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문화적 트라우마의 극복과 새로운 문화의 창조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문화적 트라우마의 극복과 새로운 문화의 창조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19.12.16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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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우리에게 있어서 서양이란 무엇인가. 지구는 둥근데 동서와 남북으로 갈려 동양과 서양, 남반구와 북반구로 호칭하는 것이 과연 타당하기나 한 것인가. 최근 약 보름간에 걸쳐 런던과 아테네, 크레타 섬을 돌아보고 새삼 이런 의문이 들었다. 특히 동양과 서양이란 용어를 놓고 네것과 내것, 네편과 내편을 가르는 편가르기 방식이 과연 옳은 것인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런 관행에 일말의 회의가 일었다. 동양 사람이 서양을 방문하든, 서양사람이 동양을 방문하든,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문제는 국가 단위나 문명권 단위로 논의가 확대될  때 미묘한 문제들이 불거진다는 데 있는 것이다.

가령 각종 이데올로기나 인종적 편견, 종교와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갈등과 이로 인한 투쟁이 심화될 때 문제가 심각해진다. 이를 미술의 분야로 국한시켜 생각해보면 그 실상을 더욱 명료하게 파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우리의 경우에 소위 '한국적' 이란 용어를 예로 들 수가 있다. 90년대에 미술계의 일각에서 '한국성' 찾기 운동이 일어난 적도 있듯이, 이것은 일종의 가위눌림처럼 미술을 하는 동시대의 한국인이면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봤음직한 사안이다. 그런데 이런 류의 고민이 지닌 맹점은 그러한 시도들의 대부분이 관념적인 접근에 그칠 소지가 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일견 그러한 관념은 우리의 의식 심부에 도사리고 있는 문화적 열등감에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지하듯이 '한국성'은 로컬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 점은 요즘 세간에 논의되고 있는 단색화에 이르러도 역시 마찬가지다. 크게 볼 때 이 모두가 서양이라는 주류의 관점에서 보면 로컬, 즉 변방의 목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것의 한 예를 이번에 런던에 있는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에서 보았다. 이곳의 한국관에 전시된 작품들의 대다수는 우리가 소위 전통적이라고 부르는 범주의 것들인데, 달항아리를 비롯하여 한지와 창호, 갓, 한복, 색동 등등은 대개 세계의 주요 도시에 있는 한국문화원의 전시 품목과 겹친다. 이것을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강박적인 동시에 관념적이며, 나아가서는 관료적인 사고의 산물인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 스스로 우리의 문화예술이 주류의 변방이며 로컬임을 자인하는 꼴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세계 유수의 박물관에 한국관이 생겼다는 사실이 어찌보면 국력 신장의 상징처럼 보여 마음 뿌듯한 것도 사실이다. 이는 긍정적인 측면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삼성이나 현대처럼 한국의 기업이 서양의 유명 미술관의 후원자가 되는 마당에 더욱 세련된 문화행정을 펼 칠 필요가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이미 사문화된 문화예술이 아니라 현재 살아 숨쉬는 문화예술을 당당히 보여줌으로써, 한국이 동시대 세계 문화의 흐름과 형성에 이바지하고 있음을 꾸준히 인식시키는 일이다.

주지 하듯이, 서양의 문화와 예술이 세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 시기는 근대성(modernity)이 싹튼 르네상스에 이르러서이다. 서양 제국주의의 팽창을 가져온 이 시기는 결과적으로 식민지 경영을 통해 서양의 문화예술을 우세종으로 등극시키고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북 아메리카 등 식민지의 문화예술을 주변화하는 문화적 프레임을 덧씌웠다. 유럽의 오리엔탈리즘은 이의 대표적인 경우거니와, 그후 이를 극복하기 위한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정은 별로 나아지는 것 같지 않다.

바야흐로 인류세가 운위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의 과제는 더욱 복잡한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한편으로는 뿌리깊은 문화적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새로운 문화창조를 해야하는 한편, 날로 황폐해져 가는 자연조건 아래서 생태계의 위기 극복이라는 지구촌 사회의 당면과제에도 동참해야 하는 참으로 어려운 시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서양을 문화의 적이 아니라 생존의 동지로 대하는, 그럼으로써 보다 수준높은 차원의 협력 파트너로 인정하는 대화합의 전환을 꾀해 나가야 할 것이다.