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사 근대기 6人 작품세계 재조명, 《근대미술가의 재발견1: 절필시대》展 개최
한국미술사 근대기 6人 작품세계 재조명, 《근대미술가의 재발견1: 절필시대》展 개최
  • 김지현 기자
  • 승인 2019.05.30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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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근대미술 분야가 소원한 느낌...이번 전시가 이런 분위기를 개선해 주지 않을까”기대
한국 미술의 두터운 토양을 복원하는 시리즈 전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MMCA)에서 29일 오전, ⟪근대미술가의 재발견1: 절필시대⟫展 개막을 앞두고 기자 간담회를 열었다.

⟪근대미술가의 재발견1: 절필시대⟫는 한국미술사에서 저평가된 근대기 작가를 발굴ㆍ재조명하여 한국 미술의 두터운 토양을 복원하는 시리즈 전시이다. 이번이 첫 번째 전시로, 50명의 작가 후보군 중 인지도 있고 전시작품 확보가 가능한 작가를 선정했다. 추후 2~3년에 한 번, 5회의 시리즈 전시로 기획했다.

전시는 30일 개막해, 오는 9월 15일까지 이어진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전관에서 정찬영(鄭燦英, 1906-1988)ㆍ백윤문(白潤文,1906-1979)ㆍ정종여(鄭鍾汝, 1914-1984)ㆍ임군홍(林群鴻, 1912-1979)ㆍ이규상(李揆祥, 1918-1967)ㆍ정규(鄭圭, 1923-1971) 6人의 근대작가 작품 134점과 아카이브를 선보인다. 

간담회에서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오늘은) 제 생일 같다. 20~30년 전 제가 발굴한 작품 상당수를 오늘 덕수궁으로 모셔왔다”라고 말했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 ⟪근대미술가의 재발견1: 절필시대⟫ 展을 소개하고 있다

이어 “임군홍은 제가 발굴한 작가로 회고전 준비와 논문을 썼으며, 도록 제작에 참여했다.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나니 나의 청년 시절이 떠오른다”라며 “당시 작가들이 왜 절필을 하였는지 생각하게 되고, 불행한 20세기 전반부에 살았던 작가들의 아픔이 느껴진다”라고 덧붙였다.

또한 “한국 근ㆍ현대 미술 정리를 본격화해야 하는데, 이번 전시가 그런 기초를 이루는 계기가 되는 전시가 아닐까 싶다”라며 “근대미술 분야가 다소 소원해지는 느낌이 있는데, 이번 전시가 분위기를 개선해 주지 않을까”라고 말하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윤 관장은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을 역임, 이응노ㆍ박생광 등을 조명했고 미국에서 은둔하던 국내 최고령 화가 김병기의 국내 복귀를 이끄는 등 작가 발굴에도 힘쓴 근대미술사 전문가다.

⟪근대미술가의 재발견1: 절필시대⟫에 소개되는 작가 6인은 일제강점기ㆍ해방기ㆍ한국전쟁 시기ㆍ전후 복구기로 이어지는 격동시대의 작품 활동을 보여준다. 전시명 ‘절필시대’는 당시 수 많은 작가는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절필할 수밖에 없던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과 미완의 예술 세계에 주목하자는 취지로 정했다.

전시는 총 3부로 구성했다. 1부 ‘근대화단의 신세대: 정찬영, 백윤문’, 2부 ‘해방 공간의 순례자: 정종여, 임군홍’, 3부 ‘현대미술의 개척자: 이규상, 정규’ 이다.

1부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채색화로 두각을 나타낸 정찬영과 백윤문을 조망한다. 해방 후 채색화에 대한 편견이 강해지며, 화단에서 잊혔다.

▲정찬영의 '식물세밀화' 작품 전시모습

정찬영은 이번 전시에 유일한 여성 작가이다. 보수적인 경성에서 미술을 배우며 이영일을 스승으로 사사했다. 1935년 채색화 <소녀>로 창덕궁 상을 받았으나, 둘째 아들의 죽음으로 작품 활동을 중단했다. 1940년대 식물학자인 남편 도봉섭을 돕고자 식물세밀화를 제작했다. 남편이 납북한 이후 정찬영은 교사로 활동했다. 이번 전시는 정찬영 유족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식물세밀화와 초본 일부를 최초 공개한다.

▲정찬영의 '식물세밀화' 아카이브 전시 모습, 식물세밀화 작품이 존재한다면, 식물도감에 실제로 실린 도상과 비교할 수 있다.

백윤문은 김은호의 화풍을 계승해 채색인물화에 두각을 보였다. 순종어진 제작에 참여할 정도로 빼어난 실력을 인정받았다. 1930년대 조선미술전람회에 꾸준히 작품을 출품했으나, 1942년 병으로 쓰러진 뒤 35년 동안 투병했다. 이번 전시는 건강한 남성의 생활을 소재로 한 풍속화 <건곤일척>(1939)을 볼 수 있다. 이외에 당대 시대미감에 맞게  전통ㆍ동양화 소재를 계승한 작품들을 전시한다.

▲백윤문, <건곤일척(乾坤一擲)>, 1939, 면에 채색, 150×165cm,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작품전시 모습

2부는 월북화가 정종여와 임군홍을 소개한다. 이들은 해방 후 1940년대 화단에서 왕성하게 활동했지만 월북 이후, 남한 미술사 연구에서 제외했다.

정종여는 일본에서 서양화와 일본화를 배우는 한편, 이상범 문하에서 한국화를 익혔다. 서양화와 동양화를 넘나들며 우리나라 실경산수와 국토ㆍ풍경을 스케치로 남겼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전 국토를 화폭에 담고자 하였으나, 분단으로 꿈을 이루지 못했다. 이번 전시는 월북 전 남한에 남긴 작품과 자료 등을 기초로 하며, 북한에서의 활동 일부도 전시하여 그의 작품 세계를 살핀다.

▲ 정종여, <의곡사 괘불도>, 1938, 면에 채색, 652×355cm, 진주 의곡사 소장. 작품전시 모습

정종여가 제작한 <진주 의곡사 괘불도>(등록문화재 제624호)를 선보인다. 정종여는 거창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해인사에서 생활했고, 해인사 스님의 후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한국에 자주 드나들며 사찰 관련 그림을 제작했다. 6m가 넘는 괘불은 동양화풍의 맑은 채색으로 그리는 등 전통 불화양식이 아닌 파격적인 화법으로 그렸다. 사찰에서 1년에 단 하루 공개하는, 봉안용 불화를 이번 전시 기간 내내 감상할 수 있다.

▲임군홍이 광고사를 운영하며 직접 그린 관광 브로슈어 도안 등의 아카이브를 전시하고 있다

임군홍은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하며, 중국의 풍경과 풍속을 담았다.  광고사를 운영하며 중국으로 건너가 자유로운 예술세계를 구축했으나 ‘운수부 월력 사건’으로 빛을 잃었다. 이번 전시는 그가 광고사를 운영하며 직접 그린 관광 브로슈어 도안 등의 아카이브를 통해 초기 광고디자인을 살필 수 있다.

이번 전시 표지작품 '가족'은 임군홍이 1950년에 그린 미완성 작품이다. 작은아들을 안고 있는 부인과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큰딸을 그렸다. 부인의 뱃속에는 곧 태어날 작은 딸이 있었다. 테이블 위 도자기들은 임군홍이 직접 수집한 것으로, 임군홍이 떠난 후 가족들은 도자기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위스키 병은 유족이 소장해 왔으며, 이번 전시에 실제 유품을 전시한다.

▲제일 위가 임군홍, <가족>, 1950, 캔버스에 유채, 94×126cm, 유족 소장이다. (왼쪽) 탁상 위 위스키 병, 실제 위스키 병 (유품) 전시 모습

3부는 한국 현대미술의 개척자, 이규상과 정규를 소개한다. 이들은 ‘모던아트협회’, ‘현대작가초대미술전’등에 참여하며 해방 후 현대미술 화단 선두에서 활동했으나 이른 나이에 병으로 타계하여(이규상 50세, 정규 49세) 작품 수가 적다.

이규상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1948년 김환기, 유영국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추상미술 단체인 ‘신사실파’를 결성해, 한국 현대 추상회화의 1세대로 활동했다. 첫 번째 개인전에 이어, 1963년 두 번째 개인전에 형상이 배제된 간결한 추상화를 발표해, 화단의 평가를 받지 못했다. 생활고로 일본인 부인과 세 자녀는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본인은 남아 가난과 병환에 시달렸다.

▲이규상, <구성 (Composition)>, 1959, 합판에 유채, 65×52cm, 개인 소장.김예진 학예연구사가 이규상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이규상의 생애는 이중섭의 생애와 오버랩한다. 이중섭이 문인들과 관계가 활발했던 것과는 반대로, 이규상은 그러지 못했다. 남아 있는 작품이 10여 점에 불과하고 알려진 행적이 없다. 다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이규상은 작품 구상에 종교적 심상, 염원 등을 표현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번 전시는 아카이브와 제자, 동료 등의 인터뷰 자료를 한자리에 모아 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소개한다.

▲이규상의 아카이브 자료 전시 모습

정규는 서양화가로 출발해 판화가ㆍ장정가(裝幀家)ㆍ비평가ㆍ도예가로 활동 영역을 확장했으나 그에 대한 평가는 회화와 비평에 국한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정규의 작품세계가 ‘전통의 현대화’, ‘미술의 산업화’로 변해가는 과정과 경희대학교에 요업공예과 초대학장이 된 뒤 도자기 파편을 수집하며 전통도자를 연구한 과정 및 건축물의 세라믹 벽화 작업을 살핀다.

▲ 정규가 도자에 유약을 바르고, 간단한 채색한 도자. 도자 바닥에는 정규의 서명을 남겼다

전시 연계 행사로 ‘한국 근․ 현대미술의 새로운 지형학’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를 9월 7일 개최한다. 미술사학연구회와 공동 주최로 열리는 이번 행사는 참여 작가와 작품세계를 주제로 연구자 5인이 발표할 예정이다. 별도의 신청 없이 참석할 수 있다.

한편 김예진 학예연구사는 이 자리에서 “이번 전시는 한국미술사  전반에 있는 작가들을 발굴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재조명하기 위해서 마련된 자리”라며 “그동안 주류 화가들 중심으로 기술되었던 한국 미술사의 저변을 확대하고, 소실될 위기에 처한 자료ㆍ연로하신 작가분들과 유족들의 기억을 수집하는 작업들이 함께 이루어 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