을 편찬했다. 더욱이 특기할만한 것은 1880년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작곡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당시 대한제국에도 익히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프란츠 에케르트는 고종의 초청에 의해 가족과 함께 내한하면서 50인조의 군악대가 사용할 각종 관악기, 타악기들을 가지고 왔다. 그는 대한제국의 군악대 창설은 물론 한국인에게 서양음악을 전수함으로 우리나라 음악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1902년에는 고종의 요청으로 최초의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또한 친북 작곡가 ‘윤이상’도 에케르트가 군악대원으로 선발하여 가르친 제자 중 한명인 바이올리니스트 ‘최호영‘으로부터 1933년부터 2년간 화성학, 대위법 등 음악이론을 배운바 있다.

만일 프란츠 에케르트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음악계의 오늘날과 같은 발전과, 음악을 통해 세계적으로 대한민국의 국위를 선양할 수 있었을까? 특히 1907년 군대해산에 따라 군악대도 해산 되었지만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민간 음악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양악대를 만들어 지속적인 공연활동을 전개했고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에도 한국음악계를 위해 헌신하다가 위암으로 투병 중 1916년 8월 6일 타계, 평소 본인의 희망대로 한국 땅에 묻힌 우리 음악계의 잊을 수 없는 은인이다.

당시 매일신보는 “악계은인(樂界恩人)의 장서(長逝)”라는 제하의 애도기사(1916년 8월 8일자)를 게재하기도 했다.

▲ 당시 매일신보 기사(1916년 8월 8일자)

순종황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거금 100원을 하사했고 장례식은 그가 직접 조직하여 지도하던 악단의 연주 속에 명동성당에서 치러졌으며 유해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동양에서 최초로 활동했던 일본보다 한국을 특별히 사랑했던 프란츠 에케르트는 자신 뿐 아니라 딸의 가족과 손녀 까지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을 위해 그들의 삶을 바쳤다. 딸 ‘아멜리에(Amelie Eckert)’와 결혼한 사위 ‘에밀 마르텔(Emile Martel)’은 당시 경성제대 프랑스어 교수로 재직하였는데 그도 사후 에케르트가 묻힌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으며,  6,25전쟁 때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을 당하다가 국제사회의 중재로 풀려난 외손녀 ’임마꿀라따(Immaculata Martel)’ 수녀는 독일로 귀환되었다가 다시 돌아와 대구 성 베네딕트 수녀원에서 사역 중 81세 노환으로 1988년 12월 5일 선종하였다.

▲ “한국에 바친 3대” 제하의 한국일보 기사(1968년 8월 10일자)

이렇듯 프란츠 에케르트는 3대에 걸쳐 한국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서 우리 음악인은 물론 국민 모두가 잊어서는 안 될 은인이다. 

국내 최초의 음악학교 개설

고종은 황실군악대 육성을 위해 탑골공원 서북쪽 부지에 별도의 건물을 짓도록 명(命)하고 그곳에서 에케르트로 하여금 서양음악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학교였다. 에케르트는 여기서 당초 27명의 군악대원을 교육시키기 시작했다.

그들은 오전에는 음악이론과 악보 보는 법을 교육받았으며 오후에는 악기 연주법 습득을 위해 맹훈련을 받았다. 그 결과 군악대는 약 6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1901년 9월 7일, 고종의 50회 생신인 만수성절(萬壽聖節)에 경운궁에서 연주함으로 외교사절들의 극찬가운데 서양음악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당시 유일한 영문 잡지인 ‘더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는 “이번 축하연에는 많은 내외 귀빈이 참석하였는데, 황제의 탄신을 축하하기 위하여 지난 9월 7일 아침 궁정에 참석한 외국 손님에게 특히 기억될만한 순서는 새로 조직된 군악대의 첫 출연이었다. 이 악대는 에케르트 박사의 지도로 훈련을 받았으며 총 27명의 대원으로 단지 4개월 남짓의 연습으로 외국악기를 그렇게 훌륭하게 연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 (1924년 3월 4일자)

정확한 박자, 흐르는 듯한 리듬과 하모니, 이런 모든 것이 한데 어울려 상상 밖의 효과를 내었으며 청중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박수갈채는 그칠 줄 몰랐으며 이대로만 간다면 머지않아 동양에서 경쟁할 다른 악대가 없을 것이다”라는 기사로 이날 연주에 대한 모습을 전했다.

더욱이 군악대의 당시 연주에 대한 평가는 영국 런던타임스의 ‘헐버트(H. B. Hulbert)’ 기자가 보도한 “조선은 음악천재”라는 제하의 “조선의 군악대는 설립된 지 불과 몇 해밖에 되지 않아 그 학습한 곡종(曲種)은 많지 않으나 주법(奏法)은 영국의 빅토리아 군악대나 미국의 수사군악대 보다 못하지 아니하다.”라는 호평의 기사(동아일보 1924년 3월 4일자)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러일전쟁 직전 궁중 연회석상에서 일본 대리공사 ‘하야시’는 러시아의 ‘바울’ 공사에게 “조선사람과 일본사람을 비교하면 누가 음악적으로 우수한가? 라고 질문했을 때 바울 공사는 ”조선사람의 음악적 재질은 동양 제일이라 일본사람과 비교할 수 없다.“ 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당시의 평가를 감안할 때 현재 우리나라 음악인들의 세계무대 제패가 우연이 아님을 실감케 한다.

그러나 1907년 8월 1일, 군악대는 해산되었지만 같은 해 9월 1일 악사 101명의 황실음악대로 재조직, 궁내부 장례원에 편입되었고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에 의해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면서 장례원 소속 음악대는 이왕직(李王職)악대로 부속되었으나 고종이 사망한 해인 1919년 9월 해산되고 말았다. 그 후 양악대는 같은 해 10월, 부지휘자 격에 있었던 ‘백우용(白禹鏞)’을 중심으로 ‘경성양악대(京城洋樂隊)’라는 이름의 민간단체로 재탄생,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강당에서 제1회 연주회를 가진 이후 1920년 6월 1일부터 시민을 위한 연주회가 탑골공원에서 매주 한 번씩 저녁시간에 열리게 되었다. 

이 경성양악대는 국내 최초의 민간오케스트라로서 우리나라 교향악단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고려교향악단’(1945년 10월 창단)에 이어 3년 뒤인 1948년 말에 창단된 ‘서울시립교향악단(Seoul Philharmonic Orchestra)’의 모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