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수상자 인터뷰] 손연칠 동국대 명예교수 “조선불화 모방은 그만, 지금 대중에 호응받을 불화 그려야”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수상자 인터뷰] 손연칠 동국대 명예교수 “조선불화 모방은 그만, 지금 대중에 호응받을 불화 그려야”
  • 임동현 기자/차유채 인턴기자
  • 승인 2019.03.18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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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오랜 숙련이 기초, 전통과 현대 같이 배우고 그것을 스스로 깨는 것이 창조”

‘불화의 현대화’. 손연칠 명예교수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다. 그는 지금도 ‘불교미술의 현대화’를 이야기하고 그것을 알리는 데 전력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모작에만 머물러있는 불교미술을 현대인들이 바로 감동할 수 있는 작품으로 승화시키려는 그의 노력은  ‘외로운 길’로 시작했지만 이제 ‘가야할 길’로 바뀌어가고 있다.

본지 서울문화투데이가 올해 손연칠 명예교수에게 문화대상을 수여한 것도 바로 불교미술의 현대화를 이끌며 한 길을 간 장인에게 주는 존경의 표시였다. 전통이 가장 기본이 되어야하고 그 전통을 알아야 창조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손연칠 명예교수가 전하는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주고 있었다.

▲ 손연칠 동국대 명예교수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셨다는 걸 알았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송구스럽지(웃음). 기회를 주니 영광이고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격려의 차원에서 주신 것 같았다. 그동안 외로운 작업을 해왔는데 이렇게 상을 주시니 얼마나 고마운가(웃음). 서울문화투데이가 동양 회화의 한쪽 길을 줄 곳 걸어온 나와 같은 사람을 찾아주어 감사하다.

‘불교미술의 현대화’를 추구하신 것으로 유명하신데, 현대화의 의미는?

중요한 문제다. 건축 예기부터 시작 해보자. 중국의 대학에서 건축교육은 우리와 달리 1,2학년 기초부터 전통 건축을 먼저 가르치고 3,4학년이 되어야 현대 건축을 가르친다. 전통의 기반을 매우 중요시 여긴다는 뜻이다. 

일본의 동경예술대학 미술학부의 예가 있다. 그 학교의 전신인 동경미술학교가 1887년에 설립된다. 그들은 유신 이래 정부가 취한 유럽 화 정책에서 쇠멸의 위기에 처한 “전통미술의 창조적 부흥”을 모토로 오쿠라 텐신 같은 이들의 주장을 받들어 처음 개교하게 된다. 회화과는 고화임모 과정에서 불화를, 조각과 에서는 전통 목조불상에 대한 수업과 미술공예과에서는 전통 옻칠공예도 가르쳤다.

동경예술대학과 쌍립을 이루고 있는 교토 시립예술대학에서도 불화와 불상 조각을 지금도 수업하고 있다. 전통을 먼저 연마한 후, 현대적 감각을 동반해야 전통의 올바른 계승 적 가치가 살아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 어느 대학도 전통의 중심이 돼왔던 불교미술을 전혀 가르치지 않았다. 1971년에 이르러서야 동국대학교에 유일하게 불교미술학과가 생겼는데 내가 그 1기생이다. 그 당시는 대학에서 불교미술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학생으로서 얼마나 혼란스러웠겠나. 

이 부분에서 일랑 이종상 선생님에 대한 언급을 안 할 수가 없다. 동국대학을 졸업하고서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때부터 고려불화의 전통기법도 공부 할 수가 있게 되었다. 더불어 시대정신의 가치에 대한 중요성도 알게 된다. 소위 전통에 대한 학습부터 시작한 그 1 세대가 난데 이에 대한 자부심과 더불어 책무감이 무겁다. 그 덕에 이번에 상을 받게 된 것 같다(웃음).

왜 불교미술인가?

불교는 우리의 정신문화와 오랫동안 함께 했으며 그에 따른 불교미술이 전통의 맥을 이어왔다. 서양이 기독교를 중심으로 미술이 성장했던 것처럼, 동양은 거의 불교미술이었다. 전통 미술에서는 종교 미술을 떼어놓을 수 없다.  

현대라는 의미는 시대적인 감각이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의 대다수 우리나라 사찰을 보면 불상이나 불화가 조선시대 것을 거의 복제하고 있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불교의 근본역시 변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불교미술은 신도들을 교화시키는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신도들 또한 변하고 있는데, 고려시대, 조선시대 그리고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이 다 다르지 않나. 현대적인 교화의 방식이 필요한 것이다. 

일본의 경우 천년고찰임에도 불구하고 현대 일본화단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들이 사찰벽화나 불상을 조성한다. 30여 년 전, 어느 유명 사찰의 벽화를 변화시켜 보려고 일랑 선생님까지 동반해서 현장에서 설득을 했는데 그 꿈(?)을 못 이뤘다. 아주 아쉽다. 우린 언제쯤 그게 가능할지... 

전통을 현대화 한다는 것을 모순으로 보는 시선도 존재한다

매우 좋은 질문이다. 불교미술 자체의 기본적인 형태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표현 방법은 변해야 한다. 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조선시대가 다르듯, 이시대의 독창적인 테마가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모든 사찰은 조선시대 따라 그리기에 불과하다. 

대학의 미술교육은 반드시 역사의식과 함께 창의성을 매우 중요시 한다. 이를 위해서 옛날 것을 모사하고 공부하는 것은 곧 창조를 위한, 올바른 전통 계승의 밑거름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복원이나 모사하고는 개념이 다르다. 전통이란 기술이 아니라 곧 정신의 계승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유명한 피카소도 달리도 고전에 대한 오랜 수련의 기간이 있었다는 점이다. 

흥미로운 게 있다. 이번 문화대상 같은 경우는 전통음악이나 춤과 같은 영역에서 이력을 보니 매우 훌륭한 분들이 수상을 했다. 이런 분들이 인간문화재가 되어야 하고 당연히 각광을 받아야하는 이유를 알려줄까? 춤과 소리는 행위를 하자마자 그 형태가 사라진다. 녹화를 하든 어떠한 수단으로 기록을 해도 그것은 오리지널이 아니다. 기록상의 문제로 재현의 한계가 있게 된다. 때문에 인간과 인간을 통해서 만이 그것은 계승되어야 하고 그리 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다. 

그래서 인간문화재라는 재도의 존재가치가 특별하다. 여기에서도 요점이 있다. 일본의 가부키를 보자. 똑같은 행동을 숨소리까지 틀림이 없도록 가르친다. 그렇게 혹독한 수련을 30여년을 넘게 시키다. 그런데도 결국은 자기의 개성이 우러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본이 되면 저절로 자신의 개성이 나오고 비로소 그것이 올바른 전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미술은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평소의 나의 소신이지만 공개적으로 이에 대한 주장을 발표하는 것이 처음이라 매우 조심스럽다. 이는 불교미술 쪽의 저의 스승도, 사형도, 오랫동안 친분이 있는 여러 분야의 많은 사람들이 현존하는 인간문화재분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 이에 대하여 우리가 함께 검토해 보자. 왜냐, 역사적으로 불교미술을 조성한 사람은 죽어 이 세상에 없지만 그가 제작한 작품이 현존해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를 들자. 겸재 정선이 그린 금강전도가 있다. 대학에서도 한번쯤은 모사를 시킨다. 그러나 그것을 똑같이 그리고 수련한 사람을 인간문화재로 지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불교미술 또한 예술의 한 영역이지, 옛것을 복재하고 기능이나 손재주만을 앞세우는 그러한 수준하고는 전혀 다름에 대한 인식이 절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인간문화재가 된다는 외형적  명예가 오히려 스스로의 자신을 격하 시키는 일이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술이라는 가치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선시대 단청에서도 각 사찰마다 개성적인 장인들에 의하여 독창적인 문양들을 창출하고 있는 예가 허다하다. 그러한 정신의 계승이어야 만 한다. 최근에 초상화와 사경체를 쓰는 서예가가 인간문화재로 지정받고 싶어 움직이는 이들이 있다고 들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문화재청의 올바른 판단을 기대 한다. 

▲ 천수천안 150x100cm. 1995.

한국 불교미술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불상을 예로 들면 인도의 간다라 미술은 서구와 동방의 문화가 합쳐진 매우 독자적인 양식을 낳았다. 중국, 한국, 일본. 심지어 동남아로 갔을 경우, 표현하는 모습이 모두 달라진다. 주체는 변하지 않지만 지역과 시대에 따라 표현이 변화하는 것이다. 

고려의 불교미술은 굉장히 고급스럽다. 고려와 조선 모두 국가적 차원에서 불교미술이 만들어졌는데 전반적으로 조선보다 문화 양식이 뛰어나다. 물론 최고는 통일신라시대다. 

조선시대는 보다 양식화 되어버리고, 예술적인 부분이 한계에 이르면서 기법 위주로 이어지게 됐다. 초기에는 고려시대 전통이 꽤 남아있어 괜찮은 편인데 임진왜란 이후 불교미술 전반이 형식화되고, 결국 구한말에 가게 되면 예술의 꽃이 피지 못하게 된다. 

예술인들이 천대받기 시작하면서 모든 분야의 맥이 끊어졌다. 이때 유행하게 된 것이 민화라는 독특한 분야다. 교육 받지 않았으면서도, 면면히 이어진 우리의 예술적 근성이 드러나는, 아니 드러날 수밖에 없는 행태의 유산이 곧 민화의 진정한 가치라고 본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불교미술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나? 

지금 이 시대의 대중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는, 불교가 어떠한 것인지 설득할 수 있는, 조선시대의 대중을 설득하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불화가 그려져야 한다. 딱 그게 목적이다. 지금 사람들에게 조선시대 불화를 보여주면 바로 감동이 온다고 생각하는가? 

‘지금의 사람들이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불교미술’이란?

'감로탱화'라는 것이 있다. 쉽게 말하면 조선시대의 사회상을 그려 불교의식에 쓰도록 하는 것이다. 원래 지옥에 떨어진 중생의 승천을 위해 그려진 그림인데 호랑이에 물려죽거나 집짓다가 죽은 사람 등이 등장한다. 근년에도 감로탱화를 그릴 때 면 소위 전통이라는 미명아래 조선시대 풍습과 조선시대 옷을 입은 인물들을 그리고 있다. 

감로탱화를 현대화 시켜서 첫 개인전에 공개했다. 성수대교 무너지는 것, 삼풍백화점 무너지는 것, 자동차 사고 난 이들의 영혼을 천상으로 인도하는 내용으로 그렸다. 이 시대에 맞게끔 풀어야 하는 것이다.

30 여년전 안동에 소재한 한 사찰의 벽화에서 동료 교수들과 합작으로 '심우도'에 청바지, 미니스커트 등을 입은 인물을 넣기도 했다. 당시 중앙 일간지 문화면 전채에 나온 기사 제목이 '사찰 벽화 천 년 만에 변하다'였다. 그만큼 불교미술이 시대적 정신이나 변화가 없었다는 거다. 

스승인 일랑 이종상 선생, 임권택 감독 등의 초상화를 인상적으로 본 기억이 있다. 어떻게 초상화를 하게 됐는지

불교미술을 처음 공부하면서 느낀 점은 결국 인물화에 대해 제대로 공부를 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길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불 보살상들이 인물의 의인화이기 때문이다. 이를 간절히 꿈꾸고 있을 때 일랑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벌써 40여년이 지난 옛 얘기가 되어버렸다. 

그림 중에서 초상화가 가장 어려운 분야다. '북채'(배채, 뒤에서 채색하는 것)라는 기법과 용어도 그때 일랑 선생님께 처음 배웠다. 자기 제자들에게만 가르쳐 주려고 배채(背彩)에서 달 월(月)을 빼서 북채(北彩)라고 한 것이다.

육리문법 이라는 것도 있다. 얼굴을 표현하는 전통 방식으로 피부 결 따라 붓질을 매우 섬세하게 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도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것인데 '내가 오만원권 화폐를 육리문법으로 그렸다. 보였느냐? 너 스스로 연구하라'고 화두를 던지셨다. 고기를 잡아주지 않고 잡는 방법을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평소 선생님의 교육 방법이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초상화에 대한 책이나 이론서가 무척 많이 나와 있다. 이에 대한 글들을 읽어보니 아쉬움이 많다. 남쪽을 향해 앉아 어진을 그리기에 북쪽이 등이라는 뜻으로 '북채'라는 말이 나왔다는 등,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모든 이론가들이 동일하게 배채의 목적에 대하여 주장한 내용은 '천의 뒷면에서 얼굴 채색을 해주면 색이 은은하게 배어나와 이의 효과를 위한 것‘이라는 것과 '채색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목적'이라는 등, 크게 두 가지를 설명하는데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인물화는 무엇보다 먼저 대상 인물의 얼굴 피부를 나타내는 표현기법이 매우 중요하다. 모든 화가들에게는 이 문제에 대해 무척 고심하게 된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특히 얼굴부분에서 배채법을 창출하게 된다.

즉 미리 배첩(배접)된 상태를 감안하여 종이로 배접을 한 효과 대신, 배채를 하고 앞면에서 설채하는 방법을 고안한 것이 바로 배채법이다. 효과는 같을 지라도 원인에 대한 설명이 전혀 다르다.

초상화는 외형뿐만 아니라 내면의 정신까지도 담아내는 것이 기본이다. ‘전신사조’라는 중국의 고사가 있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인물에 대해 내면적인 정신, 즉 신을 체득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를 선생님께서는 ‘접신’이라고 항상 강조하신다. 그게 초상화의 어려움이다. 

선생님께 '반개'라는 것도 배웠다. 반개란 눈동자를 표현 하는데 있어 자기 자신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는 매우 높은 경지의 내공을 표현하는 전통기법중 하나다. 조선시대 어진화가들의 작품에서 반개법이 자주 등장한다. 일랑 선생님의 초상화에는 꼭 반개법이 들어간다. 

여기에서 하나 덧붙이자. 석굴암의 본존상 눈에도 반개가 뚜렷하게 조각되어 있다. 고려시대 불화에도 반개법이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불화에는 거의 반개가 들어가지 않는다. 손재주만 있고 이론적 바탕의 맥이 전반적으로 끊긴 것이고 볼 수 있다. 이런 걸 내가 일랑 선생님께 배웠으니 얼마나 큰 행운인가?(웃음)

일랑 선생님으로부터 불화를 공부할 수 있었다는 것이 매우 생소하게 들린다

수십년전 일본 나라박물관에서 처음으로 전국에 흩어져 있는 고려불화들을 모아 특별전을 연 적이 있다. 그 당시 황수영 박사와 일랑 선생님께서 국비로 전시회를 참관하시고 많은 자료를 내게 주셨다. 두분 다 은사이시니 내게 얼마나 큰 행운인가. 

그때 고려불화를 모사하면서 선생님께 지도받은 그 감동과 충격이 엊그제같다. 당시 어느 인간문화재 되시는 분이 일본불화를 공부하는 것이냐고 꾸중하시던 기억도 새롭다. 

▲ 지난 1월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시상식에서 스승인 일랑 이종상 선생(왼쪽)이 제자 손연칠 명예교수에게 문화대상을 시상했다.

인터뷰 중에도 계속 언급될 정도로 지금의 선생님을 만든 것이 스승인 일랑 이종상 선생님이다. 이번 문화대상도 일랑 선생님께서 시상을 하셨는데 선생님에게 일랑 선생님이란?

거의 신과 같은 존재다. 어떤 행동을 해도 선생님 생각부터 난다. 나를 정말 많이 혼내셨고  지금도 혼난다. 선생님께는 나보다 더 훌륭한 제자들이 수두록 하다. 아까도 연락이 와서 한참을 혼내셨다. 이는 그 많은 제자들 중에 저가 가장 나이가 위기 때문에 겪어야 되는 숙명이다.(웃음). 아직도 내게 꾸지람을 주시는 선생님이 계시다는 건 매우 큰 영광이다. 

처음 공부를 시작 할 때, 저에게 주신 첫 당부의 말씀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먼저 인간이 되라”였다. “네 바탕이 먼저 깨끗해 있어야 한다. 네가 깨끗하지 않으면 그 그릇에 내가 아무리 맑은 물을 부어도 결국 내 물까지 흐려지게 된다”는 말씀이셨다. 

젊었을 땐 젊은 혈기에 선생님의 말인데도 '이건 아닌데'하며 이겨보고 싶은 생각을 했을 거 같은데 어떠셨는지?

(웃음) “너희들은 나한테서 배우지만 나랑 똑같은 그림을 그려서는 안 된다”고 늘 가르치셨다. 지금 그 많은 제자들 중에 선생님과 똑같은 그림을 그린 사람은 하나도 없다. '똑같이 그리면 너희도 죽고 나도 죽는다'는 게 기초를 연마할 당시 스승의 가르치심 이었다. 그게 전통음악이나 춤하고는 다른 미술의 예술적 가치다.

일랑 선생님 이외에도 작가에게 큰 영향을 주신 분은?

대학 때부터 지금까지 불교에 대한 공부를 도와주신 많은 스님들이 계신다. 불교미술의 이론을 가르쳐 주신 동국대학교 은사 황수영 총장님. 김동현 교수님. 불상조각에 대해 많은 영향을 주신 고 김영중 선생님의 은혜도 잊을 수가 없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부분은

전통에 대한 오랜 숙련이 기초가 되어야만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그릴 것인지 현재와 미래를 알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배웠던 전통을 다시 깨부수어야만 새로운 것을 추구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지금 우리 미술이 새로운 활로를 찾으려면 어떤 노력이 있어야할까?

동양 3국 특히 중국과 일본은 그들의 미술에서 자기들만의 정채성이 짙게 드러난다. 우리는 근년에 이르러 많은 대학에서 동양화과가 소멸되고 있는 실정이다.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을 동시에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매우 드물다는 점이 아쉽다.

전통을 바탕에 둔 창의성이란 어디서부터 오는가. 의식적으로 개성을 표시하려하면 바닥이 얕아진다. 창조적 행위란 그 전통의 기초를 배면에 두되 그것을 전면에 드러내서는 안 된다. 억제하고 억제한 밑바탕에서 자기도 모르게 절로 나오는 것이 진정한 개성이라는 생각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한국적 또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은, 그 길이 너무나 멀고 심오하기에 오늘을 사는 모든 작가들에게는 외롭고 고단한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만의 독자성을 가진 개성적인 화풍을 찾아가는 실험을 계속 하고 싶다.

또한 근년에 남대문 단청사건이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었다. 난 대학 재학시절 줄 곳 단청현장에서 아르바이트로 학업을 이어갈 수가 있었던 깊은 인연이 있다. 졸업 후, 경주 안압지의 신라단청 복원작업에서도 책임자로서 소임을 다한 경험이 있다. 대학에 재직하다보니 단청현장하고는 멀어 질 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남대문 사건은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학교에서 퇴임 하고, 바로 일본에서 1년 반 동안을 일본단청 현장에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그동안 문화재청에서도 한국 전통단청의 복원에 대하여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많은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저도 자문위원으로 있으며 다시는 남대문 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힘을 보태고 있다. 

끝으로 고유섭 선생이 남긴 한마디를 꼭 하고 싶다. ‘전통이란 받고 싶다고 해서 받아지는 것이 아니고 주고 싶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건 오직 피와 피로써 혼신을 다하여야만 이룩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