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딱지
[연재] 딱지
  • 김준일 작가
  • 승인 2009.10.15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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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손님 (2)

옛날에는 밥에다 냉수 한 그릇만 떠 놓고 빌어도 애기를 점지했는데 삼신할머니도 이제 돈을 밝히는 세상이 되고 말았어.

정구가 그렇게 투덜거리는 것을 끝으로 아기 얘기는 쑥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다만 서로 사랑을 나눌 때마다 자궁 안에서 건강한 난자와 건강한 정자가 극적으로 만나 주기를 기대할 뿐이었다. 사정이 그런 줄도 모르고 회장은 공연히 미순의 아픈 곳을 건드려 인심만 잃은 셈이다.

그 회장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일산 장날이었다. 일산장터까지는 버스로 세 정거장, 걸어서도 십분이 채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였다. 그러나 학동 여자들은 장날을 기다렸다가 떼를 지어 장을 보러 다녔다.

장날을 모르고 살던 정구와 미순에게 그것은 좋은 구경거리이자 재미있는 나들이가 되었다. 우선 장마당에 넘쳐 흐르는 활기와 흥청거리는 분위기가 좋았다. 안 그래도 좁은 장터가 장날이면 만원버스 속처럼 북적거린다. 장꾼들은 꼭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고함을 지르고 손뼉을 치면서 흥을 돋군다.

장바닥만 그런 게 아니고 주변 도로까지도 장꾼들이 몰고 온 트럭과 봉고차들이 뒤엉겨 몸 하나 빠져 나가기도 힘들 지경이 된다. 빵빵거리는 경적과 호루라기 소리, 악을 쓰는 소리 때문에 꼭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 같다. 하지만 그 북새통에서도 손바닥만 한 틈만 있으면 좌판들이 비집고 들어온다. 근처 마을에서 보따리 보따리 싸 들고 온 농민들이다. 학동 여자들이 단골로 찾는 것이 바로 그런 좌판들이다.

장보기야 미순의 일이지만 정구한테도 금방 단골이 생겼다. 다만 그것이 좌판이 아니고 장꾼들이 끌고 나온 동물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 동물들이 모이는 장소는 장터의 쓰레기 하치장 옆이다. 그곳에 가면 소나 돼지처럼 덩치가 큰 놈을 빼놓고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동물들이 다 모여 있다.

개와 고양이, 염소, 토끼, 닭, 오리, 꿩, 거위, 메추라기에다 재수없이 잡혀 온 오소리와 고슴도치, 뜸부기까지 임자를 기다린다. 미순이 동네 여자들과 장을 보는 동안 정구는 그곳으로 직행한다. 손에는 오징어 다리 천 원어치가 들려 있다. 우선 그 작은 동물원을 찬찬히 한 바퀴 돌아 본다. 그리고 쪼그려 앉는 곳은 언제나 강아지 우리 앞이다.

모든 짐승새끼들이 다 그렇지만 강아지는 아무리 오래 들여다보고 있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기운이 넘쳐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찬구들을 괴롭히는 놈, 우리를 넘어 보겠다고 낑낑거리는 놈, 처음부터 아예 잠만 자는 놈들이 오글거린다. 그러다가 정구가 오징어 다리 한 개를 뜯어서 던져 주면 한바탕 대소동이 벌어진다.

진도에서 몰래 반출한 진짜 순종입니다. 싸게 드릴 테니까 한 마리 골라 보세요.

처음에는 그렇게 정구를 반기던 개장수들도 이제는 또 오셨네 하고는 다 안다는 듯이 씨익 웃고는 그만이다. 맨입으로 오지 않고 오징어 다리라도 들고 오는 구경꾼이 밉지 않았을 것이다.

정구는 그 강아지들 가운데서 마음에 드는 놈을 두어 마리 골라 본다. 언젠가 마당이 있는 집을 마련했을 때 사다 기르겠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나면 미순이 온다. 그런데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그 옆에서 개고기도 함께 판다는 점이다. 혓바닥을 악문 채 시커멓게 그을려 있는 머리와 토막낸 살코기를 볼 때마다 정구는 어쩔 수 없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개들의 운명에 동정한다거나 동족의 식성을 미안하게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 자신이 강아지를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신탕도 아주 좋아한다는 모순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구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강아지를 참 좋아하시는군요.

웬 여자 목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바로 회장이었다. 정구는 무슨 잘못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얼굴이 벌개졌다. 멀쩡하게 생긴 사내가 마누라 따라 장에 나왔다가 강아지나 구경하고 있는 꼴을 들키고 만 것이다. 그러나 회장의 둘러 대는 솜씨는 대단했다.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이 없다는데 참 보기 좋은 장면이네요. 어른이 돼서도 동심의 세계에서 산다는 건 정말 아무나 못 하는 일이지요.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