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인터뷰] 김정학 대구교육박물관장, 교육 넘어 세대‧시대간 소통의 박물관 연주하는 마에스트로
[Special-인터뷰] 김정학 대구교육박물관장, 교육 넘어 세대‧시대간 소통의 박물관 연주하는 마에스트로
  • 인터뷰·정리/이은영 발행인·조두림 기자
  • 승인 2019.07.19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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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콘텐츠 개발은 통섭 결과여야, 교육사 정립과 교육소재의 Minds-On
구사해 고정관념 깨는 새로운 문화 만들어가야”

스페인의 대표 건축가 가우디(1852~1926)는 평생의 걸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을 위해 40년을 구상하고 다듬으며 열정을 쏟아부었다. 이후 100년이 넘는 공사 기간을 거쳐 마침내 2026년 완공되는 그의 걸작을 보기 위해 세계의 관광객들은 아낌없이 바르셀로나행 항공편을 끊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가우디뿐만 아니라 한 분야의 마스터들은 일평생의 걸작을 위해 습작을 반복한다. 그리고 쌓은 경험의 총화로 마침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길이 남을 본인의 정수와 같은 작품을 남긴다. 

영남 최초의 교육박물관이 지난해 6월 15일 대구에서 개관했다. 국내에서는 3번째 교육박물관인 대구교육박물관은 개관 첫해 6만 6천 명이 찾은 성과를 냈으며, 개관 2년 차에는 다양한 공간을 마련 중인 등 현재진행형으로 진화하고 있다.

▲ 김정학 대구교육박물관장이 기획전시실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이은영
▲ 김정학 대구교육박물관장이 기획전시실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박물관이 예사롭지 않은 점은 초대 관장으로 근무 중인 김정학 관장의 ‘마스터 마인드’다.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국내외 방송 PD로 활약, 이후 문화예술회관 총감독과 관장을 두루 거친 김 관장은 이 밖에도 20여 년간 개인적 관심으로 세계 곳곳의 박물관을 방문해 쌓은 견문과 경험의 총화로 대구교육박물관을 시대에 부합하고 결이 다른 박물관으로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일하고 있다. 

“박물관 콘텐츠 개발은 통섭의 결과여야 한다. 교육사 정립과 교육소재의 마인즈 온(Minds-On)을 적절하게 구사해 고정관념을 깨는 박물관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라며 “또한 동시대에서 미래와 과거를 가늠하게 하는 교육콘텐츠를 만들어야 하며, 지금부터라도 차세대와 호흡할 수 있는 공감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야 한다. 기성세대의 기증 유물을 통해 부모님이 멋진 도슨트가 되는, 부모님의 경험치를 교육으로 받아들이는 공간이 바로 교육박물관”이라고 가치를 밝힌 김 관장. 

여름날 박물관을 찾아가는 길은 무더웠지만 박물관의 다채로운 전시와 기획은 신선했으며, 관장‧도슨트‧홍보팀‧지식인 등의 경계를 넘나드는 김 관장의 열정적인 설명은 이열치열(以熱治熱)로 무더위를 잊게 만들었다.  

참신하다. 대구에 가면 꼭 가봐야 할 명소가 하나 늘었다. 대구교육박물관이다.

(사진=대구교육박물관)

대구교육박물관은 지난해 6월 15일 개관한 신생박물관이다. 소개 부탁한다.

1979년에 개교하여 최근 폐교된 5천여 평방미터 옛 대구 북구 산격동에 위치한 대동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해 2년여 준비 끝에 기증 유물 2만여 점, 도서 9천여 건으로 개관했다. 대동초등학교는 2017년 3월 학령인구 감소로 인근 산격초등학교로 통합돼 그 자리에 박물관이 들어서게 됐다. 슬로건은 ‘마음이 통하는 교육콘텐츠의 탄생’, ‘교실을 넘어 꿈의 공간으로’다. 또한 대구교육청 산하기관으로 7개의 전시실, 5개의 체험공간을 가진 디지로그 박물관, '마인즈 온(Minds-on) 박물관'(이해하는 박물관, 관람객이 체험하면서 이해할 수 있도록 전시물에 숨어있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도우미를 활용하거나 보조 강연을 병행하는 기능을 첨가한 것)이다. 

박물관 개관 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2‧28학생의거, 특수교육의 요람으로서 대구, 한국전쟁기의 대구교육의 힘 등 교육수도 대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오롯이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타겟을 넓혀 학생, 학부모, 교사 등 교육과 관련된 모든 분들이 도움이 되는 박물관이 되고자 했다. 우리 것을 자랑하고, 교과과정에 맞추고, 다시 찾게 되는 박물관이 되도록 애쓴 흔적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박물관이 고고학(考古學)과 더불어 (당대의 ‘도시풍속학’으로 세태를 세밀하고 깊게 탐구해 미래의 발전을 위한 자료를 제공하는) 고현학(考現學)도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구상했다.

▲ 기증받은 1950년대 100점 만점 영어시험지
▲ 기증받은 1950년대 100점 만점 영어시험지

박물관에는 기증받은 50년대 영어시험지 등 역사의 생생한 자료들이 많다. 박물관을 꾸리는데 기증자들의 도움이 컸을 것 같은데, 개관 전 기증품을 받기 위한 홍보 등은 어떻게 한 것인지  

교육청이 중심이 돼 2년 동안 기증유물을 모았고, 현재 110분 정도가 기증해주신 20,0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변우용 선생님, 이상희 前장관님, 서예가 이상배 선생님, 조기훈 씨 등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다. 특히 변우용 선생이 기증하신 20억 상당의 유물로 ‘기증유물실’을 열었다. 거리에서 캠페인도 펼쳤고, 퇴임하신 선생님들을 설득하는 작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결과 상상이상의 유물들이 모여 있다. 학예실은 언제나 분류작업, 입력작업 등으로 분주하다.
우리가 자랑하는 유물을 몇 가지 든다면, 연경서원의 출석부라고 할 수 있는 <통강록>, 서포 김만중 선생의 평론집인 <서포만필> 필사본, 송촌 지석영 선생이 펴낸 우리나라 최초의 영어교재 <아학편> 그리고, 일제강점기인 1937년 경북여고 2학년 여학생이 11개월 동안 일본어로 쓴 일기장으로 한국판 <안네의 일기>라고 불리는 <여학생일기> 등이다. 

▲ 한국판 ‘안네의 일기’.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북여고) 재학생이 황국신민화교육을 받았던 1937년에 쓴 일기로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국어(일본어)를 상용하라고 한다” 등 일제강점기이 부당한 교육현실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역사 자료
▲ 한국판 ‘안네의 일기’.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북여고) 재학생이 황국신민화교육을 받았던 1937년에 쓴 일기로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국어(일본어)를 상용하라고 한다” 등 일제강점기이 부당한 교육현실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역사 자료

박물관 개관 1주년을 맞은 소회와 성과는 무엇인지

대구교육박물관이 그 탄생을 예고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존재를 매우 추상적으로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다.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교육의 가치, 문화의 가치, 역사의 가치를 생각하면서 개관 준비부터 1주년을 맞기까지 나름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여정에서 오랫동안 많은 분들이 성원해주셨다. 그래서 무척 감사한 마음이다.

특히 예전의 박물관은 얼마나 많은 소장품을 보유하고, 전시하느냐에 따라 그 명성이 좌우되었다면 이제 박물관은 수많은 소장품을 어떤 이야기와 주제로 보여주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는 것 같다.

대구교육박물관이 소장한 유물들은 모두 기증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 물건들에는 세월의 무게가 그냥 내려앉은 게 아니라, 교육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그리면서 미래에 만나게 될 푸른 꿈들을 위해 켜켜이 쌓여진 것이다. ‘기증은 역사를 전하는 보람 있는 나눔’이라며 캠페인을 펼치고, ‘여러분이 전해주신 작은 성의가 다음 세대를 이끄는 역사’라며 그 어떤 뜻도 소홀히 하지 않으며 박물관의 이야기를 엮어갔다. 

박물관 개관 첫해에 6만 6천 명이 찾은 성과를 차치하고라도 교육에 연관된 사회자원으로, 추억을 매개로 방문자 세대 간의 소통이 가능해 ‘소통의 박물관’으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는 데 보람을 느낀다.

아울러 지역주민들의 배려가 박물관으로 탄생에 큰 힘이 되었다. 그 덕분에 그야말로 상생하는 지역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전국의 교육박물관이 3곳인데, 이제 전국적인 관심을 끌게 되면서 각 지역에서도 교육박물관을 세우려는 움직임들이 많아졌다. 카피라이트가 아닌 카피레프트의 마인드로 그분들에게 우리 나름의 노하우를 적극적으로 전해주고 싶다. 

이 밖에도 교육청의 지원과 각급 학교의 관심 덕택에, 초등4년생의 관람권장기관으로서 교육프로그램의 개발과 보급이 큰 성과를 봤다. 가을부터는 신축중인 작은 소극장(203석)이 문을 열고, 컨테이너를 활용한 체험공간이 확대되면 더욱 다양하고, 의미 있는 박물관이 될 것 같다.

▲ 한국전쟁 중에도 배움의 열정은 이어졌다. 서울에서 피난 온 중고등학생을 가르치기 위해 개교한 ‘서울피난대구연합중고등학교’ 학생이었던 마종기 시인, 가수 현미 등의 생생한 증언이 담긴 인터뷰
▲ 한국전쟁 중에도 배움의 열정은 이어졌다. 서울에서 피난 온 중고등학생을 가르치기 위해 개교한 ‘서울피난대구연합중고등학교’ 학생이었던 마종기 시인, 가수 현미 등의 생생한 증언이 담긴 인터뷰

1년 동안 많은 기획전과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거나 보람 있었던 것이 있다면

개관 후 3번째의 기획전이 진행 중이다. 재방문율을 높이고,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기획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개관일이 6월 15일이기에 68주년을 맞은 6‧25를 생각했다. 특히 대구는 한국전쟁 당시 모든 것의 보루였고, 한국전쟁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도시이기 때문에 적합한 기획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서울에서 피난 온 중고등학생을 가르치기 위해 개교한 ‘서울피난대구연합중고등학교’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발굴해서 알렸다. 결과적으로 6‧25를 어른의 눈이 아닌, 학생의 시각으로 본 것이 신선했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이 학교를 다녔던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에 계시는 시인 마종기 선생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두 번째는 대구가 유네스코가 정한 음악창의도시이기도 하고, 매년 뮤지컬 축제, 오페라 축제, 포크음악축제가 열리는 도시이다. 그래서 영국과 미국의 걸작공연포스터 60점을 수집, 공연예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스테이지(stage)>라는 기획전을 마련했고, 큰 반향을 일으켰다. 대구시의 문화정체성을 교육과 함께 지켜나가겠다는 메시지가 전달되었을 것으로 자평한다.

그리고 지금 개최되는 기획전은 <영어, 가깝고도 먼>이라는 제목의 ‘영어역사전시회’이다. 구한말 우리나라에 영어가 들어와서, 일제강점기와 미군정을 거치면서 지금까지 어떻게 교육이 이뤄졌는지 다양한 유물과 함께 보여주는 전시회이다. 미래교육을 위한 영어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세계시민이 되는 훌륭한 도구로서의 영어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목적이다. 전문가들의 특별강연도 네 차례 마련하는 등, 전시장에만 갇힌 기획행사가 아님을 알리는 중이다.

네 번째는 토종씨앗이야기를 전해주는 ‘거룩한 생명, 씨앗’, 다섯 번째는 ‘잃어버린 우리전통놀이’ 특별전을 준비 중이다.

▲ 1919년 영어 독학서인 문명진의 ‘무사자통 영어독학’. 당시의 번역이 상당히 재미있다
▲ 1919년 영어 독학서인 문명진의 ‘무사자통 영어독학’. 당시의 번역이 상당히 재미있다

교육이란 일반 보편성의 무거운 아이템인데 지역박물관의 한계도 있을 것 같다.

한계란 없다고 본다. 입시라는 시각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교육은 매우 흥미로운 소재가 아닌가. 부모님이 멋진 도슨트가 되는 박물관이 바로 교육박물관이다. 부모님의 경험치를 교육으로 받아들이는 공간이 바로 교육박물관이다. 우리 교육박물관은 지역교육역사의 왜곡과 오류를 찾아 바로잡는 것이 큰 숙제이다. 역사의 거울을 맞추는 작업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잘하고 있다고 자평해도 될 것 같다. 

박물관 개관 첫해에 6만 6천 명이 찾은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공급자의 관점이 아닌 수요자인 아이들은 유물과 프로그램 등 관심이 많이 떨어진다 한다. 이를 해결해 나가는 방법이 있는지

우리 박물관 학예실에는 각급 학교에서 파견 온 선생님들이 많이 계신다. 그분들의 교직현장경험이 박물관교육에 그대로 반영되어 효과가 크다. ‘교육박물관의 교육프로그램은 남달라야한다’는 소신이 분명하고, 자체프로그램의 개발방법도 ‘지역밀착형’이라 식상하지 않으며, 소통도 매우 잘 되는 편이다. 박물관교육의 새로운 ‘표준’을 만들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 노하우를 모두에게 기꺼이 전해주고 싶다.

대구교육박물관의 정체성은 무엇이라 생각하며 어떻게 살려나가고 싶은가

대구교육박물관의 정체성은 먼저, 관심과 배려로 세워졌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역사란 것이 홀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면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융복합, 통섭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박물관에서 유물을 이용한 상상화그리기 대회를 열었는데, 학생들의 역사에 대한 시선이 너무나 신선해서 놀라웠다. 프로그램도 교과과정을 벗어나지 않은, 융복합 콘셉트를 활용해서 긴 호흡으로 개발해나가겠다.

대구가 한때 교육도시로 이름이 높았다. 하지만 그 명성이 퇴색된 듯한데 이 부분에 대한 의견은

여러 가지 지표를 토대로 아직도 ‘교육도시’로서 명성은 여전하다고 생각한다. 대구교육박물관은 ‘자랑스러운 교육도시’로서의 대구의 역사를 찾아내는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는 중이다. 기미년 3‧8만세운동, 일제강점기의 저항운동, 장한 학도병이야기, 2‧28학생의거, 특수교육 등으로 융복합 콘텐츠를 만들어, 그야말로 ‘법고창신’, ‘온고이지신’을 가르쳐주는 공간임을 알게 한다. 모두 대구교육박물관에 오면 만날 수 있는 팩트들이다. 

▲ 대구교육박물관 로고 (사진=대구교육박물관)
▲ 대구교육박물관 로고 (사진=대구교육박물관)

박물관 로고와 마크가 눈에 띈다. 특별한 의미가 있다면

큰돈을 들여 만들고 싶지 않았다. 디자인 업체에 특별히 의뢰해 제작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아이디어로 해결했는데 다행히 좋은 결과물이 나왔다. 두 동의 4층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층별로 컬러이미지를 사용한다는 걸 알리면서, 로고타입은 <훈민정음해례본>(국보70호, 목판본, 간송미술관 소장)에서 집자‧변형해서 만들었다. 가로세로로 배열해 봤는데, 보는 분들이 다들 한글이 참 이쁜 글씨라는 걸 알게 되었다는 반응이다. 한편 15세기 중엽의 한글이 표현하지 못한 글씨는 초성과 종성 일부를 별도로 집자하여 표현했다.

직접 방문한 세계박물관만 해도 다수인 것으로 알고 있고 한 매체에 글도 연재하고 있다. 박물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궁금하고 그 경험이 대구교육박물관에 어떻게 녹아있을까

하드웨어만 이야기되는 박물관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할까. 콘셉트, 전시방법, 교육프로그램이 관심의 시작이었다. 동네박물관에서도 무릎을 쳤고, 대형박물관에서도 실망한 부분이 많았다. 돈만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벤치마킹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만의 콘셉트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돌아본 박물관들에게서 크고 작은 생각들을 많이 도움받았다. 그 멋진 큐레이션은 돈이 해결해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회가 되면, 그런 정보들도 모아두면 다른 분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시간 나는 대로 정리를 하고 있다. 

▲ 크로마키 촬영을 통해 리포터가 되어 간접적인 진로 체험활동을 하는 '뉴스 현장체험' 코너
▲ 크로마키 촬영을 통해 리포터가 되어 간접적인 진로 체험활동을 하는 '뉴스 현장체험' 코너

지역일간지에 다양한 테마와 주제로 그동안 돌아본 세계박물관을 소개하고 있다. 지금까지 얼마나 했으며 자료는 어떻게 수집‧정리하는가

지역신문인 영남일보에 월1회 박물관이야기를 <박물관에서 무릎을 치다>라는 타이틀로 연재하고 있다. 이번 달이 열한 번째다. 20 여 년 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찾아다니며 기록해둔 걸 알리는 중인데, 관광아이템으로 소개하는 글이 아니고, 우리 대구도 한번 해봤으면 하는 각오를 다짐하는 박물관들이다. 잘 알려진 대형박물관이 아닌, 나름의 주제를 정하고, 거기에 맞는 국내외 2개의 박물관을 매칭 시켜 감성적으로 소개하는 글이다. 처음으로 심도 있게 소개하는 박물관들도 있어서, 관심 있는 분들이 많은 격려를 보내주신다.(웃음)

방송 PD로 오래 일했었다. 이후 국악방송과 구미문화예술관장을 거쳐 박물관장에 부임했는데 이전 커리어가 박물관 운영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궁금하다.

박물관에서 일하는 것은 ‘나의 경험의 총화’를 발휘하는 거라고 늘 생각한다. 영문학을 전공했고, 국내외에서 방송프로듀서로 오래 지내왔다. 그리고 문화예술회관 총감독과 관장 근무경력까지 합쳐진 경험으로 조금 결다른 박물관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역사프로그램제작에 몰두한 경험, 공연예술의 기획경험들이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고, 다양한 성향의 대중을 만나면서 쌓여진 경험치가 그야말로 고현학(考現學)을 뒷받침하는 ‘마인즈 온’ 박물관으로 향하는 잣대 역할을 하게 될 거라고 믿는다. 

▲ 1935년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에서 만주로 떠난 수학여행 안내책자. 190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시작된 수학여행은 1920년대가 되면서 일본이나 만주로의 원거리 여행이 일반적인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 1935년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에서 만주로 떠난 수학여행 안내책자. 190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시작된 수학여행은 1920년대가 되면서 일본이나 만주로의 원거리 여행이 일반적인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향후 박물관이 시도하고 싶은 사업이 있는지

대구교육청의 지향점이 ‘미래교육’이다. 그 기조에 발맞추는 여러 가지 시도를 구상 중이다. 우리 역사를 통한 ‘세계인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글로벌역량을 키우는데 박물관도 많은 제안을 할 생각이다. 그리고 (잊혀진) 지역출신의 교육자와 문화예술가들의 발굴을 통해 학생들에게 큰 자부심을 심어주는 것이 박물관이 할 수 있는 가장 쉽고도 가장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대구에는 역사박물관이 없지만, 교육 관련 역사를 나름 체계 있게 정리해나가는데 큰 보람을 느낀다.

이상적인 박물관상은

어떤 이유에서든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해 오류를 범하지 않고, 지역성‧시대성에 편견을 갖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후대에 반듯한 교육 자료로 남아야 한다는 것도 중요하다. 모든 박물관은 교육박물관 아니겠는가. 우리가 영문명을 ‘Education Museum’이 아닌, ‘Museum of Education’이라 정한 것도 그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